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90)

적막함과 함께 어둠이 내려앉은 집안에서 멀뚱히 신발장에 선 도웅은 팔을 휘적여 꺼진 센서 등을 다시 밝혔다.

“안 들어와요?”

“불 좀 켜줘요. 뭐 이렇게 어둡담.”

신발을 벗자 눈치 없이 꺼진 센서 등이 다시 켜졌다. 동시에 어희가 소파에서 일어나기에 거실 등을 켜주는 줄 알았다. 그러나 거실 구석에 있는 스탠드 조명만 달랑 켜고 도로 앉아 버렸다. 

거참, 알다가도 모를 양반이다. 도웅은 점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그의 면전에 내밀었다.

지금이 몇 시인 줄 아니?

자다 깨서, 빛에 익숙하지 않은 어희는 눈을 좁혀 핸드폰 액정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는.

“자몽 주방 세제가 삼십 퍼센트나 세일 하네요.”

이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네 죄를 네가 알렷다, 하고 보여준 핸드폰을 거두고 액정을 확인했더니 정말로 자몽 주방 세제가 할인 중이라는 쇼핑 어플의 알림이 올라와 있었다.

“어! 나 이거 지난주에 제값 주고 샀는데!”

심지어 같은 제품을 샀다. 일주일만 기다렸다 살걸! 손해 본 게 훤히 눈에 보여 아까워하다가 어쨌든 주방 세제는 계속 써야 하는 거니까. 도웅은 금세 한 통을 더 주문했다. 

할인하는 김에 두 통 더 쟁여 놓을까?

“다 샀습니까?”

“아뇨. 지금 더 살지 고민 중이에요.”

“아직도 기분이 안 좋네요.”

“쿨쿨 잘 자고 있었는데, 깨워서 기분이 그렇게 안 좋아요?”

도웅은 추가 주문을 마치고 핸드폰을 점퍼 주머니로 쏙 넣었다. 본인 기분 언짢은 걸 계속 어필하던 남자는 뚱하니 시선을 깔았다. 오목한 눈 아래, 속눈썹이 흐릿한 그늘을 만들어냈다.

“내 기분 말고 사장님 기분이요.”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내 기분을 살필 거였다면 ‘기분이 안 좋아요.’ 가 아니라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라고 해야지. 

도웅은 어희를 째려봤다. 정곡을 찔려서 말을 돌리고 있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희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러자 기가 막히게 훤칠한 이마가 드러났다.

“내가 뭐 잘못했습니까?”

본인 잘못을 모르겠다는 저 순진무구한 표정 좀 보라지. 아직 잠기운을 달고 있는 얼굴은 묘하게 어린애 같기도 하다.

“같이 저녁 먹기로 했는데, 하도 안 나와서 뭐 하나 올라와 봤더니 자고 계셨잖아요. 피곤하면 피곤하다고 미리 연락이라도 주지. 왜 약속을 해놓고 자요? 하마터면 밤새 밖에서 기다릴 뻔했네.”

말이란 참 신기하다. 응어리를 내뱉기라도 하듯 말을 하고 나서 마음이 후련해질 때가 있는 반면 증폭기를 매단 것처럼 감정에 살이 붙기도 한다. 지금은 후자였다.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까 서운함이 몰려왔다.

그래. 지금 나는 화가 난 게 아니라 서운한 거다. 십오 분을 기다린 거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가벼이 넘길 수 있는 수준의 지각이다. 내가 서운한 건 약속을 해놓고 나 몰라라 잠수를 탄 점이다. 

내가 바람을 맞다니! 야속한 사람 같으니…….

“어디 한번 말해봐요. 바람맞히고 잠이 왔어요? 따뜻한 집에 포근한 잠옷까지 입었으니 잠이 안 올 리가 없지!”

빈정거림이 담긴 말을 가만히 앉아 테이블 끝을 응시하며 듣던 어희가 새초롬하게 눈을 깜박이며 도웅을 올려다봤다. 스탠드 조명에 주황빛으로 물든 어희의 얼굴은 여전히 무구했기에 도웅은 힘이 쭉 빠졌다. 소파가 아닌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더니 옆에서 넌지시 묻는다.

