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216화
고대에서부터,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차원 속,수많은 시대에, 수많은 언어가 존재해왔고.
레가로스가 여태까지 보아왔던 모 든 종류의 언어가 바로 이곳에 기록 되어 있었다.
단,하나의 언어만을 제외하고서.
‘생각해 보면.’
파트라슈는 과거를 떠올렸다.
과거보다 더 머나먼 과거.
레가로스와 만났을 시점.
‘나와 레가로스는 그때 처음 만난 게 아니었어.’
서천영의 이전 대에 함께했던 드래 곤은 레가로스였다. 그것은 대략 그 리픈의 시간상으로 따지면 천 년 정 도 이전이겠지. 하지만 파트라슈는 천 년 전에 레가로스를 처음 만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도…… 더 오래 전.’
그리픈 대륙의 아주 먼 옛날.
인간들이 막 태어나 살아 숨쉬기
시작하여 역사라는 것이 처음 기록 되던.
천 년보다도 훨씬 더 오래 전,그 시대에.
파트라슈는 태어났다.
그리고 처음으로 눈을 뜬 순간,레 가로스와 만나게 된다.
‘네 이름은 시리온이야.’
‘……시리온?’
‘응.’
아직 어리고 젊던 시절의 레가로
파트라슈는 어렵지 않게 당시 레가
로스가 사용하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칼라할.’
칼라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레 가로스는 파트라슈와 처음 마주했 다.
지구에서 태어나,최초로 이웃 차 원인 그리픈으로의 이동에 성공한 칼라할은 모든 것이 낯설었고 또한 신기했다. 그 와중에 정신체에 가까 웠던 파트라슈의 탄생 장면까지 보 고 말았으니,그녀와 함께 행동했던 것 또한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그래…… 그때,칼라할과 나는 장
난삼아 암호를 하나 만들었었어.’
그것의 패턴은 매우 단조로워 누가 배워도 쉽사리 습득할 수 있을 정도 로 단순했지만,반대로 말하자면 누 구에게도 알리지 않을 경우 이 세상 에서 온전히 칼라할과 시리온 만이 알고 있는 암호라는 이야기가 된다.
아주 먼 옛날.
칼라할과 시리온.
그들은 그렇게 작은 암호를 만들어 냈고…….
죽기 직전,크라서스였던 칼라할은 자신의 두뇌에서 저 암호에 대한 기 억을 지워냈다.
골드 드래곤 하트에서부터 기묘한 정령어가 어른거린다. 그것은 아주 어린 시절의 칼라할과 시리온이 나 눴던 암호. 또 다른 인격체의 레가 로스가 자신의 두뇌에서 차마 캐내 지 못했던 정보.
파트라슈는 그것을 온전히 해석할 수 있었고,덕분에 하트에 내장되어 있던 레가로스의 계획을 온전히 실 행시킬 수 있었다.
그 대가는.
‘레가로스의 육체와 영혼.’
이것을 시행하려면 레가로스 스스
로가 살아있어야 만이 가능했다. 그러나 계획이 완성되기 직전.
너무나도 오랜 세월을 살아왔던 레 가로스는 마침내 수명이 다해버렸 고.
결국 죽는 그 순간 자신의 영혼을 되찾아주기 위한 인물을 선정하였던 것이다.
길르텐 펄 리쉬 그리고 시리온.
‘레가로스…….,
천 년 전, 레가로스와 파트라슈의 만남.
그와 그녀는 사실 두 번째 재회였
다.
그러나 파트라슈는 그러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레가로스와 처음 만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령체인 그녀는 기억을 저장할 만 한 저장소가 영혼 밖에 없다. 너무 나도 빈약한 영혼을 가진 정령들은 그 영혼에 담을 수 있는 정보의 한 계가 다다르면 그 순간이 바로 수명 의 끝이다.
반대로 말해서 기억을 리셋 시킬 수만 있다면 영원히 살 수도 있다는 의미.
‘미안,시리온. 난 네가 죽기를 원
하지 않아.’
칼라할은 파트라슈가 죽기 직전, 그녀의 영혼에서 모든 기억을 빼내 어딘가에 저장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며 그 행위는 무한히 반복되었 다.
‘언젠가.’
‘이 대륙에 또 다른 용이 찾아올 거야.’
‘이 큐브를 받아.’
‘지금은 보잘 것 없지만.’
‘네가 같이한다면 다른 용에게 도 움이 될 거야.’
