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희가 디저트를 좋아한다는 건 다른 누구보다도 도웅이 더 잘 알았다. 지난 1년 365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주문을 해주던 단골이었으니까.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면 일단 들어주긴 해야 할 것 같았다.
도웅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럼 어떤 의도인데요.”
어희는 우물대던 티라미수를 꿀꺽 삼킨 뒤 대답했다.
“트럭에 부딪힐 뻔할 때 사장님이 구해줬잖습니까. 그때 저한테 사장님 기운이 옮았습니다.”
“…….”
이건 또 무슨 신박한 소리인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기운이 참 좋으세요~ 소리를 늘어놓는 사이비는 아닐 텐데. 뿌리 깊은 내 단골손님이 알고 보니 사이비 교주?
“아. 기운이 아니라, 사장님의… 긍정적인 마인드를 닮고 싶다는, 그런 뜻이었습니다.”
나 그렇게 긍정적인 편은 아닌데? 아닌가? 생각해보면 부정보다는 긍정에 더 가깝긴 하다. 그렇다 한들 만져달라는 건 좀…….
“만져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가까이 있고 싶다는 뜻이었으니까.”
눈치가 아주 없어 보일 때가 있는 반면 지금처럼 곤란한 상황일 때는 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기가 막히게 캐치를 해낸다.
눈치 좋은 사람은 일부러 눈치 없는 척을 한다던데, 어희가 딱 그런 타입이 아닐까?
도웅의 안에 새로운 의심이 자리를 잡자 ‘만져 달라’에 대한 오해는 옅어졌다.
“그런 거라면 믿을게요. 앞으로 오해하게 말하지 마요.”
“후….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심하는 기색을 띤 어희가 차분히 커피를 마셨다. 드디어 찾은 안정이 기쁜 거 같기도 했고 오해를 풀어서 마음이 편해진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둘 다.
도웅은 그런 어희를 유심히 지켜봤다. 그의 퇴폐적인 인상과 신기하게 잘생긴 외모에 관심이 생겨서는 아니었고 사람 자체가 궁금해졌다.
단순하게 사는 만큼 타인을 보는 눈도 단순하기 그지없는 도웅의 호기심을 이토록 자극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리뷰는 왜 늦어져요?”
긍정적인 걸 닮고 싶은 거랑 리뷰랑 대체 어떤 관련이 있다고?
옅은 미소를 어색하게 지은 어희는 입에 있는 케이크를 마저 넘긴 후 늦게 대답했다.
“홀랑 리뷰만 챙기고 가실 거 같아서요.”
이 무슨 선녀 옷 훔친 나무꾼 마인드란 말인가.
“에이. 안 그럴게요. 리뷰 달아주세요.”
노골적으로 요구하자 이번에도 고개를 살랑살랑 저은 어희는 포크로 접시 바닥을 말끔하게 긁어먹었다. 그리고는 남은 한 모금의 커피를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고 잘 마셨습니다. 이만 가볼게요. 내일 전시회 몇 시에 갈 건지는 연락 주시고 안 받으면 바로 올라오셔도 됩니다.”
도웅은 미련 없이 코트를 챙겨 나가는 어희의 뒷모습을 맹하니 쳐다봤다.
뭐 저리…… 쿨해? 아니, 단호하다고 말하는 게 더 나으려나?
창밖으로 어희의 모습이 멀어진 뒤 도웅은 남은 얼음을 마저 씹어 먹고 빈 접시와 잔을 주섬주섬 치웠다.
* * *
다음 날 어김없이 어희에게 커피가 담긴 종이가방을 넘기며 은밀하게 물었다.
“오후 두 시 괜찮아요?”
묵직한 종이가방을 넘겨받은 어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흡사 비밀리에 불법적인 거래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러면 이따 봐요.”
도웅은 타고 온 엘리베이터가 내려 가버릴까 봐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자 등 뒤에서 속삭이듯 작은 외침이 들려왔다.
“저기……!”
뒤를 돌아보자 어희가 어색한 표정으로 목을 매만지며 말했다.
“아침 안 드셨으면 드시고 갈래요?”
