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이 져, 몸을 움찔하자 남자는 두 걸음 물러났다. 마주 앉아 길쭉한 팔을 뻗어 종이가방을 본인 쪽으로 당긴 남자는 남은 쿠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하트 모양 쿠키를 꺼냈다.
“이거네요. 굳이 먹어 볼 필요도 없이.”
맞췄다. 아니, 맞췄나?
판매하는 쿠키랑 별로 다를 게 없었다. 하물며 크기와 모양, 겉에 튀어나온 크림치즈까지 비슷했다.
“그 쿠키는 주문, 안 하셨나 봐요.”
3201호는 반박하는 것처럼 안에서 같은 쿠키를 꺼내 보여줬다.
“주문했는데, 이게 맞습니다. 여기요.”
겉보기에는 몰랐는데 막상 손에 들어보니 알 수 있었다. 정말로 내가 만든 쿠키가 아니다.
와, 신기해…….
“그럼…… 회수도 하셨으니 볼 일 없으시죠?”
“아, 네, 네. 이런 일로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
직원이 만든 쿠키를 들고 3201호를 나온 도웅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몇 번이나 3201호 현관을 쳐다봤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 * *
“다녀올게요!”
준영이가 3201호 종이가방을 챙기는 걸 보고 도웅도 머핀 두 개를 챙겨 가게를 나왔다.
오토바이 시동을 뒤로하고 먼저 전동 킥보드를 타고 로얄 골드 펠리스로 향했다. 당연히 킥보드로 오토바이 속도를 따라잡을 순 없었고 준영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도웅은 뒤늦게 도착해 호출을 한 번 더 눌렀다.
-띵동.
“……이게 사장님이 만든 거요.”
-띵동.
“음. 먹어봐도 되나요?”
“네!”
“둘 다 사장님이 만들었네요.”
-띵동.
“사장님이 만든 건 없어요.”
와, 진짜 신기해. 어떻게 이렇게 딱딱 맞추지? 이게 바로 뿌리 깊은 단골의 위엄이라는 건가? 아니면 사랑의 힘인가?
도웅이 감탄하고 있을 때 3201호가 들어가지 않고 팔짱을 낀 채 현관에 기대어 섰다.
“그런데 진짜, 왜 오시는 겁니까?”
“네?”
“정말로 내가 맞추나, 못 맞추나 신기해서 오는 건가.”
“아.”
걱정돼서 찾아온 거였는데, 족집게처럼 제가 만든 쿠키를 골라내는 게 너무 신기해서 잊고 있었다.
“괜찮으시면, 주문 양 좀 적게 조절해주실 수 있나요? 케이크며 쿠키며, 손님이 다 쓸어가 버리셔서 조금, 곤란하거든요.”
곤란은 얼어 죽을. 3201호가 당뇨에 걸리지 않을까, 건강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을까 매일 매일 걱정스러웠다.
“아. 다른 손님 생각을 못 했네요. 알겠습니다.”
적당히 수긍한 3201호가 현관문을 닫았다. 도웅은 닫힌 문 앞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곧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내려가는 내내 벽에 머리를 콩, 콩 박았다.
기껏 생각해낸 변명이 고작 ‘판매할 게 없어서 곤란하다’라니. 이 상황이 무척이나 곤란했다.
도웅은 자신의 순발력이 좋지는 않아도 나쁘지도 않다는 평가를 하곤 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며 정정하기로 했다. 자신은 순발력이 좋지 못하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카페로 돌아가자 쿠키 빌런이 손을 흔들어 반겼고 도웅은 그가 보는 앞에서 쿠키를 와그작, 와그작 씹어 먹었다.
다음 날. 3201호는 도웅의 부탁 아닌 부탁을 정말로 들어주었다. 예전의 주문으로 돌아간 것! 솔직하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한시름 걱정을 덜었다.
거기다 월세 한 번 밀리지 않고 착실하게 납부한 상으로 건물주님이자 집주인님께서 호박 고구마 한 박스를 선물로 내려주었다. 오븐으로 군고구마를 만들어 구석 테이블에 숨은 도웅은 뜨거움을 견디며 껍질을 벗겼다. 한 입 베어 물려는 찰나. 직원 영호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
“…….”
