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90)

“이름, 물어봐도 되나요? 우리 서로 이름도 모르는데.”

단골보다는 조금 가까운 사이가 된 거 같아 이름을 묻자.

“도웅 씨 아닙니까? 몽블랑 값 이체하니까 나오던데.”

“어, 맞아요. 도웅. 그, 손님 이름은 뭐예요?”

다시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도웅은 고개를 돌렸다. 빈 쿠키 봉투를 들고 소파로 향하는 3201호의 뒷모습이 보였다. 봉투를 반듯하게 접은 남자는 절반 정도 남은 커피를 들었다.

“어희요. 제 이름은 어희입니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되나요.”

3201호……. 그러니까 어희는 새벽에 몽블랑을 사러 왔을 때처럼 거절이나 수락을 하지 않고 멀뚱멀뚱 쳐다보며 커피를 마셨다. 천천히 줄어드는 진한 투샷 아메리카노를 보며 도웅은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어희 씨, 제가 어희둥둥 해드릴 테니까 리뷰 하나만 달아주세요.”

“콜록!”

어희가 사레들린 기침을 했다. 등까지 크게 들썩이는 걸 보고 다가가 등을 두들겨줬다. 서서히 기침이 멎은 어희가 벌게진 얼굴로 물었다.

“뭐요?”

부끄럽다거나 창피해서가 아닌 기침으로 인해 피가 얼굴로 쏠린 듯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도웅은 어처구니없게 ‘귀엽다’라고 느꼈다. 다 큰, 그것도 저보다 키도 덩치도 큰 남자를 보고 귀엽다고 느끼다니, 분위기에 휩쓸린 탓이라 여기기로 했다.

첫인상은 약간 무서웠는데 보면 볼수록 색다르다. 이런 퇴폐적인 분위기의 인물은 스크린 속에서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사람을 썰던데, 이 남자는 케익을 썬다.

아니지……. 하루에 홀 케이크를 세 개 이상씩 먹는데 이게 진짜 광기가 아닐까?

아니, 광기든 뭐든 리뷰만 써준다면 상관없지.

도웅은 두 눈에 힘을 주고 어희를 바라보았다.

“어희둥둥 해드릴 테니까 리뷰 남겨주세요.”

“그놈의 리뷰…….”

어희가 티라미수 조각 케이크를 꺼내 숟가락으로 크게 한술 떴다.

“안 질려요? 쉬지도 않고 드시네…….”

“사장님이 만든 건 안 질려요. 매번 맛있어서.”

그래, 그 말을 리뷰로 써주면 안 될까!

도웅은 무릎과 손을 이용해서 가까이 다가갔다.

비굴하게 보이려 의도한 게 아니라 앉아 있던 자세 자체가 엉거주춤했기에 기어간 거였는데 어희가 티라미수를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네발로 기어서 사정해도 안 통합니다.”

“……사정한 거 아니거든요.”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며 다가갔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에는 쉬웠다.

“그러지 말고 리뷰 하나만요. 딱 하나만.”

서로 가까워진 김에 리뷰 한 줄, 어렵지 않잖아.

비굴하게 리뷰를 구걸하고 싶지 않다던 도웅은 죽었다. 3년 동안 노리고 있던 먹잇감을 눈앞에 뒀는데 이제 와 포기가 될 턱이 없다. 엎드려 절이라도 받아야겠다.

“주문마다 달아달라는 게 아니라, 딱 하나면 되는데…….”

“으음. 싫습니다.”

그러나 어희는 완강했다. 디저트 취향만큼이나.

“아니이, 왜 싫어요? 별점 오점 안 줘도 되니까 그냥 달아주면 안 되나요…….”

“대놓고 달아달라고 하니까 거부감이 먼저 들어서요.”

“그럼 은근히 달아달라고 하면 달아주나요?”

“달아나버릴 겁니다, 자꾸 조르면.”

단호한 어조와 함께 티라미수를 벌써 두 조각째 먹고 있는 어희를 보자 정말, 진짜, 아무리 졸라도 안되는 건 안 될 거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시무룩한 도웅이 풀이 죽어 패배자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위에서 일부러 나온 게 확실한 어색한 헛기침이 들렸다. 그리고는.

“……어희둥둥은 어떻게 해줄 건데요.”

내가 잘못 들었나? 귀를 문지르고 어희를 바라봤다. 그는 양 볼 가득 티라미수를 우물거리며 허공으로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네? 잘 못 들었어요.”

“……어희둥둥 해준다면서요. 그건 어떻게 해주는 건지 궁금해서.”

말장난으로 내뱉은 말을 진지하게 받아준다고? 어안이 벙벙한 도웅이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눈매가 곱게 접혀 반원 모양으로 보일 정도로.

“그럼 제 어희둥둥이 만족스러우면 리뷰 달아주기, 어때요?”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는 어희에게 자신 있게 제안했다.

이름을 듣자 말장난처럼 떠오른 ‘어희둥둥’이 뭐냐고 묻는다면 딱히 설명할 건 없었다. 그저 기분 좋게 으쌰으쌰, 둥개둥개 해주겠다는 뜻이었으니까.

“내키지 않으면 별수 없고요. 그런데 이거 흔치 않은 기회라는 것만 알아주세요.”

대화가 잘 풀리고 사이도 가까워졌으니 이 정도 거래는 제안해도 될 거 같다.

도웅은 싱글벙글 웃음을 매달고 어희를 보았다.

“으음.”

그러나 어희는 별다른 대답을 내놓지 않고 마카롱을 먹었다.

느긋하게 마카롱 8구 한 박스를 비우고 나서야 어희의 입이 말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좋습니다.”

대답이 없기에 거절로 받아들인 도웅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요? 정말이죠?”

