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90)

-띵동.

“오늘은 왜…….”

“왜 또 왔냐고? 내 손에 들린 거 안 보이세요, 손님? 어제 충분히 설명했잖아.”

디저트 웅입니다. 편안한 밤 보내고 계시는지요. 손님 건강이 무척 염려돼서 직접 와봤습니다. 어제 부탁도 드렸는데, 조금만 줄여주시면 안 될까요.

“…….”

“…….”

정중하고 상냥하게 말했는데 3201호의 표정이 어째 구리다. 만든 지 한 일주일은 지난 쿠키를 씹어 먹은 듯한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도웅의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헐.”

창백하게 질려서 입을 틀어막은 도웅은 홱 몸을 돌렸다.

드디어 맛탱이가 가버린 건가? 미쳤나 봐. 어떻게 감히 손님한테 그따위 말을!

“일부러 피해 안 가게끔 마감 시간에 맞춰서 시킨 건데.”

뒤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도웅은 차마 돌아볼 수가 없었다.

이거 어쩌냐, 어떻게 수습하냐, 망했다 등등. 온갖 절망에 범벅이 되어버렸다.

“썩 불쾌하셨나 봐.”

도웅의 뇌리로 택시 안에서 짧게 나눴던 전화 통화가 겹쳐졌다. 

반말에는 반말…… 인 건가?

“히끅!”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늦은 저녁을 너무 많이 먹어, 위가 팽창한 듯했다. 말실수로 인해 딱딱하게 굳은 몸이 딸꾹질로 들썩이기 시작하자 뒤에서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혔다. 도어락 잠금 소리까지 들린 후에야 도웅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도웅 미친… 히끅! 놈아.”

이제 어떡하냐……. 이거 어떡해.

무릎 사이에 이마를 박고 자책하던 도웅은 갑자기 누군가 어깨를 두들기는 감촉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악!”

화가 나서 집 안으로 들어간 줄 알았던 3201호가 뒤에 서 있었다.

불 꺼진 센서 등이 탁, 켜짐과 동시에 시커먼 옷으로 상의와 하의를 맞춰 입은 3201호를 보고, 도웅은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다.

미친, 저승사자인 줄 알았네!

“정말……,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요새 잠을 못 자서……, 말이 헛나왔어요.”

솜털까지 쭈뼛 서버리는 유쾌하지 못한 경험을 한 도웅의 코앞에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주문한 디저트를 달라는 건지, 부축해주겠다는 건지 헷갈려서 머뭇거리는 사이 3201호는 손을 거뒀다.

“진짜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어요. 으. 정말 죄송합니다.”

정작 입 밖으로 나와야 할 말은 마음에 묶어둔 채, 마음에 꽁꽁 묶어 놨어야 할 말은 고스란히 밖으로 나와버린 게 문제였다.

“주문하신 음료랑 디저트 여기 있습니다! 얼음 다 녹았겠네. 다시 가져다드릴까요?”

“딸꾹질 멈췄네요.”

“아……. 방금 너무 놀라서 멈췄나 봐요.”

가슴팍을 두어 번 두드린 도웅은 차가운 복도에서 엉덩이를 대강 털고 일어났다.

“거듭 사과드려요. 정말로 죄송해요.”

“불편하세요?”

“네?”

목 뒤가 뻐근한지 3201호는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한 손으로 목덜미를 주물렀다.

“디저트도 마음대로 못 시켜 먹게 하고 제가 불편한가, 해서요.”

“아…… 저 그게 아니라.”

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3201호 앞에서 갈 곳을 잃은 시선이 이곳저곳을 헤매었다.

“당뇨 올까 봐 걱정되거든요……. 적당히 드셨으면 좋겠어요.”

“걱정이요?”

이해가 가지 않는 듯 3201호의 미간이 슬쩍 좁혀졌는데, 반대로 입꼬리는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의 어색한 미소를 보자 도웅은 이거 또 잘못하면 오해 사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다, 당뇨 걸리면 단골 잃으니까!”

“아…… 하.”

반 박자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3201호가 손을 까딱였다. 그의 손가락에 종이봉투를 걸어줬더니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바로 들어가 버렸다.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닫힌 문에서 그가 화났다는 걸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 오늘 왜 이러냐, 도웅.”

또다시 엘리베이터 쭈그리 신세를 면치 못했다.

나는 어째서 3201호 앞에만 서면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바보가 되었는가, 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하며 전동 킥보드에 탔다.

“응? 뭐야.”

미동도 않는 전동 킥보드를 이리 살피고 저리 살핀 결과. 배터리 잔량이 1 퍼센트로 뚝 떨어진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 진짜 무슨 날인가?”

재수도 지지리 없다. 한동안 충전하는 걸 까먹고 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처량하게 전동 킥보드를 끌고 가게로 향하던 도웅은 돌연 뒤를 돌아보았다.

주말보다 유동 인구가 더 많은 평일 저녁의 거리는 유달리 외롭게 다가왔다.

그간 3201호를 의식하며 혼자 마음고생을 한 일과 본의 아니게 꼬여버린 관계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밀려오는 일시적인 감정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빤히 쳐다본 도웅은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로얄 골드 펠리스로.