오른쪽 눈썹을 찡그린 걸로 보아 이제 곧 폭풍 같은 잔소리가 쏟아질 게 틀림없다. 도웅은 황급히 손짓했다.
“진짜 먹는 거로 치사하게 이러지 맙시다. 예?”
주변을 둘러본 영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혼자 숨어서 군고구마를 먹는 게 불만인 듯했다.
“너도 먹어. 너는 저어기 앉아서 몰래 먹어.”
“후……. 두 개 주세요.”
세 개를 구웠는데 그중에 두 개를 달란다. 칼만 안 들었지 이거 순 날강도다.
“하나만 먹어.”
“으, 뜨뜨. 김치는 없어요?”
“저기 앉아서 먹으라니까 왜 여기 앉아.”“혼자 먹다 걸리는 거보다는 둘이서 걸리는 게 덜 민망하잖아요. 김치 없어요?”
“카페에서 무슨 김치를 찾아? 냉장고 안쪽에 보면 편의점 김치 있을 거야. 몰래 가져와.”
“오키요. 기둘 기둘.”
자신 있게 자리에서 일어난 영호는 누가 봐도 수상하고 어색한 몸짓으로 슬금슬금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 광경을 몰래 지켜본 도웅은 말없이 고구마를 한 입 베어 물며 생각했다.
쟤도 참 이상한 놈이야.
“여기요.”
주머니에서 김치를, 소맷자락에서 나무젓가락을 챙겨 온 영호가 맞은 편에서 군고구마 껍질을 깠다. 그렇게 서로 군말 없이 고구마를 야금야금 먹고 있을 때였다.
“야, 냄새 개 독하지 않냐.”
잡일 알바생의 목소리에 도웅과 영호는 군고구마를 조용히 내려놨다. 일시 정지 상태로 딱딱하게 굳은 둘은 소리 없이 김치와 군고구마를 옆으로 밀기 시작했다.
“향수를 얼마나 뿌려댄 거야. 저 손님만 왔다 하면 향수 냄새 쩐다니까. 뭐 일하면서 궁금한 건 없고? 이 형한테 다 물어봐.”
“딱히 없……, 아~! 혹시 우리 사장님 만나시는 분 있어요?”
“사장님? 그건 왜 물어?”
“안 쉬시고 매일 가게에만 계시니까, 궁금해서요.”
“없을…… 걸? 있나? 나도 잘 모르겠다.”
잡일 알바생과 새로 온 라이더 준영의 목소리였다.
고구마 냄새인 줄 알았네……. 도웅은 밀어둔 고구마를 다시 집었다. 김치까지 얹어가며 야무지게 먹고 있는데 둘의 대화는 끊길 줄 몰랐다.
“그런데 너 우리 사장님 취향 특이한 건 알고 있냐?”
“네? 특이해요?”
“엉. 뚱뚱한 사람이 좋은가 보더라고.”
계속되는 뒷말에 영호가 일어나려는 걸 말리고 묵묵히 군고구마를 먹었다.
“으음…….”
“너 맨날 가는, 그 어디야 로얄 골드 거기도 사장님이 되게 알뜰살뜰 챙겨줬거든.”
“근데요?”
“야 상식적으로 아무리 단골이라도 어느 사장이 그렇게 챙겨주겠냐? 다 사심이지, 사심이야. 3201호 엄청 뚱뚱하지 않던? 그렇게 먹어대는데.”
“남자던……, 아니 형. 이거 선 넘는 대화 같은데 저 그만 말할래요.”
“뭐? 무슨 선을 넘었다고 그래? 과민한 새끼.”
점차 목소리 크기가 커지는 와중에 커다란 군고구마 하나를 해치운 도웅은 껍질을 주섬주섬 티슈에 모았다.
“어쩌시게요.”
언뜻 봐도 화를 참는 기색이 역력한 영호에게 남은 군고구마 하나를 넘겨줬다.
“많이 먹어, 우리 듬직한 직원.”
“징그럽게 갑자기 왜 이러세요? 주니까 먹긴 하겠는데. 아니 그래서 어쩌시려고요. 저거.”
