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 브레이커-39화 (39/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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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코벤에게 죽어서까지 잊지못할 추억을 선사하기 위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던 진우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그의 발 앞에 날카로운 송곳같은 투척물이 박혀들어갔고, 예상외의 방해를 받은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을 방해한 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 썅, 나올라면 한꺼번에 나오라고! 아니면 하나하나씩 스너프 필름 쇼에 동참하고싶다는 의사 표명이냐!?"

"죄송하지만 여기까지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의 투덜거림에 아랑곳없이, 음성에 고저차가 없는 냉정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조금 꺼림칙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뒷목을 긁적였다.

"쓰으, 목소리를 들어보니 꽤나 예쁠것 같은데 안타깝구만. 그런 미녀를 내 손으로 해체해야 한다니 말이야."

"그쪽을 아가씨의 취미 생황에 끼어들도록 만든건 죄송하다 여기고 있습니다. 충분한 보상도 해드릴테니 이 쯤에서 그만두는게 어떤지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겨우 이런 유희때문에 죽기엔 아까운 인재들입니다."

"이 몸에게 시비를 건놈의 생사는 니가 아니라 내가 정해. 그리고 남을 설득시키려면 최소한 얼굴은 맞대야지? 페이스 투 페이스. 몰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리는 상대를 향해 얼굴을 드러내라는 요구를 하였고, 그 대답은 즉각 이루어졌다.

파치치치--

스파크가 퍼지는 소리와 함께 진우의 눈 앞의 공간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더니, 푸른색으로 반짝이는 광학 장비가 반짝이는 하얀색 슈츠를 입은 여성이 나타났다.

얼굴 전체를 가리는 해골같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슈츠 너머로 보이는 실전으로 단련된 적당한 근육과 몸매로 미녀임을 유추할 수 있는 그는 자신의 예상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톡톡 건드렸으나,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죄송합니다만, 기밀 보안을 위해서 제 얼굴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흐응~ 얼굴을 감춘 슈퍼 히어로같은 존재인건가? 뭐, 그런 상대방의 아이덴티티 정돈 존중해주지."

드디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됐다고 여긴 진우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코벤을 향해 다가갔다.

"무릎꿇고 엎드려. 지금 당장 죽기 싫으면."

"예…예!"

코벤은 그의 명령에 자존심도 버리고 무릎을 꿇은채 절을 하듯 엎드렸고, 진우는 자연스래 그의 등을 의자로 사용하였다.

'뭐지? 이 남자는 누군가를 지배하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마치…'그 분' 을 보는것만 같아…….'

자신도 모르게 진우의 모습에서 리피의 아버지의 모습을 투영시킨 여성은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이 생각한 불경을 자책하였다.

'아니, 그 분은 능력을 따지기 이전에 제왕으로서의 기품과 카리스마를 가진 분이시다. 저런 젊은 동양인 따위에게 그 분의 잔재를 느낄 수 있을리가 없어.'

"자, 이제 말해봐. 내가 왜 이 놈을 죽이지 않아야 하지? 너희들의 목표는 힘없는 약자들을 괴롭히면서 고통스러워하는걸 즐기는거잖아?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 이건가? 지금 내 앞에서 '왜 다들 불륜하세요? 저처럼 로맨스 하세요' 라는 식의 설득을 할 생각은 아니겠지?"

리피의 목적은 힘없는 이들이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즐겨보는 것이다. 진우는 그 부분을 꼬집으면서 단지 대상만 바뀌었을뿐, 본질은 같다고 역설한 것이다.

"그 전에 자기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페리샤. 페리샤 릭토엔드라고 합니다."

스스로를 페리샤라고 소개한 해골 가면의 여성은 일단 상대방의 정체부터 알아내고자 자기 소개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확실히 이름도 모르고 너라고만 말하자니 좀 그렇더군. 내 이름은 E급 용병, 손 진우다."

그의 자기 소개에 기회를 잡은 페리샤는 일부러 그의 자존심을 살짝 건드는 발언을 하였다.

