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90)

참 친화력도 좋다. 그 또한 사장답다고 할 수는 있으나 가끔은 신기했다.

“어떤 사람입니까?”

“한 이 정도쯤 오는? 귀여운 친구예요.”

키를 가늠하는 사장의 손이 본인 허리보다 약간 아래로 내려가는 걸로 봐서는 어린아이인 모양이다. 그도 아니면 커다란 대형견.

“여하간 얼른 와서 이거 좀 봐봐요.”

테이블에 올려놓은 종이가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도웅의 감정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다. 일전에도 비슷한 색을 띤 적이 있었는데, 바로 로맨스 파티를 보내왔을 때다.

도웅의 감정에 동화되어 어희도 괜한 떨림을 느꼈다.

이게 대체 뭐길래 이렇게 번쩍번쩍하나. 케이크 상자를 열자 둥그런 원형 케이크가 나왔다.

“이건…….”

모래사장처럼 밀색으로 아이싱 되어있는 케이크 위에는 실물 같은 조개껍데기와 소라 껍데기가 장식되어 있었다. 여름이 되려면 멀었는데 벌써 바다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물물교환하니까 조개 화폐가 생각나서 만들어봤어요. 별스타 용으로도 맞춤이지 않아요? 그래도 맛은 있어야 하니까 드셔보세요.”

어희둥둥이 아닌 물물교환을 하러 온 모양이다. 친절하게 포크를 손에 쥐여주는 도웅의 기대에 못 이겨 어희는 케익 가장자리에 포크를 찔렀다.

덩달아 함께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한 입을 먹었다. 진하지 않은 연한 모카 향과 눅진한 크림이 혀에 찰싹 달라붙었다. 떡케이크도 아닌 것이 쫀득함을 뽐내며 입안에서 강한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도웅이 만든 건 늘 그랬듯 달콤하고 최고였으나 이번에는 약간 달랐다.

“으음.”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심란하게 미간을 좁히고 포크 질을 이어가다가 조개껍데기 모양의 초콜릿을 집어 먹고 나서야 깨달았다.

진한 커피시럽이 들어간 초콜릿 장식과 무거운 시트는 딥하다. 사장이 항상 가벼운 디저트만 만드는 건 아니었으나 이렇게 묵직함을 주는 디저트는 거의 처음이기에 사장과 시선을 마주했다.

“어때요?”

사장은 눈을 빛내며 감상을 원하고 있었다. 요거요 리뷰 만큼이나.

“맛있긴 한데……. 무거워요.”

이 정도면 충분한 감상이 되었으리라.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있는데 사장은 여전히 반짝거리며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

더는 해 줄 말이 없는데도 시선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억지로 입을 열었다.

“맛이며 식감이 딥한 게 어른용 디저트 느낌? 어쨌든 맛있긴 한데 아무리 저라도 하루에 세 개 이상은 못 먹을 거 같습니다.”

아무 말 대잔치를 하고 나자 정말로 더는 말할 거리가 없다. 딥하다 외에 더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사장이 만든 디저트이니 맛있는 건 기본 베이스로 깔고 가는 게 당연하다. 포크 질을 하다 토끼끼 굿즈를 모아 놓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번 전시 굿즈뿐만 아니라 그동안 만들어진 굿즈를 모두 담아 놔서 상자 크기는 제법 커다랗다. 사장의 관심은 케익에서 굿즈 상자로 향했다.

“와! 역시 제작자라 그런지 종류가 엄청 많네요. 정말 다 가져도 돼요?”

토끼끼 시리즈가 그려진 마스킹 테이프며 엽서, 그립톡, 스티커 같은 자질구레한 물품부터 머그잔, 담요, 무드등까지 다양한 굿즈를 구경하던 도웅이 문득 물었다.