쉬이 믿기지 않아 재차 확인했다. 어희는 새 커피를 뜯어 빨대를 꽂아 물고는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깔았다.

“네? 정말로 약속한 거예요.”

“으음.”

남자의 목울대가 다섯 번 정도 꿀꺽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닌 거 같습니다. 그냥 안 할래요.”

왜! 아무리 단골이라고 해도 이렇게 말을 번복해도 되는 거야? 

차라리 주문 번복이라면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일 용의가 있지만 이건 아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뻘짓을 했는데? 

눈이 오든 비가 오든 3201호에 나른 배달 건이 수십이 넘었다. 모처럼 생긴 기회를 ‘안 할래요’라는 변덕에 쉽게 포기할 도웅이 아니었다.

“왜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완전 좋은데.”

“…….”

“어희 씨도 어희둥둥이 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요.”

“그렇긴 한데, 이건 아닌 거 같아서.”

“아, 왜요~ 해줘요, 해줘!”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생떼를 부려도 어희의 반응은 여전히 떨떠름했다.

“정말 안 해줄 거예요?”

“네.”

도웅은 이 와중에도 디저트를 손에서 놓지 않는 어희의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어희. 이 남자는 질리지도 않는지 매일 디저트를 달고 산다. 게다가 내가 만든 디저트를 바로 골라내는 애정까지. 이 완벽한 손님에게 설득이 통하지 않는다면, 남은 건 협박뿐이다.

도웅은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마카롱 8구 두 상자와 초콜릿 홀 케이크 상자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남자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따라붙었는데 마치 ‘그걸로 뭐하게?’라고 묻는 듯하다.

“안 해주면, 이거 안 드릴 거예요.”

“……돈 주고 구매한 물건을 도로 뺏겠다는 말입니까.”

황당해하는 어희에게 도웅은 씩 웃어 보였다.

“빼앗다뇨. 나간 상품에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되어 모두 회수 조치하는 거예요.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손님. 그리고 로얄 골드 펠리스로 접수되는 주문은 배달 거부인 줄 아세요. 너무 멀어서 오기 힘드네요.”

걸어서 15분도 안 되는 거리를 ‘멀다’는 핑계로 배달 주문을 거부했다.

“그럼 포장 주문은 받습니까?”

“받을 리가.”

“무슨 권리로 그런 야만적인 처사를 내리시는지.”

“사장이라는 권리요.”

아주 잠깐이지만 울상이 된 어희의 표정을 도웅은 놓치지 않았다.

손님, 그것도 개업부터 지금까지 이용해준 뿌리 깊은 단골에게 강경하면서 노골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만든 건 눈앞의 남자였다. 내가 만든 디저트가 아니면 살지 못하는 사람인 양 구는 남자.

“고작 리뷰 때문에 단골을 이렇게 취급한다고요?”

억울한 심경을 내비치는 호소력 짙은 남자의 목소리에도 도웅은 흔들리지 않았다.

“단골에게 리뷰 한 줄 받지 못할 정도로 제가 만든 디저트는 형편없었나 봐요.”

“무슨 그런…….”

“마음의 상처가 워낙 큰 탓에 당분간 직원들에게 가게를 맡기고 저는 휴식기를 가져야겠어요. 디저트는 뭐, 공장에서 떼오든 직원보고 만들라고 하든 하면 되는 일이죠.”

자, 이제 누가 갑이지?

“아…, 아니, 이게 무슨……. 저기, 일단 진정하고.”

“그동안 디저트 웅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했어요.”

곱게 접힌 종이 가방을 열어 홀 케이크를 넣으려 하자 옷깃을 잡아끄는 손길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남자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매달려 있었다. 디저트가 없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무슨 할 말이라도?”

“하……. 정말 이러실 겁니까.”

어찌나 애절한지, 누가 보면 디저트가 아니라 돈이라도 빼앗은 줄 알겠다.

고민하는 척 고개를 치켜올린 도웅은 이내 옷깃을 붙잡은 어희를 쳐다봤다. 평소 피곤함에 찌든 거뭇한 눈가 덕분에 그의 상황이 몹시 절박하게 보이는 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누가 이 남자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도웅은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죄 많은 남자라 여겼다. 남자가 반할 정도로 잘생긴 외모는 둘째치고 어떤 디저트든 달콤하게 만들어버리는 손재주와 하루도 쉬지 않는 성실함. 남자를 이렇게 만든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도웅 본인이었다.

안타까워도 목적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 내가 그를 이렇게 만든 것처럼, 그도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알록달록한 게 정말 맛있겠지요?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달콤함, 잘 아시죠? 이 꾸덕한 초콜릿 범벅 케이크는 말해 뭐해요.”

너그러운 목소리로 마카롱 8구 박스를 열었다. 보는 것만으로 눈알이 달콤해질 거 같은 비주얼이었으나 매일 직접 만드는 도웅에게는 커다란 감흥이 없는 평범한 설탕 덩어리였다. 그러나 남자는 커다란 유혹을 당한 것처럼 잘게 눈동자를 떨었다.

“……뭘 원하십니까, 사장님.”

회수하려 했던 디저트 상자를 내려놓고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제가, 뭘 원하는지 말 안 해도 알고 계시잖아요.”

“리뷰……?”

“날로 써달라는 거 아니에요. 저 그렇게 양심 없지 않으니까. 방금 말씀드린 어희둥둥 만족 시 리뷰 달아주기로 해요. 솔직히 어희 씨도 혹했잖아요. 이제 와서 단순 변심으로 싫다 그러면 제가 서운하죠.”

어깨가 위로 올라왔다가 내려가는 게 훤히 보일 정도로 남자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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