"…죄송하지만 자신의 진실된 소속을 말씀해주시지 않으니 조금 실망스럽군요. 지금 당신이 깔고앉아있는 코벤은 8등급 신체 강화자입니다. 그런 이를 한 손으로 제압할 수 있는 능력자가 E급 용병이라니요?"

"그게 불만이면 타임머신 개발해서 내가 용병 등록할때 대신 500만원 내주지 그러냐?"

"예?"

"돈 없어서 E급 용병부터 시작했다고. 나보고 지금 거지새끼라고 빙빙 꼬아서 비웃은거냐 지금? 앙?"

진우는 으르릉 거리듯이 살기를 세우기 시작하였고, 설마 저런 능력자가 단돈 500만원이 없어서 E급 용병부터 시작하리라곤 상상도 못한 페리샤는 당황해하며 사과 하였다.

"죄…죄송합니다. 당신만한 능력자가 겨우 500만원이 없다는게 믿기지가 않아서……."

"사람마다 다 사정이 있는 법이지. 나 마음 은근히 여리다. 상처입을만한 발언은 좀 삼가해줘."

사람의 아가리를 찢어버린 주제에 마음이 여리다는 말에 발끈할뻔 하였으나, 페리샤는 리피의 경호원임과 동시에, 그녀가 여기저기서 만드는 사고를 정리하기 위해 '조적' 의 수장인 그녀의 아버지가 고르고 고른 협상가이기도 하다.

"큼큼, 그 부분은 제가 미쳐 사려하지 못한 부분이군요. 사과하겠습니다."

"오케이. 이제 자기 소개는 끝났지? 그럼 이제 나를 설득해보라고."

탁탁-

그리고선 코벤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탁탁 내리친 진우는 그의 생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대화를 시작하였다.

"그만한 힘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용병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자유로움을 즐기고 계신다는 뜻이겠지요?"

"오오, 이건 좀 예상왼데? 만약에 '우리 조직에 들어오세염, 부와 권력을 모두 다 드릴께염.' 이라는 말을 지껄이면 이 새끼 머리통을 박살내고 니 년 가랑이를 찢어버렸을텐데."

많이 다른 의미로 찢어버린다는 뜻이였지만, 잔인하게 분리시켜버리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은 페리샤는 그가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용병 생활을 하고 있다는것을 분석하길 잘 했다는 듯이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남자는 경박해보이지만 자신의 힘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알고 있고, 그 가치 또한 이해하고 있어. 하지만 사람의 목숨을 파리 수준으로 여기고 있는게 문제야. 발언을 할때 최대한 조심해야 겠어.'

"저희쪽에서 만든 불상사로 인해 얻으신 물리적, 정신적 피해 보상금을 드리겠습니다. 이쯤에서 서로 한발 물러서는게 보기에도 좋지 않을까요?"

"보기야 좋지. 나도 상대방이 물러서면 '아싸 저 새끼가 지금 나한테 후달리는구나!' 라고 거품물고 덤비는 키보드 워리어가 아니거든. 그런데 말이지, 그건 기본중 기본이잖아? 설마 그걸로 퉁치자는거야?"

"…그 부분은 추후 협정이 가능합니다."

"얘기가 통해서 좋군."

한명 한명이 자신과 비등한 우트가르드 예블라를 2명이나 동시에 상대하여 간단히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데다, 상대방을 잔인하게 찢어죽이는 상대가 리피를 목표로 두고 미친개마냥 쫒아온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하지만, 페리샤에게도 한계가 있는 법이기에 자신이 들어주기 어려운 조건을 내건다면 '조직' 에 전투 요원 파견을 요청할 예정이였다.

"내 조건은 간단해. 그쪽에선 나에 대해 전부 알고 있는데, 나는 그쪽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 세상에 이만큼 불공평한게 어딨어? 기밀이라던가 중요 정보를 원하는게 아냐. 너희들의 조직명을 알고 싶어. 만약에 꽤나 큰 조직이라면 '거래' 를 하고 싶고 말이야."

생각보다 정상적인 조건에 페리샤는 가면 너머의 눈동자가 커졌고, 진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너희들의 조직명을 듣고 까발릴 생각은 없어. 왜냐하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건 '거래' 를 할 수 있는 루트거든. 한국에서는 돈이 많아도 전투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한다던가 재료를 공수하기가 워낙 빡세잖아."