도웅은 거절의 의미로 손을 내저은 뒤 먹는 시늉을 해 보였다.
‘먹었어요……!’
어희는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웅이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까지 어희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제보다 밝아진 모습은 왜인지 적응이 안 되는 한편, 귀여워서 낯설었다.
“음음~ 음~”
도웅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게로 복귀했다. 로얄 골드 펠리스 3201호 배달 전용으로 쓰이는 전동 킥보드를 창고에 넣어 놓고 헬멧을 벗는 도웅을 유심히 보던 직원 영호가 다가와 물었다.
“무슨 좋은 일 있어요?”
그러면서 추천해준 양꼬치 집 평가를 궁금해하기에 5점 만점에 4점을 선사했다.
“저 다음 주 목, 금요일 쉽니다. 주말은 제리가 쉬고요. 수빈이는 다다음 주에 상황 봐서 쉬겠대요. 준영이는 안 쉰답니다.”
원두 발주를 넣고 시간이 남아 온라인 소품 삽을 훑고 있는데 갑자기 영호가 휴무 스케줄을 줄줄이 읊었다. 아예 작정한 듯 그의 손에는 작은 수첩까지 들려있어, 일단 들으며 눈만 깜박였다.
모든 직원의 이름이 한 번씩 영호의 입에 오를 때마다 몇 번이나 끼어들고 싶어, 입술을 달싹이기를 반복했다. 탁, 수첩이 덮어지고 나서야 계속 궁금했던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다 알겠는데 갑자기 다들 왜 쉬어?”
내가 쉬지 않는다고 해서 직원 휴무까지 압수하는 악덕 사장은 아니지만, 정해진 요일이 아닌 다른 날에 쉬는 걸 보고 받는 건 조금 어리둥절하다.
나한테 추가 휴무라도 맡겨 놓은 줄 알겠네.
“다음 주 설날이잖아요.”
……맡겨놨구나. 벌써 그렇게 됐나?
구석에 놓인 탁상 달력을 보자 정말로 다음 주 수요일부터 설날 연휴였다. 주말까지 끼어있어, 무려 5일의 공휴일이었다. 앙증맞게 별표까지 쳐놓았으면서 이걸 잊고 있었다.
“사장님은 집에 안 가요?”
“아. 완전히 잊고 있었어.”
“집이 어딘데요? 지금이라도 ktx는 무리더라도 버스는 좌석 남아있지 않을까요?”
“으음.”
도웅은 조금 음울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대한민국에 살면 차라도 운전해서 가겠다만, 부모님 두 분은 해외에 계셨다.
뉴욕까지 버스를 타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인데 이걸 어쩐담.
도웅이 부모님을 뵙지 못한지 비공식적으로 5년째였다. 4년 전에는 기나긴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3년 전에는 창업 준비로 뉴욕까지 갈 겨를이 없었다. 2년 전에는 하필 케이크 대량 주문이 들어와서 못 갔다. 작년에는 부모님이 오지 말라 해서 곧이곧대로 안 갔더니, 서운하다는 말을 잔뜩 들은 터라 이번 명절에는 꼭 가기로 했는데 큰일 났다.
“아이고 두야.”
하필이면 지난번에 설날에 보자며 큰소리를 떵떵 쳐놓은 게 문제였다.
차라리 다른 형제가 있었더라면 나았을지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도웅은 외동이었다. 그것도 세 번의 시도 끝에 인공수정으로 힘들게 얻은 귀한 자식.
“알아봐 드려요?”
자신만만하게 고속버스터미널 어플을 여는 영호에게 기어가는 목소리로 간곡하게 부탁했다.
“뉴욕행 비행기…로 부탁해.”
장소를 듣자 영호는 바로 핸드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 넣고는 “화이팅~” 하며 자리를 떠났다.
“표 구할 수 있으려나.”
머리를 쥐어짜며 일단 마우스를 잡았다.
해보자, 도웅. 분명 한 자리 정도는 남아있겠지. 남아있을 거야.