“우리가, 저녁을 먹기로 했다고요?”

“…….”

나 여태 누구랑 얘기한 거야? 

지난번부터 대화 때마다 묘하게 핀트가 엇나간다. 환장할 노릇이다. 도웅이 답답해하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언제? 처음 듣는데.”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에게 도웅은 또박또박 시간까지 세어주었다.

“한 시간 삼십 분 전에 전화했잖아요. 같이 저녁 먹자고.”

아직 졸린 지 눈가를 비비던 손끝은 뚝 멈추더니 이내 스르륵 아래로 내려와 콧대를 감쌌다. 

곰 인형 같은 잠옷 차림으로 진지하게 이사님 같은 자세를 취해봤자, 멋없다.

“그거……. 그냥 한 시간 후에 저녁 먹겠다는 말 아니었습니까?”

“‘같이’ 저녁 먹자는 뜻이었어요. 대체 어떻게 알아들은 거예요?”

“사장님이 밥 먹을 시간을 저한테 허락받는 줄 알았죠. 어쩐지 그걸 왜 나한테 묻는지 의문이었는데 그런 뜻이었군요.”

세상에 어떤 사람이 굳이 전화까지 해가며 본인 밥 먹을 시간을 허락받는단 말인가. 그제야 ‘맛있게’라는 메시지가 무슨 뜻인지 알았다. 맛집을 찾으라는 말이 아니라 ‘혼자’ 맛있게 먹으라는 거였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지금이라도 외출 준비할 테니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줄 수 있습니까? 빨리 씻고 나올게요.”

“예, 예. 그러세요.”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네.”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온 어희의 두 손에는 500ml 생수병과 탄산수가 들려있었다. 차라도 한 잔 내오나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같은 남자끼리 이것저것 따지기도 우스워 도웅은 생수를 마셨다.

꼴깍, 꼴깍.

“…….”

“…….”

욕실에 홀랑 들어가길래 씻고 나오는 줄 알았던 남자는 물을 틀어놓고 다시 소파에 앉아 남은 탄산수 한 병을 뜯었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멀뚱히 보며 물었다.

“여기서 뭐 해요?”

“욕조 물 받으려면 기다려야 해서.”

욕조? 물을 받아? 왜? 설마 한가로이 거품 목욕이나 하려는 건 아닐 테고.

……아닌가? 

도무지 사고 회로를 종잡을 수 없다 보니 어희라는 사람은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

“거품 목욕이라도 하려는 건 아니죠?”

“……아.”

뒤늦게 탄산수를 내려놓고 황급히 욕실로 들어간 걸 보면 진짜 거품 목욕이라도 하려 했나 보다. 이제는 일일이 따지며 황당해하기도 지쳐서 짧게 혀를 한 번 차는 걸로 끝냈다. 

밥 한 끼 먹기가 이리 어려워서야 원.

도웅은 소파 등받이에 등을 깊게 기대었다. 따뜻한 집에서 편하게 앉아 있다 보니 노곤함이 몰려왔다. 욕실 너머로 들리는 샤워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꼴이 조금 이상해도 어쩔 수 없다. 어희의 집에는 흔한 티브이도 없었다. 본래 티브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휑한 벽면에 시선을 고정하고서 물을 마셨다. 

그림이라도 걸려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어떤 그림이 괜찮으려나. 

벽에 어울리는 그림을 상상하면서 시간을 죽였다. 열세 번쯤 죽였을 때 남자가 뿌연 수증기와 함께 나타났다. 욕실 문이 열리자마자 거실까지 닿는 달콤한 꽃 향에 도웅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따금 가까이 가면 은은하게 꽃 향이 난다 싶었는데 그게 샴푸 향인 모양이다.