‘저거’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물을 정도로 도웅은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을 되돌아봐도 너그럽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살기 편한 성격의 도웅은 복잡한 문제가 생기면 되도록 단순하게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어쩌긴 뭘 어째. 잘라야지.”
단순해지려는 성향만큼 결정도 빠르다.
자리에서 일어난 도웅은 쉼 없이 떠들고 있는 알바생 어깨를 짚었다.
“집에 가.”
“네, 네?”
“이번 달 월급은 오늘, 내일 중으로 입금해줄게. 그동안 고생했어.”
다시 보지 않을 사람에게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타입은 아닌지라 간략하게 끝낸 뒤 대신해서 잡일을 찾아 쓰레기봉투를 들고 가게 옆 골목으로 나왔다.
“사장님 저 진짜 가요? 저 그래도 십 개월이나 일했는데 장난이죠?”
고무장갑에 손을 끼워 넣고 분리수거를 하고 있는데 억울하다는 투로 항의가 들어왔다. 손수 플라스틱과 일반 쓰레기를 분류하고 있었더니 영호를 포함한 다른 직원 셋이 나와 거들었다.
“어어, 가게는 어쩌고?”
“준영이 세워놨어요.”
“걔 샷도 못 뽑는데?”
“주문 들어오면 부르라 했어요. 어차피 바로 옆이에요.”
어쩌다 보니 우르르 몰려나와 쓰레기를 분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뻘쭘하게 서 있는 방금 해고 통보를 받은 알바생.
“아니죠? 농담이죠? 예?”
“나는 이런 일로 농담 안 치는데.”
누가 바깥 쓰레기를 여기다 버렸대.
“아, 사장니임. 너무하잖아요. 일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쉬는 시간에 잠깐 노가리 좀 깐 거 갖고.”
“매번 자잘한 지각에 그렇다고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하는 편도 아니고. 눈대중으로 대강대강.”
“…….”
“퇴직금이라도 챙겨 주자 싶어서 일 년은 데리고 있으려 했더니 손님 품평회까지 열어. 그런데 내가 널 왜 데리고 있어야 해.”
덤덤한 어조로 말하며 고무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유니폼이랑 앞치마는 캐비닛에 그대로 두고 명찰은 이리 내놔. 분리수거 하는 김에 같이 버리게.”
명찰을 빼는 손이 덜덜 떨리는 걸 보고 도웅은 어이없게도 3201호를 떠올렸다. 그날, 미니어처를 가져다준 날 카드를 내미는 3201호도 비슷하게 손을 떨었다.
상황은 달라도 떠는 모습을 보는 건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기에 도웅은 저조해진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고무장갑 위에 올려진 명찰을 플라스틱 봉투에 넣고 입구를 여몄다.
“그,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칠 만큼 작은 인사 소리였다. 정리를 끝낸 도웅은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가게로 들어갔다.
오후 8시 50분. 슬슬 라스트 오더 타임이었다. 새로운 알바 채용 글을 올리고 요거요 주문을 닫기 직전.
투샷 아메리카노 두 잔, 딸기 범벅 홀 케이크, 초콜릿 범벅 홀 케이크, 휘낭시에 열 한 개, 마카롱 8구 세 박스, 티라미수 세 조각, 치즈 쿠키 다섯 봉지, 로맨스 파티 세 개.
“어? 왜…….”
어제 충분히 알아들은 거 아니었나?!
당황하다, 일단 주문 수락을 누르고 대기하고 있는 준영이를 불렀다.
“준영아, 퇴근해.”
“배달 들어온 거 아니에요?”
“내가 갈게.”
준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대신 배달까지 해주는 멋진 사장으로 비치고 있을 게 뻔하다.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난해한 상황인지라 도웅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얼음 선별 과정이 시작됐다. 도웅은 제빙기 안에서 모나지 않은 얼음을 정성껏 골라 컵에 담았다. 수는 정확하게 열세 개.
영수증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디저트 수를 확인하고 차곡차곡 상자에 담았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설탕 유산지까지 끼워 빠르게 포장을 마치고 헬멧을 썼다.
“나 배달 갔다 올게!”
아예 가게 안에서 킥보드를 타고 나왔다. 뒤에서 직원 영호의 잔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