빠른 걸음과 달리 뻑뻑한 바퀴가 답답해 결국에는 반으로 접어들고 걸었다. 공동 현관에서 3201호를 호출했다. 긴 신호음을 기다리며 서 있자 문이 열렸다. 사실 열어주지 않을 줄 알았다.

옆구리에 전동 킥보드를 끼고 32층에 도착한 도웅이 굉장히 익숙하게 벨을 누르기도 전에 현관문이 열렸다.

“…….”

헤어진 지 10분도 안 되었는데, 입가에 초코 크림이 묻힌 남자가 전보다는 누그러진 표정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전동 킥보드 충전 좀 하고 가도 되나요.”

허락해주지 않아도 야박하다 욕할 수 없다. 만약 나였다면 무시하고 문을 닫았을 터다. 그러나 남자는 순순히 현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너무 예상 밖이었던지라 가만히 서 있다가, 뒤늦게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콘센트는 여기 꽂아요.”

“네! 감사해요.”

후하게 신발장 근처 콘센트까지 안내해준다. 킥보드에 달린 작은 미니 백에서 주섬주섬 충전기를 연결했다. 빨간 불이 들어온 걸 확인하고 신발장 입구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

“…….”

거실에서 디저트를 먹는 남자와 신발장 근처에서 전동 킥보드를 충전하는 도웅.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남들 다 있는 티브이가 없는 집안에서 소음을 낼 만한 물건은 핸드폰뿐이다. 그렇다고 전기를 빌려 쓰는 주제에 핸드폰이나 가지고 놀기도 우스꽝스럽다. 쓸쓸해 보이더라도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도웅은 현실 자각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3201호가 디저트를 꺼내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외롭게 앉아 있었더니 문득 졸음이 밀려왔다. 하품을 참으려 애쓰는 도웅에게 집주인이 먼저 말을 건넸다.

“건강검진은 주기적으로 받고 있어요.”

“네, 네? 갑자기요?”

숟가락으로 분홍색 로맨스 파티를 떠먹는 남자를 쳐다봤다.

“단골 잃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불편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그냥……, 그냥 이전처럼 대해요.”

“아…….”

말문이 막힌 도웅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그 짧은 사이에 남자의 숟가락은 크로플 박스를 세 번이나 긁어먹었다.

“……아까는 진심이 아니었어요. 진짜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

로맨스 파티를 숟가락으로 삭, 삭 긁어먹는 소리가 들렸다. 

거참 야무지게 잘 먹네…….

“또 제가 오해할 행동을 할까 봐, 조심하려 했는데……. 계속 불편하게 만들었네요.”

“…….”

이번에는 똑, 똑 둔탁하게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쿠키를 먹고 있는 거 같았다.

“하. 실은 어릴 때부터 이런 오해를 많이 샀거든요. 여지를 뿌리고 다닌다는…….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제가 손님한테 리뷰 받겠다고 설치다가 일이 또 이렇게 돼버렸네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

얼음이 부딪치는 잘그락 소리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옛날 생각과 자괴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런 말이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해도 됩니까?”

전동 킥보드나 충전하고 있는 지금. 더는 나빠질 일도, 상황도 만들고 싶지 않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꾸덕꾸덕한 시럽처럼 가라앉은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요 며칠 동안 깨달은 겁니다.”

도웅은 기척도 없이 뒤에 앉아있는 남자의 존재감으로 인해 어깨를 움츠렸다. 긴장으로 조여든 근육을 이완시킨 건 우습게도 산만한 봉투 소리였다. 은근한 커피 향에 섞여든 달콤한 버터 향과 쉬지 않고 부스럭거리는 쿠키 봉투. 그리고 남자에게서 나는 은은한 꽃 향.

“사장님이 여지를 줘서 좋아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내가 먼저 좋아했습니다. 그걸 인정하기 위한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죠.”

“처음부터면, 여기 배달왔을 때?”

“그때보다는 더 오래전일 겁니다. 개업했을 때부터인지, 이른 새벽 출근하는 게 눈에 밟히기 시작했을 때부터인지 헷갈리긴 하지만.”

“아……. 개업이요? 저 봤어요?”

개업 당시 인테리어를 어떻게 알고 있나 했더니, 직접 본 듯했다.

“아마 제가 첫 손님이었을 겁니다. 태풍 때문에 개업 날짜가 미뤄졌다고 하셨으니까. 커피랑 크루아상을 사 먹었거든요.”

“아? 아아?”

누구에게나 처음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기 마련이다. 도웅의 경우에는 첫 손님이 그러했다. 얼굴이나 인상착의는 이미 기억 속에서 흐릿해진 지 오래였고 메뉴만 선명하게 기억했다.

투샷 아메리카노에 크루아상.

“사장님이 직접 배달왔을 때는 놀라움 반, 부담 반이었습니다. 마음을 깨닫기 전이라. 여하간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사장님이 여지를 준 건 절대 아니니까 마음 쓰지 마세요. 딱히 사장님을 탓할 이유도 없으니까.”

“되게…… 놀라움의 연속이라, 뭐부터 말해야 할지…….”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 마음에 사장님이 여지를 줬다는 오해가 싫어서 말하는 거니까.”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며 꺼낸 3201호의 말은, 어두운 침실에 거슬리지 않을 만큼의 은은한 빛을 내는 미니어처만큼이나 포근했다. 엉망진창으로 느껴졌던 하루가 나쁘지 않았다고 느껴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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