‘그들과 함께 이곳을 지켜줘.’
‘영원히.’
그녀는 눈을 감았다.
모든 기억이 영혼에 각인되었다.
천 년 전,레가로스가 아무것도 기 억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인사를 건 넸던 그 순간까지.
‘오랜만이다.’
'……?’
‘하하,당황할 것 없다. 그래. 네 이름은 기억해?’
‘난 이름이 없어.’
‘……그랬지. 그럼 시리온으로 하 자.’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걸.’
"하하하. 넌 그때도 그렇게 말했 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자꾸.’
어쩐지 첫 만남 때.
레가로스의 표정이 이상하게 쓸쓸 하다 싶었다.
그는 그녀에 대해 모든 것을 기억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만 난 것처럼 행동해야만 했다.
칼라할은 시리온을 기억하고 있다.
시리온은 칼라할을 기억하지 못한 다.
그러나.
칼라할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레 가로스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시리 온에게 자신을 각인시켰다.
어차피 언젠가는 잊힐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에 대한 모든 기억을 그녀가 다시 찾아주길 바라며.
‘아아……
파트라슈의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칼라할……
금색으로 이루어진 톱니바퀴가 허 공에 서서히 생성되더니 서로 간에 맞물렸다. 덜커덩,금속음도 아니고 마찰음도 아닌 기묘한 소음과 함께 그것들이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한 다.
사방에 얽혀있던 일곱 개의 공간들 이 조금씩 퍼즐처럼 자리를 잡아나 갔고,가운데에 뻥 뚫린 구멍을 통 해 하나의 커다란 길이 생성되었다.
또 다른 인격의 레가로스가 눈치 채지 못했던 암호.
그러나 파트라슈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쉬운 암호였다.
‘내 기억들 전부,네가 가지고 있 었구나.’
그녀는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왔 다. 덕분에 자기 자신의 존재 의의 에 대해 통찰하는 시간 또한 많아지 기 마련이다.
나는 어째서 용을 돕고 있는가.
어째서 기억을 잃어가며 영원히 살 아가고 있는가.
어떻게 기억을 잃는 거지? 용은 왜 만나게 되는 것이지?
용의 큐브는 대체 무엇인가?
다른 정령과 나의 차이점은 대체 뭐지?
그리고.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다.
애초에 파트라슈 또한 평범한 정령 일 뿐이었다. 단지,너무나도 오래 살아온 나머지 현명한 통찰력을 가 지게 되었고 또한 그에 준하는 능력 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단지 그 뿐이다.
애초에 드래곤을 수호하는 정령이 있을 리 없다.
그녀는 그저 탄생의 정령. 태어남 그 자체에 의미가 있을 뿐인 정령 중에서도 가장 존재감이 희박한 그 €--.
그렇지만 그리픈에 최초로 도달한 드래곤 칼라할의 유일한 동료였던 아주 특별한 정령.
“하하.”
골드 드래곤 하트에 저장되어있던 모든 기억이 파트라슈에게 돌아옴에 따라,내장되어있던 힘이 폭발적으 로 증가하였다. 파트라슈 아니,시리 온은 아주 능숙하고 익숙하게 ‘정령 마법’을 작동시켰다.
이곳에는 용언이 단 한 글자도 섞 여있지 않다. 만약 용언이 섞여있다 면 또 다른 인격의 레가로스가 눈치 첼 것이 뻔했기 때문.
‘칼라할,레가로스. 너는 내가 이곳 에 언젠가 도달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고작 정령 따위인 내가 중심 차원에 올 수 있다고 믿었어?’
정말 대책 없는 믿음이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살았다지만, 그녀는 고작해야 정령이다. 드래곤 과 비교조차가 불가능한 그런 정신 체일 뿐.
그럼에도 레가로스는 시리온을 믿
었다. 언젠가 반드시 중심 차원에 도달하여 단 둘이 나누었던 약속, 암호를 풀어줄 것이라고.
그리하여 자신의 육체와 영혼이 다 시 합쳐졌을 때,그것을 제물로 바 쳐 계획을 이행해줄 것이라고.
‘너는 너무 도박광이야.’
길르텐 펄 리쉬가 언젠가 반드시 자신의 영혼을 찾아 그리픈으로 데 려올 것이라 굳게 믿었던 레가로스.
그리하여 또 다른 드래곤이 이 세 상에 위험을 감지하여 찾아와 시리 온을 깨울 것이라 굳게 믿었던 레가
로스.
