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90)

어희의 학력 고백에 가득 머금고 있던 페퍼민트 티를 삼켰다. 어희도 들었을 만큼 소리가 컸다. 그렇게까지 놀란 건 아닌데 놀라 보였을까 봐 괜히 연거푸 차를 마셨다.

“아. 그랬구나.”

“어. 그랬어.”

단순 감탄사도 반말로 대응하는 그의 패턴이 이제는 익숙하면서도 방금은 꼭 친구처럼 친숙한 느낌이 강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페퍼민트 티를 두 번째 우려 마실 즈음 어희의 얇은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갔다.

“…졸려요?”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말을 걸었더니 여전히 눈을 감고서 고개만 살랑살랑 내젓는다.

“그런데 보통 몇 시에 자요? 일곱 시에 주무시고 계실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커피를 마시자 급격하게 피곤한 기색을 띤 어희는 얼음을 씹어 먹으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통은… 다섯, 여섯 시쯤 잡니다.”

“오후? 몇 시에 일어나요?”

“자정 전에는 일어납니다.”

자정 전에 잠이 드는 도웅과는 완전히 다른 생활 패턴에 사과를 먼저 하려 했다. 자야 하는 시간에 불러낸 일에 대해서.

“미….”

“미?”

그런데 이게 내 잘못인가? 처음부터 말을 잘못 알아들은 이 사람 잘못도 있지 않을까? 

구질구질한 합리화가 빼꼼히 기웃거리고 있었다. 단순하게 고개를 젓는 행동으로 구질한 마음을 멀리 치워버린 도웅은 냉큼 사과를 건넸다.

“수면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해요.”

가볍게 건넨 사과인 만큼 마음도 가볍다. 디저트라도 내줄까 싶어, 자리를 벗어나 안쪽 냉장고를 열었다.

“티라미수 드실래요?”

어차피 먹겠다고 할 테니 대답은 듣지 않고 각진 네모난 접시에 케이크 세 조각을 올렸다.

포크를 챙겨 테이블로 돌아오는 그 잠깐 사이에 어희는 아예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늘 고르게 편 허리를 등받이에 기댄 걸로 보아 정말로 잠이 든 거 같았다.

도웅은 접시를 내려놓고 티라미수 케익을 야금야금 포크로 갉아 먹으며 어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웬만하면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사람답게 허연 얼굴 안에는 제법 수려한 이목구비가 오목조목 들어가 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입술은 신기하게 위, 아래를 구분 지어주는 선이 길었다. 그래서인지 살짝만 웃어도 그의 입꼬리는 쑥 올라갔다. 어떻게 생겨 먹은 구조인지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의 입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휘저어 보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물론 성적인 제스처가 아닌 단순한 호기심으로.

한 조각을 다 먹어갈 즈음 도웅의 시선이 어희의 얼굴에서 뒤통수로 넘어갔다. 정확히는 뒤로 느슨하게 반 묶은 동글한 머리카락 뭉텅이로.

나는 양꼬치 가게에서 나올 때 뿌렸던 섬유 탈취제 냄새뿐인데, 그는 흐릿한 꽃 향을 풍기고 있다.

도웅은 꽃 향의 발생처인 어희의 동그란 머리카락 뭉텅이를 쥐고 잼잼이라도 한번 해보고 싶었다. 등 터진 슈크림처럼 크림 대신 꽃 향을 뿜어내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며 손을 뻗었다.

남의 머리카락, 그것도 덥석 잡으면 곤란한 상황으로 오해할 수 있는 반묶음 된 머리를 실제로 잡으려 한 건 아니다. 손을 뻗은 건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고 머리카락 특유의 야들한 감촉이 닿으면 화들짝 놀라 멈췄을 터다.

“아.”

감고 있을 때는 예쁜 눈 선이 예고 없이 번쩍 떠지며 사나운 눈매가 만들어졌다. 도웅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다 실패한 생쥐처럼 깜짝 놀라 몸이 굳었다.

어희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옆으로 향했다. 모호하게 허공을 맴도는 도웅의 손과 티라미수 케익을 번갈아 쳐다본 후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깨우기 전에 깨서 다행입니다. 이거만 먹고 가야겠어요.”

접시에 올려진 포크를 들어 케이크를 떠먹는 어희의 입술을 신경 쓰며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안… 드시고 바로 가셔도 돼요.”

다행히 어희는 도웅이 잠을 깨워주려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도웅은 그런 어희의 착각을 굳이 정정해주지 않았다.

어희가 좌우로 가볍게 머리를 털어내자 뒤통수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동그랗고 포실한 반묶음 머리도 함께 흔들렸다.

“달달한 향에 깼어요.”

복숭아 향 로션에 꽃 향이 짙은 샴푸를 쓰는 어희 다운 대답이다. 마저 먹으라고 접시를 밀어줬다.

“저, 사장님.”

빠르게 한 조각을 해치우고 남은 케이크에 포크를 푹 찌른 어희가 도웅을 불렀다.

“네?” 

도웅은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찔리는 게 있는지라 살짝 쫄렸다.

“…….”

“…….”

사람 긴장되게 뜸 좀 들이지 마.

페퍼민트 티를 마시며 힐끔 어희를 쳐다봤다. 그는 정지된 비디오처럼 케이크에 포크를 꽂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왜 불러요?”

다시 한번 묻고 얼음을 와작와작 먹었다. 과연 천 오백만 원짜리 제빙기에서 나온 얼음답게 단단하고 차가웠다.

