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토끼끼, 뉴욕 가다
어희는 오랫동안 국내외 미니어처 업계를 꽉 잡고 있는 하우스 에이전시의 전속 작가였다. 하지만 에이전시 전시회에 방문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매년 열리는 행사였으나 그간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로 다른 작품에 관심이 없었고, 둘째로 전시회를 연다는 핑계로 본인의 작업실에 낯선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작품들을 탈탈 털어가니 좋게 보일 리 없다.
전시회가 끝나면 돌려주기는 한다만 제 위치에 정리하는 일은 오롯이 어희의 몫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전시회는 늘 귀찮은 연례 행사 같은 것이었고 굳이 걸음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 어희는 흐뭇하게 시선을 내렸다.
눈앞에서 머쓱함을 뽐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남자. 사랑해 마지않는 디저트 카페의 사장님.
“아하하……. 여기도 토끼끼, 저기도 토끼끼……. 토끼끼 천국이네요.”
예상하지 못했다는 양 무안한 웃음 짓는 사장은 여전히 몽실몽실한 색을 띠고 있었다. 다만 평소와 달리 걱정도 함께 보였는데 아마 택시 안에서 말한 항공권 문제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돈이나 시간이 없는 거라면 해결해 줄 수 있을 텐데 자리가 없는 건 어희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갖은 컨셉과 배경이 어우러진 작품을 보는 사장을 구경하며 함께 고민해봤음에도 마땅히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함께 항공사 새로고침이라도 해 줄 요량으로 핸드폰을 꺼냈는데 갑자기 누군가 어깨를 두들겼다.
“어희 작가님? 이럴 수가. 진짜 작가님이네요! 멀리서 보고 긴가민가했어요. 어쩐 일이세요? 원래 전시회에는 잘 오지 않으셨잖아요.”
담당 팀장이 빙긋 미소를 매단 채 서 있었다.
“아…….”
우글우글한 후회와 우울이 곰팡이처럼 몰려 있었다. 깜짝 놀라 반걸음 물러선 후 짧게 인사를 했다.
웬만하면 모든 업무를 이메일이나 전화로만 해결하는지라 이렇듯 얼굴을 보는 건 삼 개월 만이었다.
“아무튼 다행이에요. 마침 연락을 드리려던 참이었어요. 잠깐 이야기 괜찮으시죠?”
반걸음을 물러났더니 한 걸음 성큼 다가오는 팀장이 껄끄러웠다. 정확히는 그의 감정이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빛으로 이동하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다 보니 어느새 토끼끼 정글을 보고 있는 사장과 팔이 부딪쳤다.
“제가… 손님이랑 함께 온 거라 공적인 이야기는 하고 싶지…….”
바로 어제, 과일 트럭에 부딪치려던 순간 도웅이 팔을 잡아주었다. 덕분에 어희의 팔에도 도웅의 기분 좋은 뭉실한 감정이 묻어 오래도록 지속됐다.
이번에도 그가 만져주면 이런 두려운 기분은 금방 사라질 텐데.
“저는 괜찮아요. 이야기하고 오세요.”
하지만 배려심 많은 도웅은 그런 어희의 마음 따윈 눈치채지 못한 채 괜찮다며 씩 웃었다. 어희는 더듬더듬 말을 뱉었다.
“아, 아니……. 제가 하고 싶지가….”
“그러면 작가님, 잠시 이쪽으로.”
예고 없이 팀장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깜짝 놀란 어희가 홱 팔을 뺐더니 팀장이 놀란 눈으로 작게 사과를 했다. 그러나 이미 잡혔던 손목은 곰팡이같이 기분 나쁜 감정이 슬쩍 내비쳤다가 사라졌다.
그것이 심히 불쾌해서 당장 사장에게 달려가 손목 좀 잡아달라 하고 싶었으나 이상하게 보일 게 뻔해 그러지는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할 이야기가 뭡니까?”
“이번에도 거절하실 거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말씀이라도 드려보고 싶어서요.”
뭐길래 팀장이 이렇게까지 조심스럽나, 의문이 먼저 들었다. 그다음은 약간의 불안감.
“외국 브랜드 호텔에서 토끼끼 시리즈로 광고를 진행하고 싶다고 해서요. 물론 제작은 작가님이 원하시는 대로 진행하셔도 됩니다. 하나도 터치하지 않을 거예요. 그쪽에서는 항공권부터 호텔 룸까지 모두 책임진다고 해요.”
광고 효과가 미미한 미니어처 제작자에게 과분한 대우였다. 그러나 어희에게 있어서 토끼끼는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캐릭터이긴 하나, 어느 창작자나 그렇듯 자식 같은 존재다.
“아, 하. 요새 너무 바빠서 광고까지는 못 받을 것 같습니다.”
토끼끼도 다를 바 없었다. 토끼끼가 탄생하게 된 계기는 약간 어두웠으나 어쨌든 지금은 자식이라는 상징성보다 더 나아가 어희가 가보지 못한 곳을 대신 가고 그곳에서 즐겁고 행복한 감정 속에 사는 캐릭터다. 그런 캐릭터에게 콜라보가 아닌 광고는 어울리지 않아 항상 거절했었다.
팀장이 이메일로 보내지 않고 직접 구두로만 일러주는 이유도 여태 광고를 거절해와서 일 게 뻔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뻔하게 거절을 놓으며 사장에게 돌아가려 하는데.
“그렇죠? 일 년 전 프랑스 토끼끼 퀄리티가 워낙 좋았던지라 호텔에서 관심을 두고 있었나 봐요. 물론 다른 토끼끼 작품도 무척 좋지만요. 그래도 이번에는 뉴욕인데 어떻게 안 되겠죠? 하하… 하. 토끼끼는 이번에도 제일 인기가 많네요.”
