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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211화 (210/219)

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211화

백화연.

그녀는 레이븐 생텀과 길르텐 펄 리쉬의 전장에 한 박자 늦게 도착했 다.

그 덕분에 그녀는 다른 누구도 보 지 못한 진귀한 광경을 볼 수 있었 다.

전 차원에서 단 여섯 번밖에 없었 던 그리고 현재 일곱 번째의 통로가

열리는 광경.

레이븐 생텀과 길르텐 아니,크라 서스의 영혼이 ‘무언가의 검’에 의 해 찔리는 광경이었다.

“저건……

-일곱 번째 통로구나.

백화연의 머릿속에 에니안 생텀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어쩐지 슬픈 듯한 어조였 다.

용의 형상을 띈 무언가는 크라서스 의 심장에 검을 박아넣은 직후,레 이븐 생텀 역시 똑같은 방법으로 검 을 찔러 넣으려 했다. 하지만 검이

심장에 꽂히기 직전 레이븐의 손에 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더니 그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저건…… 레이븐이 있던 자리의 차원 그 자체가 왜곡되었구나.

용의 형상을 띈 무언가는 굉장히 당황하는 둣싶더니,눈을 감고 무언 가를 탐색하였다. 그러나 이 주변에 지성을 가진 생명체는 백화연밖에 없으며 그리픈 차원을 통틀어 레이 븐 생텀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사라 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이라도 데려가겠소.’

비록 영혼의 통로를 여는 대가인, 시전자의 영혼을 가지진 못했지만 이미 통로는 활짝 열린 상태이다.

용의 형상을 띈 무언가는 크라서스 의 영혼을 통로 속으로 집어넣기 위 해 검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오늘은 영 날이 아닌 모양이었다.

‘잠깐,이게 무슨……!’

하늘이 마치 찢어지듯 거대한 구멍 이 쩍 열렸다. 직후 검은색의 나뭇 가지 같은 것들이 우수수 쏟아지더 니 크라서스의 영혼을 붙잡고선 강 제로 끌어당겼다.

용의 형상을 띈 무언가는 어떻게든 크라서스의 영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심장에 꽂힌 검을 붙잡고 안간 힘을 썼으나, 하늘에서 내려온 강제 력이 그것보다 훨씬 더 막강했다.

‘이럴 수가. 영혼 봉쇄를 저항하다 니……

아마 용의 형상을 띈 무언가는 영 원히 모를 것이다.

자신을 만든 존재보다도 훨씬 더 압도적인 힘을 가진 무언가가 이 차 원계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마침내 크라서스의 영혼은 구멍 뚫 린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고,용

의 형상을 띈 무언가는 결국 일곱 번째 통로만 열어버린 채 아무것도 회수해가지 못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왠지 시무룩 해진 그 무언가는 서서히 모습이 흐 릿해졌다.

그 모습을 끝까지 감상한 백화연은 어딘가로 시선을 향했다.

‘길르텐 펄 리쉬……

그녀는 그저 걷고 또 걸었을 뿐이 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은 하늘 높이 솟아있는 천공섬이었으며 그것이 추 락하고 있는 장소였다.

길르텐 펄 리쉬는 크라서스에 의해 밀쳐져 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추락하고 있 었다.

백화연은 즉시 걸음을 돌렸다.

길르텐 펄 리쉬는 추락하고 있었 다.

끝없이,끝없이,나락으로.

천공에 세워둔 자신의 옥좌에서부 터 그리픈의 밑바닥까지 이어진 지

하세 계.

그곳에는 온갖 마수가 들끓고 있었 으며 흉흉한 살기를 그녀에게 보냈 지만,그 어떤 생명체도 감히 길르 텐을 건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죽는다.

본능을 자극한다.

건들면 죽을 것이다.

길르텐의 온몸에서 그러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

그녀는 자신에게 빙의되었던 영혼 크라서스를 떠올렸다.

그저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 해 계약했을 뿐인 그런 관계. 고작 그것이 끝일 터였다.

그러나.

크라서스는 길르텐의 영혼이 이 차 원에서 추방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를 밀쳐내고 본인이 희생당하는 것을 택했다.

‘어째서?’

의문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나락에 추락함과 동시에 깨 닫고 말았던 것이다.

그 총명한 황금색의 눈동자.

비록 영혼뿐이었지만,그 눈동자만 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아아…….,

어째서 뒤늦게 알아했는가.