그렇게 건강한 치아를 자랑하며 얼음을 두 개째 건져 먹고 있는데 한참이나 뜸을 들이던 어희가 드디어 신기하게 생긴 입을 열어 말을 꺼냈다.

“사실은…….”

가뜩이나 느긋하던 어조는 유독 더욱 느긋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느린지, 도웅은 손가락으로 괜히 이슬이 맺힌 찻잔을 쓸었다. 어쩌면 꺼리는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

“제가 리뷰를 달아드린다고 했잖습니까.”

맞다, 리뷰! 

오늘 하루가 워낙 다사다난해서 잊고 있었던 본래 목적이 떠올랐다.

혹시 오늘 어희둥둥이 마음에 들지 않아 리뷰를 달아주지 않을 테니 시간 낭비하지 말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네에. 그랬었죠….”

혹시라도 그가 리뷰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할까 봐 불안하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숨기고 각오를 다졌다.

어떻게 해서든 받아내고 싶다. 오늘 하루 동안 새로 등록된 리뷰만 하더라도 수십 개였으나 도웅이 원하는 리뷰는 눈앞의 남자가 양손에 핸드폰을 쥐고 적어주는 글이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사장님이 조건으로 내세운 어희둥둥이란 거 기껏해야 서비스 챙겨주는 정도에서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녁 식사에 내일은 전시회 관람, 모레는 쇼핑. 일정이 데이트 코스 같아서 불쾌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불쾌하다는 말에 도웅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쾌해? 마음껏 어희둥둥을 만끽한다고 해놓고? 왜? 단순히 서비스만 챙겨주는 거면 지금까지 해 온 거랑 뭐가 다른데? 데이트는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만나서 시간을……

아. 이 사람 나 좋아하지…. 내가 또 실수한 건가? 

도웅의 뇌리로 갖은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리뷰 받겠다는 일념 하나로 어희를 불편하게 만든 자신이 스스로 봐도 썩 곱게 보이지 않았다. 

어장이 뭐 특별한 건가? 그럴 마음과 의도가 아니었다고 한들 남들이 보면 내가 하는 행동이 어장이다.

“죄송해요. 그……, 마음껏 만끽하신다고 하셔서….”

자괴감으로 얼룩진 채 우물쭈물 내놓은 대답은 더욱 형편없었다. 이딴 말이나 할 거면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낫겠다 싶어, 도웅은 한 손으로 얼굴 하관을 감쌌다.

“아. 그건 심술이었습니다. 디저트로 협박하시기에 징그럽게 굴어보자 싶었죠. 물론 제 성격상 불가능이었습니다. 속이 안 좋아져서. 구역질까지 했잖습니까.”

비로소 어제 그가 보인 기괴한 행동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본인이 한 말에 비위가 상해, 변기에 헛구역질까지 하는 눈앞의 남자는 솔직히 어이없는 건 둘째치고 신기했다. 행동 하나하나가 이렇게 신선한 사람은 처음 봐서. 일부러 이렇게 하라 그래도 못할 거 같은데.

케익에 꽂은 포크가 부드럽게 내려가며 뾰족한 끝부분을 뭉갰다.

“어쨌거나 드리고 싶은 말은… 리뷰를 달아드리는 시일이 늦어져도 괜찮겠습니까?”

“어째서요?”

불쾌하다며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도 이상할 게 없는데, 늦게 달아주겠다는 말은 순수하게 호기심이 일기 충분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시선을 마주했다가, 황급히 입을 막은 손가락 사이를 좁혔다. 제대로 막지 않았더니 그새를 못 참고 또 입이 방정이다.

“고작 리뷰 때문에 사장님과 얽히고 싶지 않았는데, 오늘 깨달았습니다. 사장님이 저를 계속 만져줬으면 좋겠습니다.”

“…….”

남들보다 관찰력과 눈치가 뛰어난 도웅에게 이 뜬금없는 해괴한 소리가 진심이라는 걸 알아채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벙쪘다.

만져줘? 다 큰 성인이 쓰담쓰담해 주기를 원하는 건 아닐 테고 이런 변태적인…….

도웅은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졌다. 주먹을 불끈 말아쥔 건 덤이었다. 리뷰를 받기 위해 눈앞의 남자, 어희를 ‘은밀한’ 손길로 어루만지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대놓고 만져달라는 말을 듣는 건 처음이라, 당혹스러운 동시에 화가 치밀어 제대로 된 사고가 되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뻐끔거리자 어희가 갑자기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아! 이상한 뜻이 있는 게 아니니까 오해 마세요. 절대 야릇하게 만져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기어이 본인 입에 ‘야릇하게’를 올리는 어희의 얼굴에 주먹을 냅다 꽂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이상한 뜻이 아니면 뭔데? 만져줬으면 좋겠다며.

“…주먹으로 만져드릴 수는 있을 거 같은데 어디가 좋을까요?”

“정말! 그런 의도 아닙니다.”

평소와 달리 약간 언성이 높아진 그는 자신을 변호하듯 말을 이었다.

“제가 어휘력이 매우 부족해서 오해를 살만했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런 음침한 의도는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특유의 덤덤한 어조 때문에 호소력은 없었으나 눈빛이 억울함을 듬뿍 달고 있었다. 그래도 도웅이 미심쩍은 시선을 거두지 못하자 어희가 덧붙였다.

“제 말에 거짓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촉촉한 티라미수를 평생 포기해도 좋을 만큼 진실입니다.”

어희는 포크 끝에 달린 케익 조각을 보란 듯이 입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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