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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일단은 해모수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기로 하였다.
"이보쇼, 영감."
-누가 영감이냐! 내가 한번 모습을 드러내면 만백성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 정도의 예의는 바라지 않지만, 존장에 대한 예우정돈 갖춰라!-
해모수는 현대인에게 고대 시절의 예의를 바랄 정도로 생각이 꽉 막힌 인물은 아니였으나, 상대방이 워낙 속을 긁고 긁고 긁다못해 찢어발기니 그와 대화를 할땐 자동적으로 큰 소리가 필수 옵션으로 달려나왔다.
"하여간 남자라는 것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 똑같구만. '내가 소싯적엔 말이지~' 하면서 한순간이나마 자랑스러웠던 추억만 되새김질 하는 모습을 보니까."
-시끄럽다! 네 놈과 더이상 대화를 나누다간 울화통이 먼저 터져버리겠다! 질문이 있으면 빨리 해!-
"뭐, 일단 운좋게 내가 댁을 구해주긴 했는데 말요.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쇼? 이대로 정치가들 손에 돌아가는건 댁도 싫을텐데?"
-크흠……. 원래 내 당초 계획은 이 나라를 대표하는 이능력자인 이 하린이라는 처자에게 이 검을 하사하고 떠날 예정이였다. 그런데 이 나라의 정치가 놈들은 내 힘을 이용할 궁리를 하기보단 팔아치우지 못해서 안달이더군. 녀석들은 나의 존재를 하린에게 은폐하고 미국이라는 나라에게 팔아치워버렸어.-
'이 하린?'
그가 알고 있는것은 세계의 유명한 조직들 뿐이기 때문에, 인물에 대한 정보는 거의 일자무식 수준이다.
하지만, 어찌됐든간에 1급 유물이 자신의 주인이라 정하기로 결정한 여성인 이상, 자신의 노예로 만들 가치가 있다고 여긴 진우는 자신의 예비 노예 컬렉션에 기록해두기로 결정하였다.
해모수가 알면 통곡을 하겠지만, 일단은 꼬장꼬장한 노인에게서 용광검을 얻어야 하는 그는 표정 관리와 함께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아직도 그 생각은 변함 없수?"
-없다. 저 노아라는 아이도 괜찮은 재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하린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는듯 하더구나.-
해모수는 이 하린에게 용광검을 주기로 이미 단단히 마음을 먹은듯 하다.
'이미 확고하게 마음을 먹었는걸? 여기서 이론적으로 무장해봤자 정론에 반격을 당해 오히려 내가 이 검의 주인으로 뽑혀야 한다는 정당성이 사라져. 여기선 감정에 호소하는거다.'
흔히들 사람들은 정론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세상 오래 산 사람들에겐 정론은 자신이 하는 행동의 명분을 얻을때나 사용하는거지, 언제나 정론대로 행동하는 인간은 바보거나 답답하기 짝이 없는 구시대적 인물이라고 비웃는다.
하지만, 감정에 대한 호소가 제대로 먹힌다면 아무리 냉정한 인물이라 해도 마음이 흔들리게 되고, 종국에는 아니라는것을 알면서도 감정에 설득당해 상대방의 부탁을 들어주는 일이 종종 있다.
진우는 해모수의 감정을 건들여, 자신이야말로 이 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임을 설득하려는 것이다.
"헤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어이, 노아. 이 하린이라는 녀석이 어디에 있는지좀 알려주지 않겠어?"
-음? 네 녀석이 이렇게 빨리 수긍하다니 오히려 불안해지는구나.-
"당연하지. 자신들의 후손을 포기한 과거의 노친내와 말싸움해봤자 나만 손해니까."
-뭐라?-
순간, 해모수의 목소리가 변하였다.
지금까지는 성격이 불같은 할아버지같은 목소리였으나, 분노를 절제한 힘있는 목소리로 변하면서 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감히 뭐라 했느냐? 내가 후손들을 포기해? 지금까지 네 놈의 헛소리를 어떻게 참아보려 했지만, 이번만큼은 절대 참지 못하겠구나. 당장 무릎을 꿇고 사과해라!-
검을 중심으로 살기가 퍼져나가며 상대방을 압박하는 압력이 진우의 어깨를 짓눌렀지만, 그는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 웃기고 있네! 댁이 이 하린에게 이 검을 준다는것 자체가 이 나라의 후손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뭣이? 그게 무슨 뜻이느냐?-
'오케이, 걸렸어!'