“여기서 어희 씨 마음에 드는 건 뭐에요?”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때때로 취향을 묻는 도웅의 말은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무드등이든 마스킹 테이프든 마음에 드는 물건보다는 감정을 쫓는 게 익숙한 어희에게 그런 질문은 어려웠다. 이번에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어희를 보고, 도웅은 두꺼운 머그잔을 살피며 먼저 입을 뗐다.

“머그잔이 제일 귀여운 거 같아요. 따뜻한 차 따라 마시기 좋아 보여요.”

토끼끼 그림이 그려진 머그잔을 손에 들고 차 마시는 도웅을 상상하자 절로 미소가 지어져 어희는 그의 취향에 편승하기로 했다.

“…저도 머그잔이 제일 좋습니다.”

귓불 아래 목선이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도웅이 소리 없이 웃은 뒤 상자를 안고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아, 맞다. 쇼핑은 내일 가도 될까요? 어제 새벽부터 케익 만드느라 잠을 못 잤거든요. 내일 시간 괜찮죠?”

꾸물꾸물 신발을 신는 도웅의 뒤에서 어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하고 답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와 손끝도 스치지 못했다는 걸 깨닫고 급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러면 내일 보죠.”

잠깐이라도 그의 감정에 닿고 싶어 안달이 난 어줍잖은 행동이었다. 

못 보고 홀랑 나가버리면 어쩌지?

걱정이 무색하게도 도웅은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렸고 어희가 내민 손을 발견했다.

“네네. 내일 봐요.”

어희 손을 가볍게 그러쥐고 위아래로 가볍게 한 번 깔짝인 도웅의 몸이 덜컥 흔들렸다.

“…….”

“…….”

아. 따뜻해. 

손에서 전해져 오는 도웅의 감정 색이 전기처럼 찌르르, 찌르르 어희의 마음을 홀딱 적셨다.

간접적으로 그의 색이 묻은 디저트가 짝사랑 같은 기분이라면 직접 닿는 그의 살은 쌍방 통행처럼 느껴졌다. 

이러니 내가 리뷰를 못 써주지.

“안녕히 가세요.”

“…손을 놔줘야 가지 않을까요.”

아.

저도 모르게 꽉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희는 손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그러자 스르륵 손을 빼낸 도웅은 미련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도어락이 다시 잠기고 어희는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조금 전까지 도웅이 앉아 있던 소파 옆자리에 앉았다.

그가 집에 온 날은 늘 이렇게 색이 가득했다. 사장의 색은 한가지로 단정 지을 수 없는 편안한 온색이었다. 마냥 따뜻하기만 하냐면 그건 또 아니다. 보석처럼 반짝이기까지 한다. 이따금 화를 내거나 짜증스러울 때도 있었으나 그런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니 보면 볼수록 마음에 깊이 남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어희가 도웅이 남기고 간 케이크를 음미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짧게 두 번 진동했다.

사장인가 싶어 슬쩍 핸드폰을 봤더니 팀장의 메시지였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동행자 분의 여권 번호와……]

[이메일 확인 부탁드립니다.]

포크를 물고 곧장 핸드폰을 열었다.

어떻게 뉴욕행 좌석을 구할 수 있었는지 항공권 구매에 관한 안내가 와있었다.

도웅에게 그대로 전달하자 굉장히 기뻐하는 답신이 왔는데, 문자가 춤을 춘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쳤다.

그렇게 좋을까. 

어희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팀장에게 사장 개인 번호를 남겼다. 감이 배꼽 인사를 하는 감사 이모티콘을 함께 보내자 팀장은 몇 분이 지나고 나서 의례적인 인사말 끝에 [^^;] 표시를 붙였다.

* * *

그러나 내일도 모레도 네 번째 어희둥둥이었던 쇼핑을 가지 못했다. 배달을 시키면 라이더가 오다 보니 도웅의 얼굴을 못 본 지 어느덧 나흘째. 혹 나 말고 다른 단골에게 관심이 돌아간 건가, 불안해하기를 사흘.

도웅을 다시 만난 건 해도 뜨지 않은 새벽, 뉴욕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찾은 설날 당일이었다.