어째서 나락으로 추락하기 직전에 눈치 챘는가.

조금만 더 빨리 알아챘더라면.

‘레가로스……

길르텐은 레가로스를 만나러 가기 위해,어딘가에서 죽음을 맞이한 드 래곤 크라서스의 영혼을 자신에게 불러들였다. 그러나 크라서스는 레 가로스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 익숙한 영혼의 향기를 어째서 맡지 못했단 말인가.

어리석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크라서스의 마 지막 모습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길르텐이 나락으로 추락하기 직전, 크라서스의 영혼은 일곱 번째 통로 에서 나타난 어떠한 존재의 검에 심 장이 꿰뚫렸다. 영혼이 직접 쑤셔지 는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일 것이다.

크라서스 아니,레가로스는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에서도 길르텐 펄 리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다.

‘레가로스…… 당신도 날 찾고 있 었군요……

왜 기억해내지 못했을까.

‘리오폰드 3세! 과연 용감하구나! 나의 무구를 받아서,신제국을 세워 라!’

‘에니안 생텀,너는 누구보다도 현 명한 인간이 될 것이다.’

‘길르텐 펄 리쉬,당신은……

그때 레가로스가 뭐라고 말했더라? 쿠응!

길르텐의 몸이 들썩였다.

빛조차도 감히 들어오지 못하는 지

하 깊은 세계. 길르텐은 그곳에 멍 하니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더라. 크라서스 가 일곱 통로의 검에 찔린 것이 바 로 직전 같은데 너무나도 멀게 느껴 진다.

방금 전인가? 아니면 1년 전? 그 것도 아니면 10년이나 흘렀던가?

시간 감각이 서서히 사라진다.

길르텐은 모든 의지를 망각하고 말 았다.

천 년이나 그리워하던 이를 바로 지척까지 불러들였으면서도 알아보 지 못한 멍청이에게 더 이상 살아갈

이유는 없다.

‘이대로 죽는 것도…… 이대로 죽 어도 좋은 걸까?’

살아생전,길르텐 펄 리쉬는 오로 지 자신의 사랑만을 위해 수많은 생 명을 희생해왔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이종족을 포함 해 그녀의 손에 죽어간 이들의 얼굴 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천 년이나 살았으면서도,그녀의 뇌는 신성력에 의해 강제로 과부하 가 걸려 모든 기억이 온전히 고정되 었다.

감정이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기폭

이 심한 인간에게 있어 가장 끔찍한 저주가 아닐 수 없었다.

길르텐은 여전히 레가로스를 그리 워했다. 마치 어제 헤어진 것처럼. 끝없이 그리워한다.

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리워했음 에도 그 감정은 옅어지지 않고 지금 도 그녀를 괴롭혔다.

‘만나고 싶어…….,

눈물이 새어나왔다.

울 자격 따윈 없다고 알고 있음에 도 인간이란 너무나도 나약해서 그 저 눈물을 홀리고 만다.

털썩!

마침내.

짙은 어둠 속 어딘가에 몸을 뉘인 길르텐은 일어설 의지조차 없이 멍 하니 어딘가를 쳐다보았다. 과연,그 녀는 올려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려 보고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 면 옆을 보는 걸까? 아니면 뒤를 보는 걸까?

방향을 알 수가 없는 기묘한 공간.

지금까지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를 자신이 없었다.

그를 만날 수 없는 삶을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마침내 길잡이를 손에 넣었는데.

그를 만날 수 없다니. 아이러니한 일이구나.’

차원 여행자의 길잡이.

크라서스가 몸에 빙의된 그 순간 그녀는 그 권능을 얻을 수 있었다.

단 한 번뿐이지만 원하는 곳이라면 차원과 시간을 막론하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능력.

하지만 의미가 없어졌다.

크라서스 즉 레가로스의 영혼이 그 녀를 찾아왔다는 것의 의미는 단 하 나.

레가로스는 이미 죽었다는 뜻이다.

‘내 삶의 모든 이유가 사라졌어.’ 저벅.

“길르텐 펄 리쉬.”

난데없이 그녀의 귀에,어떤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하 나의 목소리였음에도 두 개의 목소 리가 겹쳐있는 것만 같았다.

길르텐 펄 리쉬는 천천히 몸을 일 으켜 시선을 돌렸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자유로이 흩날 리는 여인이 검 한 자루를 든 채, 길르텐을 노려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길 르텐은 그 속에 깃는 어떤 존재감을 눈치 첼 수 있었다.