한 걸음을 떼기 무섭게 ‘뉴욕’이라는 말에 발이 멈췄다. 어희는 시선을 들었다. 저 멀리서도 눈에 띄는 밝은 도웅은 지금도 핸드폰을 손에 들고 있었다.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항공사를 새로고침하고 있는 중인 거 같았다.
“으음.”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자 뒤에서 팀장이 “작가님?”하고 불러왔다.
어희는 한숨을 삼키고 고개를 올려 전시회장에 매달려있는 심플한 조명을 쳐다봤다. 아니. 정확히는 눈을 감고 저울질을 했다.
어차피…, 설날까지는 아직 기간이 남아있으니 한 명쯤은 항공권을 취소할 게 뻔하다. 저렇게 미친 듯이 새로고침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구하지 않을까?
“…….”
사장의 성격으로 봐서는 아마 잠도 자지 않고 새벽까지 저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하다. 무엇이든 과하게 노력하는 사람이니까 못할 것도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희는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잠을 자지 못하면 피곤할 테고 피곤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그러면 내가 받을 디저트도 부정적인…….
“이번 설날에 가능합니까?”
도웅의 우는 소리에 어희는 “아… 하….” 같은 영혼 없는 감탄사를 내놓았다.
“어희 씨는 설날에 뭐해요? 집에 내려가나요?”
“아뇨.”
“부모님이 서운해하시지 않아요?”
“네. 서로 없는 사람 취급하기로 해서 괜찮습니다.”
쉽게 할 법한 질문에 이런 무거운 대답이 나올 줄 꿈에도 몰랐던지라 도웅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자식과 부모 관계가 그렇게 끊어질 수 있나, 싶다가도 자신이 참견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그… 렇구나.”
택시 안은 금세 정적에 휩싸였다.
도웅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했고 어희는 원래 수다스러운 성격이 아니었다. 어색한 기류는 운전석까지 영향을 끼쳤는지 택시 기사가 헛기침을 하며 은근슬쩍 말을 건넸다.
“흠흠. 자식이 그러면 부모님 속이 말이 아니시겠구먼.”
혼잣말같이 흐릿하게 흘러나온 말은 불행하게도 뒷자리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어느 때와 비슷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깐 어희는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묵묵히 말을 아꼈다.
당사자가 아닌 내가 사정도 모르면서 그런 말 하지 말라, 성을 내기도 모호하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어희를 부추겨 화를 내라 종용하는 것도 이상하다. 결국 택시 문을 세게 닫는 것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차 문에서도 쾅 소리가 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된 지금. 뒤에서 창문을 열고 뭐라 뭐라 소리치는 기사를 무시하고 멍하니 있는 어희의 팔을 잡아끌었다. 돌계단을 성큼성큼 오르며 열을 식히고 있는데.
“왜 화났습니까?”
한 계단 아래에서 뒤따라오고 있던 어희의 목소리에 뚝 걸음을 멈췄다.
“안 났는데요?”
내가 왜 화를 내? 단순히 기사의 말이 불편했을 뿐이지 화가 난 건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남의 가정사 참견 말고 운전이나 똑바로 하시라, 언성을 높이고 싶었으나 이제 보지 않을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 참았을 뿐이다.
“혹시 제가 말실수라도 했습니까.”
“전혀요. 화 안 났다니까요.”
사뭇 걱정하는 말과 함께 아래로 내리깐 시선은 어딘지 시무룩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사실은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다고 인정하기로 했다. 반곱슬의 복실한 뒷머리를 문지르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희 씨 때문이 아니라 기사님 때문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부모님 속이 어쩌고저쩌고하잖아요. 모르면 나처럼 가만히라도 있든가.”
험담으로 좋지 않게 보일세라 마지막 말은 꿍얼꿍얼 기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일일이 신경 쓰면서 살기에는 피곤하잖습니까. 어쨌든 저 때문에 화 나신 게 아니라니까 다행이에요.”
“다행이랄 거까지야…. 그나저나 전시회 오랜만이라서 조금 설레요.”
대화 주제를 옮기며 티켓을 끊기 위해 지갑을 꺼내는데 어희가 또 나서려 했다. 도웅은 흔히 강아지를 진정시키는 훈련사처럼 행동했다. 손바닥 대신 지갑을 내보였다.
“제가 낼게요.”
“티켓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어희의 손에는 티켓 두 장이 들려있다.
미리 티켓을 사놓은 건가?
뼈대가 굵은 기다란 손가락 아래, 손금이 패인 커다란 손바닥에 있는 티켓을 도웅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눈치챈 듯, 어희가 덧붙였다.
“받았습니다. 들어가죠.”
아. 동종업계인 걸 생각해보면 납득이 간다.
도웅은 자신 있게 꺼내든 지갑을 주머니에 도로 찔러 넣고 어희를 따라 전시회장으로 들어갔다.
어째서인지 몽블랑 어희둥둥을 제외하고는 모두 완벽한 성공을 이루지 못한 느낌이 들었으나 어제 어희가 한 말을 떠올리고는 조급함을 거뒀다.
완벽히 성공하든, 실패하든 당장 리뷰는 나오지 않는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써주겠지 싶다. 최소 2년 동안 애달프게 기다렸으니 조금 더 기다리는 것쯤이야 별거 아니다.
“…….”
사실은 당장 갖고 싶다.
리뷰, 리뷰, 리뷰…….
도웅은 전시회장으로 들어가는 어희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바짝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