집도 가까우니 같이 출발하자 권해도 도웅은 짐이 많다며 한사코 거절해 어희는 공항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슬슬 걱정이 되었다. 도웅이 저를 피하는 것 같아서.

어희는 도웅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자신이 불편해할 만한 말이나 행동을 했는지 기억을 되짚어 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낮은 한숨을 내쉬며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반짝이는 난색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재료를 사러 갈 때도 보이지 않았던 사장이다. 기다란 크림색 롱패딩 모자를 뒤집어쓴 사장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돌돌돌 캐리어를 끌고 가까이 다가가자 사장의 몸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산만한 짐이 보였다.

과장을 더 하면 사장 키만큼 커다란 짐이 두 개나 되었다.

“아. 어희 씨. 오랜만이에요. 너무 바쁜 거 있죠. 짐도 싸야 하고 예전에 살던 본가는 그대로 비어있거든요. 거기서 가져갈 짐도 챙기느라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와중에 휴가 간 직원까지 있어서 가게는 계속 지켜야 하고 또…….”

변명이 아니라 정말 정신없이 바빴다는 걸 증명하듯 사장의 얼굴은 피곤이 짙게 깔려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감정은 여전히 설렘과 반가움이 폴폴 풍기고 있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 안 해도 다 알아요.”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럴 때만큼은 제 특이 체질이 편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사장은 동그런 눈매를 두어 번 깜박이고는.

“아니에요. 제가 얼마나 피곤하고 바빴는지 알아주길 바라서 말하는 거니까 계속 들어줘요. 아. 여기 짐 절반은 집으로 택배 보낼 거니까 안 들어줘도 괜찮아요. 금방이에요.”

어희는 묵묵히 바퀴가 달린 가방 하나를 잡아끌었다. 도웅이 거절하려 했지만 어희는 손잡이를 제 뒤로 숨기며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그동안 그거 때문에 바빴던 겁니까?” 

도웅은 금방 가방의 존재를 잊고 자신의 근황을 조잘거렸다. 뉴욕에 있다는 부모님에게 가방 하나를 통째로 택배에 보내는 와중에도 그는 “미국에서 한국식으로 설날을 챙기는 사람은 부모님밖에 없을 거예요.” 같은 불만을 늘어놓았다. 진짜로 싫은 기색은 아니었기에 어희는 적당히 “그럴 수 있죠.” 하고 맞장구를 쳤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나서 모든 이야기를 털어낸 도웅은 면세점에서 향수를 시향하며 질문 화살을 돌렸다.

“어희 씨는 형제 없어요?”

어희는 고민할 겨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와 연을 끊고 나서 따로 자식을 들인 게 아니라면 제가 아는 한 외동이다.

“예. 혼자입니다.”

“와. 저도 외동이에요. 어렸을 적에는 형제 있는 친구들 부럽지 않았어요? 싸움 나면 걔네 형이 찾아와서 어찌나 으름장을 놓던지.”

시향을 마친 도웅은 마음에 드는 향을 찾지 못했는지 디퓨저 라인으로 향했다.

이미 쓰고 있는 상품이 있는지 도웅은 익숙하게 직원을 불러 디퓨저를 구매했다. 

평소 사장에게서 나는 단내의 정체는 저거였을까. 

물끄러미 보고 있었더니 도웅이 손에 든 쇼핑백을 내밀었다.

“…….”

“…….”

딱히 어떠한 말 없이 내민 쇼핑백을 들어주고 가게를 나왔다. 한 손에는 캐리어, 다른 한 손에는 도웅의 쇼핑백이 대롱대롱.

게이트로 향하는 사이, 도웅이 뒤에서 팔을 슬쩍 잡아당겼다.

“선물이요, 선물.”

“…….”

무슨 말이지. 갑자기 선물? 기왕 온 거 선물이라도 사라는 건가? 누구 주라고?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봐도 선물을 줄 만한 사람은 눈앞의 도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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