입질이 물리는 느낌이 들자, 그는 노련한 낚시꾼 답게 곧바로 낚시대를 당기지 않고 천천히 밀고 당기며 물고기의 힘을 빼기 시작했다.
"나는 이 하린이라는 여자는 잘 모르지만, 댁이 선택한 여자라면 분명히 성격이 나쁘지 않겠지?"
-당연하다. 그 아이는 여자냐, 남자냐 성별을 따지기 이전에 이 나라에서 가장 올곧고 굳은 마음과 불의를 용서치 않는 정의감을 가진 아이니까.-
"그러니까 안된다는 거야. 댁도 잠시나마 이 나라를 체험했으면 알거 아냐? 그 썩은 정치가들이 나라를 좀먹는 이상, 이 나라의 미래는 없다고."
-…무슨 뜻인지 도통 이해가 안되는군. 자세히 설명해보거라.-
해모수는 상대방의 뜻을 확인하고 화를 낼것인지 말것인지 결정한듯 하자, 진우는 계속해서 밀당을 하면서 해모수의 정론적 이론을 박살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만약, 당신의 신하중에서 저런 작자들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어?"
-당연히 참斬해야지! 아니! 단숨에 참하는것도 너무 관대하다! 육시를 분해해야 마땅할 종자들이로다!-
짧은 시간동안 부패한 정치가들에 대한 행동에 분노가 극에 달한 해모수는 격한 목소리로 분노하였고, 진우는 거기에 동의하였다.
"그치? 그런데 이 시대에서는 그게 안 돼. 왜냐고? 그들이 법이고 그들이 이 나라의 정치를 도맡는 자들이거든? 그들중 하나라도 죽이려고 하면 국가 전체가 그를 범죄자로 몰아서 경찰이나 군대에게 죽어야 하는게 현실이고, 아무리 나라를 말아먹어도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법으로도 절대 사형은 안돼."
-크으…나라를 좀먹는 놈들을 죽이는게 오히려 죄라니…세상의 법도가 말세로 치닫고 있구나.-
"거기서 이 하린이 당신의 선택을 받아 용광검을 가졌다고 치자고. 그런데 그녀가 과연 이 검으로 무엇을 할까? 당신을 팔아먹은 정치가들을 단칼에 베어죽일까? 아니, 그녀도 결국 이 시대의 인간이야. 정치가들을 죽이기 보단 그들과 대항하는 것으로 끝나겠지."
-…….-
해모수는 잠잠하게 경청하였고, 진우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뿐이지 분위기는 자신쪽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아아, 댁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그럼 너는 이 시대의 인간이 아니냐고 생각하시겠지. 나는 이 나라에서 태어나 이 나라에서 28년동안 살아왔지만, 보다시피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피를 보는것 정돈 아무래도 상관없는 범죄자의 몸이야. 하지만, 그런 나라 해도 한국이라는 나라를 싫어하는건 아냐.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외국에서 기를 피고 잘 살았으면 하는 소망도 분명히 있어."
그리고선 헛기침을 하며 목을 잠시 쉰 그는 침을 몇번 삼켰다.
"나는 이 하린과 달라. 그녀는 자신의 올곧은 마음때문에 정치가들을 죽이기보단 대립하길 선택할테고, 결국엔 영원한 평행선밖에 되지 않아. 하지만, 나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뛰어나가 당신을 팔아먹은 작자들을 족칠 수 있지."
-…….-
"그리고 분명한걸 미리 말해두자면, 한반도에서 태어난 모든 국가들은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는 위기 상황에서 언제나 백성들, 시민들이 스스로 위기를 극복해 나갔지. 높은 인간들은 자신들의 재산만 챙기고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을때 말이야."
"…….-
마지막 말은 이 하린도 결국 이 나라의 높은 인물이니, 목숨이 오가는 위험한 상황에는 꺼려할 것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이였다.
해모수는 진우의 말을 들을때마다 자신의 마음이 혼란스러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론적인것도 아니고, 정론도 아니지만, 그의 말은 하나같이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을 팔아먹은 정치가들을 단숨에 죽일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분노로 폭발하려는 감정에 도화선이 붙은것이다.