진우는 비록, 자신에 의해 코벤과 막스가 쓰러졌지만, 그들의 능력이 누군가를 호위하는 경호원치곤 상당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슈츠 제작에 필요한 금속이라던가 에너지원같은 재료를 구할 수 있는 루트를 개척하거나, 소개라도 받는다면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고민하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리라.

"그걸로 끝입니까?"

"그래. 돈이라던가 권력, 명예 모두 다 필요 없어. 나는 단지 내가 원하는대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야. 취향은 그쪽 아가씨랑 똑같지만 말이지. 지금쯤 그 아가씨의 자신만만한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겠지? 그 표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쾌락이 느껴져. 크흐흐흐……."

마지막으로 음산하게 웃어보인 진우의 모습에서 리피보다 더 한단계 높은 S 성향의 인물을 직감한 페리샤는 이쪽이 자존심을 세우면 세울수록, 더더욱 즐거워하며 자존심을 뭉개뜨리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인물임을 확인하였다.

'후우…아가씨께선 운이 나빴군. 아니, 운이 없는 코벤과 막스인가……. 자신의 적수가 없으리라 생각했던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만약, 그녀가 자존심을 세우고 조직의 힘을 동원하였다면 조직의 힘이 문자 그대로 토막나는 불상사가 일어났겠지만, 협상가 답게 더이상 쓸대없는 대화로 그의 성질을 건드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속한 조직의 이름은 '아크로스' 입니다."

"아크로스? 유럽의 절반을 차지했다던 그 조직?"

"예."

진우는 미국으로부터 용광검을 빼앗기 위해 한국 정부를 습격하도록 헬 프리즈너를 동원한 이들이 이토록 가까이 있으리라곤 예상치 못하여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녀석들이 여기에 뭐 얻어먹을게 있다고…아니, 기밀이나 중요 정보는 원하지 않는다고 내 입으로 스스로 얘기했었지. 궁금하긴 하지만 약속은 약속."

자신을 충분히 협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스스로가 내건 약속을 지키는 그의 모습에 어느정도 신뢰감을 느낀 페리샤는 그가 원하던 '거래 루트' 를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피해 보상금과 당신이 사용하실 거래 루트 개설은 지금 당장 뚝딱 만들어지는게 아닌지라 다음날에 다시 한번 찾아와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좋아. 그 정도는 이해해주지. 나도 지금 당장 그게 된다고 말했으면 신뢰하지 못해서 가랑이를 찢어버렸을거야. 죽을뻔한 기회를 잘도 빠져나가는구만."

그렇게 코벤의 등에서 몸을 일으킨 진우는 그의 머리를 짓밟으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윽……!"

"운 좋은줄 알아. 페리샤의 제안이 마음에 안들었다면 가장 먼저 네 놈 뒤통수에 구멍이 생겼을테니까."

코벤에게서 떨어진 그는 페리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나중에 그 가면 너머의 얼굴이 보고 싶구만. 첫만남은 그다지 좋은 인연이 아니였지만, 인연이라는 건 언제나 '절대' 라는것이 없거든. 혹시 알아? 나중에 한 침대에 같이 잘 수 있는 사이가 될지?"

"아쉽게도 그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것 같군요. 의뢰를 성공하였다고 3시간 후에 연락해두겠습니다."

"카하하하하핫! 인연에는 '절대' 라는게 없다니까! 그럼 내일 이 시간에 올테니까 준비해두라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발견한 감시 카메라를 향해 가운대 손가락을 올려준 진우는 숲 밖으로 나갔고,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페리샤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쥔 주먹을 펴올리고 장갑을 벗자, 땀이 장갑에서 주르륵 흘러나오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내가 이토록 긴장했단건가? 진우…어떻게 이런 작은 나라에서 저런 인물이 태어날 수 있는거지……?'

세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강자들과 싸웠음에도 이렇게까지 긴장했었던 기억이 없는 페리샤는 그와 적이 된다면 반드시 죽일 순 있지만, 아크로스의 저력을 상당부분 소모해야 한다는 직감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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