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90)

“심리학자도 집을 이렇게 뒤지진 않을 텐데.”

“허, 허락받았잖아요.”

마음대로 집을 뒤져서 화났나? 살금살금 눈치를 보려 할 때 남자의 손이 움직여서 내 뒤에 있는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별거 없는데 뒤져 보실래요?”

“…….”

뒤지기에는…… 내 나이, 창창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어……, 음……, 네?” 같은 얼빠진 침음이 새어 나왔다. 어희의 매끄러운 턱선을 비스듬히 올려보고 있는데, 슬쩍 어깨가 뒤로 떠밀려 두 걸음 뒷걸음질 쳤다.

“왜 긴장합니까.”

“뒤져 보라는 사람 앞에서 긴장하지 않는 사람 있으면 데려와 보세요.”

뒤늦게 ‘뒤적거려’ 보라는 뜻인 걸 알았다마는 어희의 어휘는 듣는 이로 하여금 어이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본의 아니게 남의 침실에 모호하게 발을 들여놓은 지금 이 상황은 복잡 미묘하면서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문 앞에 서 있는 남자하고 어깨를 부딪쳐가며 침실을 빠져나온 도웅은 어느새 벌게진 얼굴을 숨기려 앞장서서 신발장으로 호다닥 피신했다.

“얼른 겉옷 들고나와요. 배고파 죽겠네.”

밀려드는 민망함에 도웅은 괜히 툴툴거리며 신발을 신었다.

아으. 당황한 거 티 많이 났겠지? 

그렇지만 고백까지 한 상대방과 한 침실에 있으면 누구라도 긴장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쭈그리고 앉아 신발장 타일이 얼마나 깨끗한지 뚫어져라 관찰했다. 조금만 더 쳐다보면 진짜 뚫어버릴 수 있을 거 같았는데 마침 어희가 검은 코트를 걸치고 나타났다.

또 까만색. 저승사자가 어희를 보면 친구하자고 달려들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가죠.”

“네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내내 침묵이 흘렀다. 11층에서 천천히 올라오는 숫자를 맹하니 보고 있는 그때. 드물게 어희가 정적을 깨고 말을 걸었다.

“그래서 찾았습니까?”

뜬금없이 찾았냐 묻는 어희를 어리둥절하게 보기보다는 직설적으로 묻는 게 더 낫다.

“뭐를요?”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1층 버튼을 눌렀다. 뒤이어 오르는 어희를 멀뚱히 쳐다봤다. 문이 닫히고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하는 사각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희의 낮은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방을 보면 방 주인 심리를, 알 수 있다면서요. 제가 뭘 좋아하는지, 찾으셨나 해서.”

그는 특유의 나긋나긋한 속도로 대답했는데 무려 10층에 다다라서야 말이 끝났다. 한국인이 제일 싫어하는 속도였으나 도웅은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빨라서 못 알아들을 바에는 차라리 느리고 확실한 게 좋았다.

“아… 니요? 그저 까만 옷을 참 좋아한다는 것만 알았어요.”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해도 드레스 룸은 솔직하던데. 도웅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쓸데없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다른 말을 하기로 했다.

“그러면 모레에 같이 쇼핑이라도 가실래요?”

덥썩 좋다고 할 줄 알았던 어희는 어째서인지 1층에 도착할 때까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뒤를 돌아본 도웅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는 어희를 불렀다.

“무슨 생각 해요?”

“아뇨. 별생각은 아니고.”

아니고?

대신해서 문 열림 버튼을 눌러주고 있는데 돌연 어희의 어깨가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큰 한숨을 내쉬는 듯한 몸짓이다.

“오늘은 저녁 식사, 내일은 전시회, 모레는 쇼핑이요.”

썩 달갑지 않은 얼굴을 한 어희는 뚱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아파트 단지를 나와서 양꼬치 가게로 향하는 내내 가라앉은 어희의 표정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양꼬치 괜찮아요?”

건물 1, 2층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양꼬치 가게 앞에서 걱정이 되어 물었더니.

“한 번도 안 먹어 봤습니다. 음, 이번 기회에 먹어 보죠.”

태평한 대답이 돌아왔다. 양고기 특유의 냄새나 향신료가 얼마나 호불호가 갈리는지 잘 아는 도웅은 차라리 다른 가게를 찾을 요량으로 핸드폰을 열었다. 그러자 무섭게 어희가 한 손으로 도웅의 등을 밀며 가게로 직진했다.

“어어, 입에 안 맞아도 책임 안 져요?”

“예.”

그의 용감한 행보에 힘입어 카운터로 직행했다.

인원을 묻는 직원의 말에 “둘이요.” 하고 답하자 직원이 보기 좋은 서비스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룸이 편하실까요, 아니면 홀이 편하실까요?”

최대한 냄새가 덜 배는 쪽으로 선택하고 싶은데 헷갈린다.

홀에서 먹자니 다른 테이블 냄새까지 밸 거 같고 룸에서 먹자니 옷이 연기를 다 흡수할 거 같다. 어느 쪽이 나은지 직원한테 물어보려는 찰나 어희가 대뜸.

“룸이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룸을 골라 버렸다.

“괜찮죠?”

“아. 네. 어차피 못 고르고 있었어요.”

홀 직원에게 겉옷을 맡기는데, 본인 코트를 꽁꽁 여미고 있는 어희는 벗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코트 맡기는 게 낫지 않아요?”

하고 물어도 어희는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안내받은 룸은 환풍기가 돌고 있었고 작은 창문도 달려 홀보다 쾌적한 느낌을 주었다. 착석해서 따뜻한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메뉴판을 들여다봤다.

“A세트로 시킬까요? 해물도 포함되어있어서 그게 나을 거 같은데.”