해모수는 비록 2천년이나 더 된 고대의 인간이긴 하지만 무식한건 아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인생을 보냈기에, 지식 수준은 낮을지 몰라도 생각의 깊이까진 낮지 않았다.
만약, 해모수가 진우와 평범한 우연으로 만나게 된 사이라면 단칼에 허튼소리를 한다고 호통을 쳤겠지만, 정치가들의 비열한 짓거리에 상처입은 그는 정치가들에 의해 국민들의 삶이 계속해서 피폐해질거라고 생각하니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이 나라의 미래도 없다는 결론을 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눈 앞의 이 남자다.
그냥 성격좀 안좋은 청년이였다면 이쯤에서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그들을 징치하라고 검을 내줬을 것이다.
문제는 진우가 '성격좀 안좋은 청년' 이라는 범주 밖으로 100만광년은 벗어난 개새끼라는 것이 해모수의 선택에 제동을 걸어왔다.
그렇게 속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해모수는 긴장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보고 있던 노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노아, 너는 이 남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갑자기 자신에게 화살이 돌려지자 깜짝 놀란 노아는 무의식적으로 진우를 향해 눈을 돌렸다.
"흐음~ 하긴, 이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하지. 여기선 내가 나갈 차례 맞지?"
눈치가 빠른 진우는 해모수가 뭐라 말하기 전에 맥주캔을 하나 들고 아지트 밖으로 나갔고, 해모수는 다시 한번 노아에게 진우라는 인간에 대해 물어보았다.
-걱정말거라. 이 검은 너희들이 말하는 1급 유물이니라. 내가 모든 의지를 사용한다면, 저 싸가지 없는 아해가 네게 해코지를 하기 전에 죽일 수 있으니 솔직히 말하거라.-
해모수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은 힘을 비축하기 위해 가만히 있지만, 모든 힘을 쏟아부으면 진우의 목을 베어내는것은 일도 아니다.
"……."
노아는 그의 자상한 목소리에 긴장된 어깨가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과연 한 나라의 왕이였던 사람답게 상대방을 위로하는 어조를 본능적으로 터득한 듯 싶다.
"그 사람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진우가 어떤 사람인가를 말하기 위해 기억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첫 만남은 최악.
자신을 탐하기 위해 강간을 하였고, 여자의 인권을 깔아뭉개는 짓을 아무런 망설임없이 행동으로 옮겨보이는 최악의 강간마.
하지만, 어느새부터인지 그의 품안에 안기는게 자연스러워졌고, 그의 난폭한 행동 또한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조금 성격이 꼬여있는 애인같은 기분을 받게 되었다.
"그 사람은…분명히 해모수님이 생각하시는 나쁜 사람인것은 맞아요. 하지만…계속 같이 있다보니 왠지 안심도 되고…나름 자상하게 대해주려고 하고 있고…처음엔 너무 싫었지만 같이 있다보니까 정같은게 들기도 하고……."
노아는 약간 횡설수설해 하며 생각나는대로 입을 열었다.
참고로 그녀의 현재 호감도는 82. 만약, 그녀의 호감도가 70대 중반대였다면 해모수에게 자신이 당했던 일을 모두 설명하였을 것이고, 해모수는 더이상 대화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모든 힘을 사용하여 용광검을 진우의 목을 꿰뚫으려 했을 것이다.
90이였다면 지금처럼 횡설수설해하지 않고 좋은 사람이라고 대답하였겠지만, 지금처럼 횡설수설 하는것이 오히려 해모수의 마음에 결론을 내리게끔 하였다.
'보아하니 성격은 지랄같지만 자기 여자에겐 매몰차게 대하는 놈은 아닌가 보군. 게다가 그 놈의 말도 맞는 부분이 있다. 갑자기 정치를 하던 놈들이 죽으면 나라가 혼란스러워지겠지만,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어느정도의 출혈은 감수해야 하는법. 하지만, 그 놈이 이 힘으로 온갖 패악을 지르면 막을 상대가 없을터인데…….'
해모수의 유일한 걱정은 바로 그것이였다.
진우에게 검을 양도하여 약속대로 이행한다손 쳐도, 오늘 자신을 지키려는 경찰 특공대를 상대로 보인 무력은 가공하였기 때문에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겪인지라 해모수가 가진 일말의 불안감이 그의 결정에 브레이크를 걸고 있었다.
이윽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는 노아를 향해 무거운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을 들라 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