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90)

어희는 언젠가 자신에게도 이런 순간이 찾아오리라 믿었다. 다만 이렇게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될 줄은 몰랐다.

달콤한 디저트 카페에, 솜사탕처럼 기분 좋은 감정. 도웅의 성별이 남자라는 건 이미 어희에게 티끌만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해봤습니다. 그래서 찾아왔어요.”

“일부러 오신 거예요?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아 혹시 거절…… 일까요?”

조심스럽게 거절을 입에 담는 도웅의 눈꺼풀이 작게 떨렸다. 그의 얼굴은 실망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어희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음. 아니요. 저도 좋습니다.”

그리고 손에 든 박스를 열었다. 왠지 가슴이 마구 뛰는 게 영 불안하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야 연약하게 후들거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아는 게 많이 없잖습니까. 게다가 저는 처… 음이기도 해서 많이 답답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진심으로 잘, 해드릴게요.”

상처받지 않게 아껴주고 소중히 할 자신 있다. 배달 중에 상품이 흔들려도 디저트가 뭉개지지 않게 사장이 꼼꼼하게 끼워 넣는 설탕 유산지처럼.

“아, 네……. 감사… 합니다?”

도웅은 대답과 동시에 의아함을 느꼈다.

만약 어희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도웅을 똑바로 봤더라면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눈치챘을 터다.

하지만 그저 도웅이 저만큼 벅차서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여긴 어희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저라도 떨면 안 된다는 이상한 책임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는 게 영 서툴러서, 불안하긴 해도 사장님이라면 저도 좋습니다. 너무 늦게 답을 드려서 미안합니다. 그래도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데, 신중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잘 부탁해요.”

“아. 네에…. 신중하긴 해야……, 네?!”

어희의 말을 따라하며 수긍하던 도웅의 어깨가 눈에 띄게 화들짝 움찔거렸다.

“아니, 아니! 잠시만요. 우리 지금 뭔가 이상해요!”

두 손을 마구 휘저으며 인상을 찌푸린 도웅의 외침에 어희는 미니어처를 꺼내던 손을 멈췄다. 

이상해?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이상한 건 기뻐하지 않는 사장이다.

“그렇지 않아요? 리뷰를 달아주는데 왜 서로에 대해 모른다느니, 저라면 좋다느니…… 그런 말이 왜 필요해요?”

놀란 도웅의 목소리 톤이 훌쩍 위로 올라갔다. 

어희는 두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리뷰라니?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에 옆으로 슬쩍 기울어지려 하는 머리통을 바로 했다.

“리뷰……, 말입니까?”

“네. 리뷰요! 제가 원하는 건 리뷰였는데 제대로 이해하신 거 맞죠?”

둥그런 눈이 더 커졌다. 당황으로 발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도웅을 보고 어희도 얼굴을 붉혔다. 도웅의 감정은 이제 억울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떤 리뷰를 말씀하시는 건지.”

“말 그대로 리뷰요. 요거요 리뷰.”

“아….”

이 모든 게 자신의 뻘짓이었고 오해라는 걸 알아채고도 창피함보다는 실망감이 앞섰다. 만약 다섯 살만 어렸다면 눈물이 살짝 맺혔을지도 몰랐다.

“사장님이……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습니다.”

분명 사장이 제게 보인 감정은 그런 감정이었다. 묘한 설렘과 기대. 그리고 퍼즐을 맞추듯 완벽한 상황까지.

“제가요? 제가요? 물론 손님으로서는 정말 좋아하죠! 그런데 우린 남잔데요! 아니. 이 말은 너무 편협한 말이니까 잊어주세요. 어쨌든! 하, 이거 참…….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러나 아니었다.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한껏 부풀었던 마음이 실망으로 푹 꺼졌다. 도웅은 어희를 연애 대상으로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처음부터 리뷰나 써줄 손님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난처해하고 있는 거였다.

어희는 자신의 착각 때문에 도웅이 곤란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조금은 곤란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이 상황이 아닌 다른 상황에서 고백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상상도 했다.

“…….”

역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말라고 입을 열려는 찰나, 실수로 미니어처가 든 상자를 떨어트렸다. 상자에 걸쳐진 뚜껑이 열려 미니어처가 와르르 쏟아졌다. 동시에 어희 억장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엇. 안 다치셨어요?”

바닥에 떨어진 상자를 주워 올린 도웅이 몸을 숙여 엄지손톱만 한 찻잔과 작은 테이블들을 줍기 시작했다. 어희 역시 쪼그리고 앉아 커다란 디저트 가게를 상자에 조심히 넣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거치고는 부서지거나 찌그러진 곳 없이 굉장히 멀쩡했다.

토끼끼 시리즈가 미니어처 계에서 괜히 네임밸류가 높은 게 아니었다. 바닥에 떨어진 자질구레한 모형도 고정하지 않은 것들뿐이고 부서진 건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무척이나 튼튼한 미니어처와 달리 어희의 마음은 말랑말랑했기에 당장 단 게 먹고 싶었다.

“……어떻게, 안되는 거겠죠.”

머리를 맞대고 작은 소품을 주우며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떻게 해도 안 되나 보다.