아웃파크부터 온갖 항공사 사이트를 모두 뒤지기 시작했다. 수요일, 아니 화요일부터 차근차근 찾았다. 수십 분이 지나고 난 뒤 한숨과 함께 얼굴을 문질렀다.
없다. 없어.
이코노미석은 물론이고 비즈니스, 퍼스트 클래스까지 남은 좌석이 없었다. 월요일부터 추석이 끝나는 주까지 한 장의 티켓도 건지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서 못 간다고 말해야 하나. 지난 명절에도 섭섭해하던 목소리가 귀에 아른거려 도저히 통화 버튼이 눌리지 않았다.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가 항공사 어플 서너 개를 설치했다. 한 명 정도는 사정이 생겨서 비행기 표를 취소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서.
“사장님 퇴근 안 해요? 오늘 점심때 간다면서요.”
“지금 퇴근이 문제가……. 아. 맞다.”
쭈구리 모드로 변해서 항공사 어플을 번갈아 가며 새로고침을 하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한시 오십 분.
“늦겠다, 늦겠어.”
벌떡 일어나 노트북을 정리하고 스텝룸으로 호다닥 들어간 도웅이 다시 나올 때는 외투에 한쪽 팔만 끼워진 채였다.
“마무리 좀 잘 해줘. 나 먼저 갈게!”
“예, 들어가세요.”
“맞다, 맞다. 생크림이랑 우유도 추가 발주 넣어야 하는데! 아씨. 이따 다시 와서 해야겠네.”
도웅은 빠른 걸음으로 가게를 나왔다가 핸드폰을 캐비닛에 둔 게 생각나 되돌아왔다. 그러나 스텝룸을 뒤져도 보이지 않던 작은 핸드폰이 외투 주머니에서 진동했다. 나사 빠진 자신의 행동에 작은 짜증을 부리며 밖으로 나왔다.
덕분에 로얄 골드 펠리스에 도착한 시간은 약속 시간보다 십 분이 지나있었다. 어희는 어제와 비슷한 차림새로 정문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등을 손가락 끝으로 노크하자 화들짝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늦어서 미안해요. 오늘따라 정신이 없어서…. 전화는 왜 안 받아요?”
도웅의 말에 어희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고는.
“무음이었군요. 괜찮습니다. 별로 늦지도 않았고. 이동할까요?”
도웅이 고개를 끄덕이자 어희가 정문 앞에 세워져 있는 검은색 택시로 향했다. 도웅이 오기 전부터 서 있었던 것 같으니 어희가 잡아 놓았나 보다.
문을 열어주고 눈짓하기에 냉큼 올라탔다. 뒤이어서 탄 어희가 문을 닫았다.
“어제는 잘 들어갔어요? 잠은 좀 주무셨고요?”
“예. 사장님도?”
“저야 늘 잘 자죠.”
대답하면서도 손은 여전히 항공사 어플을 새로고침 중이었다.
“저 확인할 게 있어서 핸드폰 좀 손에 들고 있을게요. 근데 귀는 열려있어요.”
어플 여러 개를 돌리는 중간중간마다 어희를 쳐다봤다. 택시 안에서 붙어 앉아 있다 보니 그의 느슨하게 묶인 머리카락에서 나는 꽃 향이 더욱 짙게 후각을 자극했다.
“전시회 보고 점심 겸 저녁이나 먹을까요? 갑자기 허기져요.”
“예, 그러죠. 그런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어떻게 알았지!
도웅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어희는 변명하듯 띄엄띄엄 대꾸했다.
“초조해 보여서. 큰일이라도, 난 사람처럼.”
“티 나요? 와. 티가 날 줄은 몰랐는데.”
손가락은 여전히 새로고침 중이었다.
“이번 명절에 부모님 뵈러 가기로 했는데 당장 다음 주가 설날인 걸 잊고 있었지 뭐예요. 덕분에 지금 항공사 다 뒤지고 있어요.”
“항공사?”
“네. 부모님 두 분 모두 뉴욕에 계시거든요. 분명 한 명쯤은 취소할 법한데 아까부터 이 짓 반복 중이에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한 달 전, 아니 최소 이 주일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면 좌석 하나쯤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