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시 팀장은 당연히 선물을 주고받을 만큼 친하지 않으니까.
“갖고 싶은 거라도 있습니까?”
“아뇨. 그거 선물이라고요. 어희 씨한테 주는.”
그제야 어희는 제 손에 들린 쇼핑백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웬 선물이지?
“덕분에 가족 보러 갈 수 있게 됐잖아요. 고마워서요.”
“…별일 아닙니다.”
그의 감정 색이 나비 날갯짓처럼 나풀거렸다. ‘고마워요, 완전 고마워요. 짱 고마워.’ 같은 나풀거림이다. 어희는 괜스레 쑥스러워 목덜미를 쓸었다.
“이 박 삼 일간 잘 부탁해요. 저도 뉴욕은 자주 안 가서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봐요.”
도웅의 말에 어희는 물끄러미 도웅을 보았다.
부모님이 지구 반대편에 있으니 자주 가보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때문에 긴장이 된다는 말은 어딘가 이상했다. 혹시 도웅도 저처럼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어희 혼자 끙끙거리기를 십여 분.
“부모님이 뉴욕 간 지 얼마 안 되셨나 봅니다.”
“아뇨? 거진 8년째인데요.”
도웅은 그렇게 말한 뒤 먼저 게이트를 통과했다. 그런 도웅의 뒤를 어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희의 고민은 두 사람이 라운지를 거쳐 비즈니스 클래스에 나란히 앉을 때까지도 계속됐다.
가족이랑 사이가 좋지 않은 것치고는 도웅이 띄고 있는 감정이 매우 좋지 않은가. 서로 물고 뜯는 관계였으면 뉴욕으로 향하는 내내 어둑어둑해야 맞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도웅은 승무원에게 받은 담요를 덮고 누워 따로 챙겨온 도톰한 잡지를 꺼내 읽었다.
어희는 그런 도웅을 열심히 곁눈질했다. 금방 어희의 시선을 눈치챈 도웅이 눈을 마주치고 물었다.
“왜요?”
비행기 안이라는 걸 인식한 듯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어희는 어깨까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뉴욕 자주 가보신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하셔서 왜 그런지 궁금합니다.”
솔직하게 묻자 뭐가 그리 웃긴지 혼자 파핫 웃는다. 그리고는 읽고 있는 잡지 한 장을 팔락 넘겼다. 거뭇한 애플파이가 보였다.
“4년 동안 유학 갔거든요. 학교 졸업할 때까지 얼굴 볼 생각하지 말라 하셔서. 한국에 와서는 카페 창업으로 바빠서 못 가보고.”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는 코를 찡그린 사장은 최대한 멀리 두었다.
“그러면… 이번이 처음인 겁니까?”
“처음은 아니에요. 유학 가 있는 동안 가끔 뉴욕 가긴 했거든요. 부모님이 오지 말라 해도 보고 싶은 걸 어째요. 몰래 가서 봤어요.”
이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등된 비행기 안은 아늑하면서도 건조하다. 독서 등을 달깍, 켠 도웅은 다시금 눈길을 잡지로 돌렸다.
“그래도 나름 재밌었어요. 넉넉하게 일주일 머물면서 하루는 부모님 몰래 보고 나머지는 축제를 즐겼거든요.”
도웅은 그렇게 말하며 비행기 모드로 바꿔놓은 핸드폰에서 앨범을 뒤적여 찾은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지금보다는 앳된 얼굴의 도웅이 얼굴에 색색 물감을 묻히고 개구진 웃음을 띠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둥그런 불꽃까지 터지고 있다. 사진마다 옆에 붙은 사람이 모두 다른 게, 누가 봐도 끝내주게 축제를 즐긴 모습이다. 주된 목적은 축제였고 겸사겸사 부모님을 몰래 뵈러 간 게 분명하다.
“여하간 그랬답니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거의 8년 동안 아들내미를 못 봤으니까 이번에는 꼭 가야 했거든요.”
“…….”