“에니안…… 오랜만이구나.”

“그래,꼴이 말이 아니군.”

길르텐은 웃었다. 에니안을 향해.

“마침…… 잘 왔어. 날 죽이러 온 거겠지?”

그렇다면 죽여줘.

그리 말하며.

길르텐은 가슴팍의 옷을 활짝 열었 다.

새하얀 자물쇠처럼 생긴 문신이 길

르텐 펄 리쉬의 심장이 있는 부근에 새겨져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 오는 죽음에게서 도망칠 수 있게 해 주는 문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길르텐은 너무나도 많은 희생을 치 러야만 했다.

“이 축복이자 저주를 지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에니안 생텀, 널 제외하고선……

길르텐 펄 리쉬의 시선이 백화연의 검을 향했다.

그녀의 삶을 완전히 잠군 채,달아 나지 못하게 하는 자물쇠가 있다면 열쇠 또한 존재하기 마련.

백화연이 들고 있는 검이 바로 그 열쇠였다.

“길르텐…… 넌 결국 이렇게……

“후후,정말 구질구질한 삶이었지.”

백화연은 서서히 길르텐에게 접근 하였다. 들고 있는 검에 힘을 줘 그 녀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사후세계가 있다면 너는 죽어서도 좋은 곳에 가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껏 길르텐 펄 리쉬라는 존재에 의해 바스라진 영혼들.

그 대가를 치르려면 족히 만 년은 더 걸릴 것이다.

길르텐 펄 리쉬는 눈을 감았다. 눈 물이 줄줄 흘러나온다.

죽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까, 사랑하는 자를 보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그리움일까,혹은 자신의 처지 가 너무 처량했기 때문일까, 죄 지 은 자신이 혐오스러웠던 탓일까.

아니,전부 틀렸다.

길르텐 펄 리쉬는 백화연 때문에 울고 있었다.

“네 눈빛이 너무나도 가여워서,미 쳐버릴 것만 같구나.”

“그게…… 무슨 소리죠?”

에니안이 아닌 백화연이 답했다. 길르텐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었 다.

“나와 똑 닮은 눈을 하고 있지 않 느냐……

만날 수 없는,이루어질 수 없는 상대에 대한 끝없는 갈망.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우리를 이토 톡이나 괴롭게도 만들어.”

마음을 훔쳐간 채, 영원히 돌려주 지 않는다.

그것도 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

“너는 나를 이해하게 될 거야.”

언젠가 먼 미래에 백화연 역시 드 래곤이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면서 도 증오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길르텐이 백화연의 뺨을 쓰다듬었 다. 그것만으로도 길르텐이 가지고 있던 어떤 권능 하나가 백화연의 심 장으로 스며들었다.

“네가 사랑하는 것을 찾아 나서도 록 하거라.”

그렇게.

길르텐 펄 리쉬는 눈을 감았다.

백화연은 착잡한 표정을 지은 채

쓰러진 길르텐 펄 리쉬를 바라보았 다.

-곧.

에니안이 백화연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이 정신마저도 유지하지 못 한 채,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곧 죽음.

길르텐 펄 리쉬가 타인을 희생시키 는 방법으로 억지로 ‘축복’을 부여 받아 삶을 이어간 것과는 다르게 에 니안 생텀은 순수한 마나의 힘으로 일평생을 버텨왔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에 다다랐고 에 니안은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부디,옳은 선택을 하기 바란다.

그것이 에니안 생텀의 마지막 말이 었다.

머릿속에서 강렬했던 정신체가 빠 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백화연은 눈 을 감았다.

‘곧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올 거라 고?’

길르텐 펄 리쉬는 틀렸다.

곧이 아니다.

그녀는 지금도 길르텐 펄 리쉬를 이해하고 있었다.

어딘가 너무나도 먼 곳에 존재하여

닿을 수 없는 사랑을 하는 그녀의 마음을.

그저 눈이 마주친 그 순간부터 알 고 있었다.

백화연은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었 다.

‘차원 여행자의 길잡이.’

단 한 번뿐이지만.

원할 때,원하는 곳으로.

‘언젠가 서천영이 이 대륙을 떠나 게 될지라도.’

그것이 이별이라면.

시간과 공간마저 초월하여.

‘다시 찾아갈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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