검은 반팔 티를 입은 어희는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춤에 두른 수건을 두 손으로 꼬옥 붙잡은 상태였다. 속옷도 안 들고 간 건가, 했는데 다른 방으로 쫑쫑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자 그것도 아니다. 수건 한 장으로 미처 엉덩이까지 가리지 못한 어희는 까만 속옷에 감싼 볼기짝을 자랑하며 사라졌다.

같은 남자끼리 참 유난이다 싶다가도 어희가 고백한 게 떠올라 군말 없이 테이블에 올려놓은 생수로 목을 축였다.

뒤이어서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들렸다. 거실에서 멀뚱히 앉아 있다가 어희가 남기고 간 꽃 향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에 있는 작은 방을 빼꼼히 들여다보자 머리를 말리는 어희와 눈이 마주쳤다.

“심심한데 좀 둘러봐도 괜찮아요?”

헤어드라이어로 만족하지 못하고 작은 선풍기까지 틀어놓은 어희한테 허락을 구했다.

“딱히 구경할 거리는 없을 텐데, 상관없습니다.”

사적인 방은 집주인의 성격과 취향을 알 수 있는 좋은 공간이다. 그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성격인지를 낱낱이 파악해서 어희 둥둥 목록에 추가하리라. 몰입을 위해 스스로를 심리학자라고 세뇌한 도웅은 홀랑 방 안으로 들어갔다.

집에 비해서 공간이 협소했다. 창고를 파우더 룸으로 사용하는 줄 알았더니 옆 벽에 쳐진 커튼을 밀자 새로운 공간으로 통하는 아치형 가벽이 떡하니 나타났다.

“호.”

이것 봐라. 역시 이런 공간이 하나쯤은 나와 줘야 흥미롭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커튼을 걷어 새 공간으로 들어섰다. 양 벽면에 줄줄이 옷이 걸린 평범한 드레스 룸이었다. 집에서 입는 걸로 추정되는 편한 티나 잠옷을 제외한 외출복은 죄다 거무죽죽했다. 코트부터 셔츠, 바지, 양말 하다못해 속옷까지.

어희는 검은 옷을 즐겨 입는다. 시계 종류는 적은 거로 봐서는 물욕은 없어 보인다.

도웅은 어희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머릿속에 슥삭슥삭 적어 추가했다. 진열 서랍을 닫고 드레스 룸을 빠져나오자 아직도 머리 말리기에 분주한 어희가 보였다. 자연스레 그를 지나 옆 방문을 조심히 열었다.

넓은 방은 비어있는 방인 듯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가구 하나 들여놓지 않은 빈방을 그대로 닫고 복도를 지나 작업실 반대편 문을 열었다. 침대 하나가 달랑 놓여있는 그곳에서는 남자가 머리에 내내 달고 다니던 꽃 향이 나는 거로 보아 침실인 듯 보였다.

무슨 침실이 이렇게 휑하냐…….

남의 집 냉장고와 안방은 함부로 뒤지는 게 아니라고 배운 터라 얌전히 문을 닫고 돌아섰다.

“……엇.”

언제 왔는지 모를 어깨에 이마를 부딪쳤다.

검은색 목티 아래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어희는 눈을 깔아 도웅을 내려봤다. 덤덤한 시선은 마치 ‘여기는 무슨 일로?’라고 묻는 거 같다.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이지만.

“둘러봐도 된다길래, 하하…….”

“이곳저곳 헤집고 다녀도 된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그저께 어희둥둥을 생각해봤더니 어희 씨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없더라고요. 그래서 뭘 좋아하는지 알아야겠다 싶어서요. 왜, 방을 보면 방 주인의 심리를 알 수 있다잖아요. 하하…, 하……. 그런데 제가 왜 이런 변명을 하고 있는 거죠?”

물음 아닌 물음에 미동 없이 서 있던 남자는 여전히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답했다.

“꼭 도둑이 제 발 저린 모습이네요.”

물론 지금 내 모습이 심리학자가 아닌 좀도둑에 가까워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비유를! 도둑이라니, 도둑이라니! 

분해도 반박할 말이 없었기에 도웅은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심리학자라고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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