시리온이 언젠가 반드시 중심 차원 에 도달하여 자신의 심장을 만져줄 것이라 굳게 믿었던 레가로스.
그것은 아주 희박한 확률일 것이 다.
이 세상 그 어떤 도박보다도 리스 크가 큰 도박이었으나,레가로스는 아주 멋지게 도박을 성공해냈다.
‘넌 번번이 도박에서 지기만 했었 지.’
모든 것이 완벽했지만,도박 하나 만큼은 레가로스의 유일한 약점이라 는 말이 있을 정도로 레가로스는 도 박을 정말이지 너무 못했다.
그러나 그 말,이제는 철회해야한 다.
레가로스는 차원계 최고의 도박사 가 되었다.
드래곤 하트를 시작으로 공간 그 자체에 파동이 퍼져나갔다. 이것은 비록 시각으로는 볼 수 없지만 또 다른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파트라슈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는 온몸을 끌어안고 고통스러워하는 레가로스가 눈에 들어왔다.
기억 속 레가로스와 똑같은 모습임 에도 불구하고,또 다른 인격인 존
칼라할도 아니다.
레가로스도 아니다.
저것은 그저,그 둘을 집어 삼킨 악마일 뿐이다.
“끄으윽,끄으……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레가로 스의 육체가 서서히 녹아내린다. 그 는 잔뜩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파트 라슈를 노려보았다.
레가로스와 칼라할의 얼굴을 한 채 저런 눈으로 째려보니 조금은 마음 이 아플 줄 알았는데.
아니다.
전혀 감흥이 없다.
그저,그 둘의 얼굴을 한 채 이런 짓을 벌인 악마를 저지했다는 생각 에 상쾌하고 시원한 느낌만이 그녀 의 심장을 사로잡았다.
사아아…….
마침내 톱니바퀴가 모두 완성되었
고.
수많은 시대와 차원을 넘나들며 세 상을 구원했던 어떤 드래곤의 육체 와 영혼이 완전히 불타 사라졌다.
중심 차원에는 그저 그 드래곤을
상징했던 심장 하나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후우,죽는 줄 알았네.”
서천영은 잔뜩 지친 표정으로 절뚝 거리며 일어나 앞머리를 쓸어 넘겼 다.
둘은 서로 눈을 마주했다.
"좋아 보인다?"
"주인보다는 낫지. 난 언제나 쏘쏘 하거든.”
파트라슈의 음성이 더 이상 정신체 가 아닌 직접적인 음성으로 들려왔 다. 천영은 그에 의문을 가졌다.
“뭐야. 진화했냐? 네가 디지털 괴 물이라도 돼?”
천영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파 트라슈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이전 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전에는 그저 평범한 정령 같았다면, 지금은 정령 이라는 존재 자체를 초월한 무언 가…… 영혼과 육신에 영향을 받지 않는 또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글쎄.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지 나도 용이라도 되려는 걸까.”
“그거 재미있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천영과 파트라슈 사이에 연결되어있던 일종
의 계약 같은 것이 끊어졌다. 그 동 안 파트라슈는 천영에 의해 그 존재 가 유지되는 계약으로 묶여있었는데 이제는 그러한 계약이 모조리 사라 졌다.
그럼에도 파트라슈는 천영을 여전 히 주인이라고 불렀다.
“이름보다는 익숙하니까.”
“마음대로 하던지.”
머리카락에 묻은 물기를 툭툭 시원 스레 털어낸 천영은 고르게 숨을 내 뱉었다.
잠시간의 침묵.
이윽고 천영이 이를 드러내며 웃는
다.
“한 건 했네. 이 쓸모없는 정령아.” 파트라슈 역시 마주 웃어주었다. "뭘. 주인 어그로가 좋았지."
그 말에 천영이 긍정했다.
“맞아. 사실 내가 잘 했지.”
“뭐? 그냥 빈말이었거든. 참 나. 어이가 없네. 이거 나 아니었으면 우리 다 끝장난 거 몰라?”
“원래 탱커가 어그로 끌어준 거 딜 러가 쓸어 담아놓고 자기가 잘한 줄 아는 건 AOS게임 특징이야.”
“난 그런 거 안 해봤거든!”
의미 없는 말다툼을 티격태격하던 천영과 파트라슈는 이내 동시에 웃 음을 터뜨렸다.
“수고했다.”
“수고했어.”
덜컹!
그렇게.
일곱 개의 위대한 차원이 모두 연 결되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