“그렇다고 어희 씨를 내팽개치지는 않을 거니까 걱정 마세요. 맡은 임무 확실히 할게요.”
어희는 비장하게 주먹을 쥐어 보이는 도웅에게서 눈을 돌려 비행기 천장을 멀거니 올려봤다.
어차피 나는 호텔에 박혀서 나올 일이 없을 테니 사장은 사장대로 가족과 재회의 시간이나 나누면 될 거 같다.
“체크인까지만 도와주면 됩니다. 이후는 개인 시간을 갖죠.”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쳐다봤더니 도웅은 어느새 안대까지 쓰고 잠들어 있었다. 어희는 테이블 위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잡지를 집어 덮어준 후 등을 대고 누웠다.
생각이 많아졌다. 난데없이 비행기에 몸을 맡긴 점과 옆에 도웅이 함께 있는 건 낯선 상황이었다.
도웅이 밤새 항공사 어플 새로고침을 할 게 눈에 훤히 보이는 와중에 적당한 때에 적당한 광고가 들어온 게 꺼림칙한 탓이다.
어희에게 인생은 퍼즐 조각보다는 미니어처에 가까웠다. 날 때부터 갖고 있던 퍼즐은 맞는 것 하나 없었고 그 빈 공간에는 일일이 어울리는 물건을 만들어 채워야 했다. 하지만 이번 일 만큼은 달랐다. 도웅에게는 티켓이 필요했고 어희는 그 티켓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마치 운명처럼 말이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심란함만 더해갔다. 뜬 눈에 햇빛이 들어와 무심하게 블라인드를 치려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달달구리를 먹었던가?
지독한 당 중독자 겸 당 징크스를 앓고 있는 와중에 하필 지금 비행기 안에 있다는 게 어희의 마음을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당 징크스. 듣는 이가 웃을 수도 있겠지만, 어희의 징크스는 진짜였다. 무시했다가 일이 틀어져 몸을 다친 적이 많았다.
심지어 지금은 비행기 안이지 않은가. 최악의 상황으로 추락하는 상상까지 끝내자 어희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황급히 승무원을 불러 롤 케익과 쿠키를 주문했다. 비행기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당분 주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디저트가 하나둘씩 테이블을 채웠다.
“…….”
그러나 어희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늪처럼 진득하고 거무튀튀한 감정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이 롤 케익을 누가 먹을 수 있겠는가.
눈을 꼭 감고 억지로 먹는다 한들 애초에 당만 섭취해서 될 일이 아니다. 먹고 나서 만족스러워야 한다.
이걸 어쩌나, 해답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을 무렵 옆에서 곤히 자고 있던 도웅이 담요를 꼼지락거리며 뒤척이다 안대를 슥 올렸다. 그는 잠이 덜 깬 게슴츠레한 눈으로 롤 케익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다시금 안대를 내리고 담요를 끌어 올렸다. 어희는 다급하지만 소심하게 도웅을 어깨를 흔들었다.
“사장님. 일어났으면 잠시, 저 좀…….”
도와주세요.
그러자 도웅이 벌떡 일어났다. 안대까지 아예 벗자 복슬한 머리카락에 그대로 안대 끈 자국이 남았다.
어희는 피곤에 부은 도웅의 눈두덩이가 마카롱 같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밀어내고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혹시 사장님이 만든 케익 있습니까? 아니, 간단한 쿠키나 머핀 종류도 괜찮습니다.”
그라면 갖고 있을 게 분명하다. 하나쯤은 챙겨왔으리라. 당신, 디저트 카페 사장이잖아.
미니어처 제작자라고 미니어처를 들고 다니진 않는다. 그러나 어희는 도웅이 디저트를 갖고 있기를 바랐다.
“…….”
피곤으로 부은 눈을 느리게 끔벅인 사장은 한참 후에야 잘 못 들었다는 양 “네?” 하고 되물었고 어희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가진 거 내놓으라고요?”
누가 들으면 강도를 만난 줄 오해하기 딱 좋을 법한 말을 하는 도웅에게 어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달콤한 디저트, 가진 거 없냐 물었습니다.”