“예. 저는 처음이니까 제일 적절해 보이는 걸로 시켜주세요.”

“술 드세요?”

“사장님 마시면 마시고 아니면 딱히.”

주류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밥 먹으러 왔으면 밥이나 먹어야지, 무슨 술이냐.

“내일 출근도 해야 하니까 술 말고 음료수 마실래요?”

“저는 물이면 됩니다.”

직원을 불러 메뉴를 주문하고 도웅은 작게 하품했다. 아까 어희가 씻을 때부터 쌓아 놨던 노곤함이 다시금 풀리려 했다.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언제 쉽니까?”

코트를 벗어 한쪽에 개켜놓은 어희는 테이블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한 손을 꼼지락거렸다. 뭐라도 쥐여주고 싶게.

“퇴근하면 쉬죠.”

“그 뜻이 아니라, 휴일 말입니다. 주말에도 안 쉬는 거 같아서.”

휴일이라. 그게 뭐죠? 먹는 건가?

물론 사장인 도웅에게 출근을 강요하는 직원은 없다. 다만 그의 사전에 사정없는 휴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달리 출근하기 싫은 날이 분명 있긴 했어도 출근 준비가 귀찮을 뿐 막상 일하고 나면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헬스장같이.

“쉬어야 하나……?”

대답을 바라지 않은 혼잣말이었는데 남자가 대꾸했다. 낮은 어조로 느리게.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매번 새벽에 나오고 밤늦게 퇴근하는데도 늘 기분 좋은 디저트를 만들잖아요.”

맛있는 디저트가 아닌 ‘기분 좋은’ 디저트라고 말하는 어희는 특이했다.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디저트라고 알아들을 수 있으나 왠지 직감이 ‘그게 아니야 멍청아.’ 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따지자면 어희는 특이했다.

“저.”

말문을 열려는 찰나 좋지 않은 타이밍으로 직원이 커다란 트레이 위에 양꼬치부터 A세트에 포함된 각종 음식을 들고 찾아왔다.

테이블 미니 화로에 숯이 들어오고 자잘한 향신료까지 세팅이 끝나고 직원이 친절한 인사와 함께 룸을 나갔다.

새로운 음식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어희가 특이하다는 생각은 점차 잊혔다. 도웅은 빙글빙글 꼬챙이가 돌아가는 걸 보다가 잘 익은 꼬치 하나를 어희의 앞으로 옮겨주었다.

“이거 먹어봐요.”

음식이 나올 때부터 어두운 기색의 어희는 다 익은 양꼬치를 건네주자 전혀 다르게 변했다. 양꼬치를 내려다보는 눈 밑이 얕은 애교살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기까지 했다. 관찰력이 좋은 도웅이 아니라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미세한 변화였다.

“어때요? 괜찮아요?”

먹기도 전에 물었고.

“네. 아주 좋아요.”

어희도 먹기 전에 대답했다.

안심하고 도웅도 꼬챙이에서 고기를 뽑아 먹었다.

“오.”

고기 한 점에 작은 감탄이 나왔다. 역시 숨은 맛집 쟁이 영호의 픽이다.

육즙이 흐르는 양고기는 맥주를 떠올리게 했다. 입안 남는 향신료의 여운은 또 어떻고. 새 꼬치를 화로에 올리며 맥주 한잔을 할지 고민이 들었다. 일단 진정하고 양 갈비살도 추가하자.

직원을 부르려 할 때 도웅은 눈앞에 앉은 남자의 심상치 않은 낌새를 발견했다. 반듯한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져 있는가 하면 눈매도 와락 일그러져있다. 손으로 막고 있는 입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모래를 씹듯 움직이고 있었는데 굉장히 거북한 모습이다.

“무, 무슨 일이에요?”

방금까지 좋다며! 그냥 좋은 것도 아니라 아주 좋다며!

“그게 아니라, 맛이…….”

맛이? 다음 말을 듣지 않아도 안다. 저렇게 온 얼굴 신경을 이용해 표현 중인데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입맛에 안 맞으면 뱉지 왜 계속 머금고 있는지 모르겠다.

테이블 끝에 놓인 티슈를 서너 장 뽑고 있는데 미처 닫지 못한 어희의 입이 말을 마저 꺼냈다.

“맛이, 업써서…….”

줄줄 새는 발음 덕분인지 낮은 어조에 울먹임이 더해진 것처럼 목소리가 울렁거렸다.

“입에 남겨두지 말고 뱉어요, 뱉어.”

내민 티슈를 받은 어희는 몸을 돌려 음식물을 뱉은 후 물로 입가심을 했다. 여전히 표정은 좋지 못했다. 슬그머니 화로 한쪽에 해물 꼬치를 올렸다.

“…….”

“…….”

빙글빙글 돌아가는 꼬챙이를 내려다보던 도웅은 양고기 같은 호불호가 강한 음식점 말고 무난하게 소고기나 먹으러 갈 걸 그랬다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어희둥둥은커녕 입맛만 버리게 했으니, 오늘 하루가 실패했다는 얕은 우울감이 들었다.

“후…….”

기운 없이 양고기 한 점을 집어 먹은 도웅은 빠르게 감정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낙천적인 성격이 힘을 발휘한 것이다.

실패는 다음 성공을 위한 디딤돌일 뿐이고 고작 이런 일로 남은 하루를 엉망으로 보내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게다가 선택지가 양고기만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새우, 관자, 오징어가 가지런히 꽂혀 있는 해물 꼬치가 있으니 완벽하게 말아먹은 하루는 아니다.

금세 회복을 완료한 도웅은 문득 조금 전 혀짧은 어희의 말투가 떠올라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