눈에 보이는 작은 소품을 대강 줍고 어색하게 일어난 둘의 사이에 적막이 감돌았다. 어희는 상자에 미니어처와 소품을 모두 넣은 뒤 상자 뚜껑을 닫고 가볍게 두들겼다.

“…….”

“…….”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하지?

한 번도 이런 상황에 놓인 적이 없어 어색했다. 어희는 눈앞의 남자가 어떤 감정인지 보고 싶은 동시에 늘 봐왔던 감정하고 완전히 다른 모습일까 봐 두려워, 쉽게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깐 어희와 어쩔 줄 몰라 하는 도웅. 둘은 미니어처가 든 상자를 가운데 두고서 서로 입을 다물었다. 이내 아랫입술을 깨문 어희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먼저 말을 꺼냈다.

“음……. 이건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지금 디저트를 살 수 있을까요? 아무거나 괜찮은데.”

어희의 말에 멋쩍게 서 있던 도웅이 안으로 들어가 쇼케이스를 열었다.

“마침 로맨스 파티 있는데 드릴까요? 연습 삼아서 많이 만들고 있거든요.”

연습……. 아직 팔지도 않는 메뉴를 많이 만들고 있다고 했으니 분명 하나만 있지 않을 거다. 

어희는 계산대 앞에 섰다.

“있는 거 다 주세요.”

“다…… 요?”

“단 게 급해서…….”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제일 급했다.

커다란 종이가방 안에 미니 케익이 담긴 크로플 상자가 차곡차곡 들어가는 걸 보고 어희는 안심하며 카드를 내밀었다.

“아. 저도 선물…… 할게요.”

픽업대에 종이가방을 올려둔 사장이 손끝으로 슥, 밀었다.

어희는 정신없이 종이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디저트에 마법을 부리는 잘생긴 사장이 저를 좋아할 리는 당연히 없는데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기 전에 어희는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작은 불만을 터트렸다. 주변 카페를 모조리 사장이 잡아먹은 탓인지 세 블록을 걸어도 카페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아파트에 거의 다다라서 보이는 카페에서 투 샷 아메리카노 세 잔을 테이크아웃 했다.

집으로 돌아온 어희는 겉옷을 벗어 두고 종이가방에서 미니 케이크를 꺼내 유산지 채로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안 가득 달콤한 크림과 푹신한 시트가 기분 좋게 어우러졌다. 항상 극찬하며 음미하는 케익이었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맛보다 케익에 흠뻑 덧씌워진 사장의 감정을 느꼈다.

어희는 케익이 포장된 종이가방을 바라보며 다행이라고 여겼다. 실연을 당하긴 했지만, 이렇게라도 마음을 달랠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싶다. 아직 손님과 사장의 관계가 깨어지지 않았으니 카페는 앞으로도 이용할 수 있었다.

뱃속을 조금씩 채우는 당분에 힘입어 꾸역꾸역 ‘그나마’ 나은 점을 찾아봤다. 아직 도웅과의 관계가 완전히 어그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앉은 자리에서 미니 케익 세 개를 해치운 어희는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지 않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아직도 많이 남은 크로플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처음 도웅을 만났을 때가 새록새록 떠올라, 눈을 내리깔았다.

“하….”

입술 선이 벌어지고 야트막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중간에 오해가 고백을 부추긴 건 맞지만, 어쩌면 처음부터 좋았을지도 몰랐다. 잔돈을 거슬러주기 위해 빗속을 뚫고 달려오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때는 비에 젖어서 몰랐는데, 머리카락이 복슬복슬한 게 만지면….

문득 실소가 터졌다.

세상에 어떤 바보 같은 사람이 고작 리뷰 한 줄 받겠다고 직접 배달을 온단 말인가. 심지어 기대감까지 한껏 부풀어서. 도웅의 엉뚱함이 귀여우면서도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첫 고백, 첫 실연.

처음이라는 꼬리표가 달리면 무엇이든 특별하게 여겨지기 마련이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처음을 손꼽아 보던 어희는 부질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여태껏 자각도 못 하고 있었던 주제에 오해하고 고백까지 간 이 상황이 웃기면서도 서글펐다. 어희는 이 마음을 접을지, 말지 망설이며 씁쓸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으음.”

무난한 커피 맛이다. 마감 끝난 카페에서 커피까지 달라고 하는 건 역시 민폐였겠지.

어희는 먹다 만 로맨스 파티를 들어 입으로 옮겼다.

이거라도 건진 게 어딘가 싶다. 어희는 눈앞의 디저트에 만족하기로 했다.

“특별은 무슨.”

특별하게 여겨지는 건 상황이 긍정적으로 흘러갔을 때나 통용되는 말이다. 어희가 기억하고 몸소 느껴본 바에 따르면 늘 처음은 어려웠고 좋지 못했다. 오늘도 같다.

“그래도 고백은 용기 있는 행동이었지.”

스스로를 다독이는 혼잣말을 한 어희는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한 번 더 읊조렸다.

“용기 있는 행동이었어. 그렇고말고.”

어희의 다독임에는 도웅의 디저트가 함께였다.

“…….”

상호명도 기억나지 않는 집 근처 카페의 커피는 자연스럽게 배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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