정말 돈이라도 뜯는 줄 알았는지 지갑을 주섬주섬 꺼내는 손이 뚝 멈췄다.
“하나도 없는데요. 어희 씨 혼자 잔뜩 시켰잖아요. 그거 드세요.”
쓰러지듯 좌석에 다시 누운 사장은 작게.
“욕심쟁이야, 뭐야….”
하고 중얼거렸다.
내가 식탐을 부리는 돼지로 보이나.
기분이 상해 삐뚜름하게 입매를 내렸다가 얼마 전 양꼬치 가게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눈앞의 롤 케익 만큼은 아니지만, 날고기에 조미료처럼 군데군데 썩은 감정이 들러붙어 있었다. 그런데 도웅의 손을 거치자 놀랍게도 먹음직스럽게 변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사장님…. 이것 좀 드셔보세요.”
맛은 적당하기만 하면 된다. 어희가 참을 수 없는 건 겉면에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불쾌한 감정 덩어리다. 양꼬치처럼 사장이 이 색만 어떻게 해 준다면, 마법을 부려준다면 징크스를 해결할 수 있을 거 같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어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웅은 태평하게 고개만 살랑살랑 저을 뿐이다.
어엿한 디저트 가게를 운영하고 있으면 유명한 항공사의 기내 디저트가 궁금할 법도 한데 도웅은 쿨해도 너무 쿨했다.
“한 입만 드셔보세요…….”
그의 손에 동그런 쿠키를 쥐여주자 옅은 한숨과 함께 도웅은 아예 팔짱을 껴버렸다.
그래도 그의 손에 닿은 것만으로 쿠키에 묻은 더러운 감정 색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쿠키 하나를 날름 해치우고 나자 이번에는 어떻게 닿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팔짱을 끼고 누워있는 도웅의 모습은 흡사 견고한 철옹성처럼 보였다. 한치의 접촉도 허용하지 않는.
“아니면 이거라도 드…?”
롤 케익 한 조각을 도웅 입에 꾹꾹 눌렀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늘에 한 점의 햇빛이 드는 거처럼 금세 변하는 롤 케익을 먹고 새 조각을 들어 도웅의 입에 누르는 작업을 반복할 즈음.
“아 좀!”
도웅이 폭발했다.
안대를 홱 올린 도웅은 잔뜩 찌푸린 눈살로 어희의 손에 들린 롤 케익과 얼굴을 번갈아 째려봤다. 그의 감정에서 짜증과 불쾌함이 엿보였다.
“잠 좀 자자고요. 왜 자꾸 자는 사람을 건드려요. 안 먹어요, 안 먹어!”
어희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다. 자는 사람을 괴롭히고 싶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다 사정이 있었다. 만족스러운 당을 섭취 못 해서 비행기라도 추락하면 어쩐단 말인가. 그도 아니면 여권을 잃어버린다거나.
어희는 마지막으로 도웅의 입에 닿은 롤 케익을 소심하게 꾸역꾸역 베어 먹었다.
“어휴.”
짜증 섞인 한숨에 눈치가 보이는 건 최소한의 양심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마른세수를 한 도웅은 이내 입가에 크림이 묻은 걸 발견하고 물티슈로 손을 닦다가 안전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을 바라보며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 있을 무렵 도웅이 앞 머리칼을 촉촉하게 적시고 돌아왔다.
세수라도 하고 온 듯 셔츠 목 부분도 흥건하게 적셔져 있었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스킨 케어 제품을 꺼내 찹찹 바른 도웅은 이내 마스크 팩을 얼굴에 얹었다.
“세 시간만 더 자고 놀아드릴 테니까 가만히 냅둬 주세요.”
도웅의 눈길이 어희에게 향했다. 익숙하지 않은 살벌한 시선에 어희는 눈치를 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나머지는 세 시간 후에…….
아직 남은 롤 케익과 쿠키를 보자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여기서 도웅을 더 자극했다가는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