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90)

어희는 불안한 제 마음과는 달리 쾌청하기만 한 창밖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비행기 안은 창밖 보기 외에는 마땅히 할 일이 없었고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맹하니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자 옆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어희는 귀가 쫑긋 섰으나 괜히 건드려봤자 화만 더 키우는 꼴이 될까 봐 애써 무시했다.

“어희 씨. 밥이요, 밥.”

보다 누그러진 도웅의 목소리에 어희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기내식을 묻는 승무원과 같은 표정의 도웅의 얼굴에 “같은 걸로…….” 말끝을 흐렸다.

개미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를 용케 알아들은 도웅은 어희의 주문을 대신했다. 테이블을 올려 기내식 먹을 준비를 하는 도웅의 눈에 최대한 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신하게 굴었다.

밥 먹을 준비를 마치자 식전주 이후 샐러드와 안심 스테이크가 나왔다.

예상한 대로 역시나 디저트와 비슷한 색이 묻어있다. 어희는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삼키고 포크로 샐러드만 뒤적이다가 식기를 내려놨다.

“왜 안 드세요? 별로예요? 기내식치고는 괜찮은데.”

슥삭슥삭 요령 좋게 나이프로 고기를 토막 낸 도웅이 묻는다. 음식을 바꾸자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입맛이……, 없어서요.”

화가 난 사장은 무서우니까.

어희는 소심한 쭈그리처럼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무래도 비행시간 동안 물 외에는 아무것도 넘기지 못할 거 같다.

“제가 아까 짜증 내서 그래요?”

샐러드를 아삭아삭 씹는 도웅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려다 황급히 저었다.

“맞네. 뭘 아니래.”

악의 없이 흘린 도웅의 혼잣말에 약간의 설움이 몰려온다.

“아닙니다.”

그래서 애써 한 번 더 부정했다.

“맞잖아요.”

부정을 부정당했다. 도웅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희는 묘하게 지는 기분이 들어 더는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입을 꾹 닫았다.

“자는 사람 붙잡고 자꾸 먹을 거 입에 대면 누구라도 화냈을걸요. 어쨌든 가는 내내 토라져 있을 게 아니면 드세요.”

토라지지 않을 거다. 그러나 이 거무죽죽한 음식을 먹고 싶지는 않다.

“……바꿔주시면 안 됩니까?”

“…….”

다시금 도웅의 감정에 짜증이 스며드는 걸 보고 어희는 말을 취소하려 했다. 그러나 도웅은 본인이 썰은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고분고분 넘겨주었다.

“어희 씨는……, 손이 많이 가네요.”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민폐 그 자체로 보인다는 걸 알아도 당 징크스니, 감정 색이라느니 말해도 장난으로 여길 게 분명하다.

난색에 살짝 짜증이 섞인 스테이크를 먹으며 말을 아꼈다. 이번 뉴욕에서의 이 박 삼 일간 원하는 건 딱 한 가지뿐이다.

도웅과 좋은 관계로 발전한다거나 그런 건 바라지도 않고 아무 일 없이 안전하게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사리고 당을 지속적으로 먹어 징크스를 없애는 게 최선이었다. 어희는 이러한 속내를 모르는 도웅에게 왜 내 마음도 몰라주냐며 탓할 성격이 못되었다.

“심심하면 영화라도 봐요.”

감정이 눈에 보이는데 영상 속 연기에 몰입할 수 있을 리 없다. 어희는 다 먹은 식기를 대강 정리해 올려두며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아니면 잠이라도 주무시는 건 어때요? 내내 깨어 있지 않았어요?”

어희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비행기가 추락할지도 모르는데 지금 잠이 올 리 만무하다. 심지어 평소 패턴과 맞지도 않는다.

“잠은 호텔에서 잘 예정이라 괜찮습니다.”

“뭐 맨날 괜찮대……. 저 그럼 혼자 놀게요?”

불만을 비쭉인 도웅은 기내식을 먹느라 잠시 내려놨던 잡지를 꺼내 읽었다.

평온해진 도웅의 감정에 기대어 어희는 잠시 평온함을 만끽했다. 여태껏 도웅이 만든 디저트가 없었으면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색에 길들어져 있었다. 도웅이 만든 디저트는 거절하지 못할 감정 색이 스프링클처럼 듬뿍 뿌려져 있어, 아기자기하면서도 귀엽다.

사장은 본인 감정에 내가 날로 기대고 있다는 것도 모르겠지. 

어희가 소소하게 저지른 못된 짓에 가슴 떨려 하는 어린 애처럼 재미있어하는 와중에 편안했던 도웅의 감정 상태가 조금 오묘하게 변했다.

“어, 어어?”

감정을 앞서 알아챈 어희보다 한 박자 늦게 당황스럽다는 듯 탄성을 내지른 도웅은 잡지를 얼굴 가까이에 들이댔다.

대체 뭘 봤길래 저러나 싶어 어희는 기웃기웃 도웅이 보던 잡지를 들여다보았다.

잡지 한 면을 장식하고 있는 건 양식과 한식의 퓨전 요리였고 요리사 복장을 한 번듯한 남자 모델이 말갛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순진해 보이는 베이비 페이스에 덧씌워진 지긋지긋함이 훤히 보여 썩 호감이 가지는 않는다.

“왜…, 그러십니까.”

작게 벌어진 도웅의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고 페이지도 고정이 되었다. 도웅의 당황스러운 감정은 보여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어 물었더니.

“와. 얘 제 대학 동창이에요.”

“대학이라 하면 유학 갔을 때 말입니까?”

“아뇨, 아뇨. 한국 대학이요. 저는 자퇴하고 유학 간 거였고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었는데 이렇게 다 보네요. 와. 성공했구나.”

한국에서 자퇴하고 유학 가는 건 드물지 않나? 무슨 사고라도 겪은 건 아닌지 고교 자퇴생의 걱정이 앞섰다.

“이야. 신기해라.”

당황스러운 감정은 가라앉고 빈자리를 반가움이 채워졌다. 동시에 좋지 못한 기억도 함께 떠올랐는지 가벼운 분노도 엿보였다.

“이 사람 때문에 자퇴한 겁니까?”

도웅의 학생 시절이 쉬이 상상이 가지 않아, 나온 물음이다. 도웅은 뭐가 그리 웃긴 지 한동안 광대 통증을 호소할 만큼 웃어젖혔다.

답은 안 해주고 웃기만 하는 그를 한 번, 잡지 속 남자를 두 번 보고 있었더니.

“절대 아니에요. 선배들 때문에 자퇴했었죠. 요식업이 군기 장난 아니라고 듣긴 했는데 관련학과도 그런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뭐예요.”

요식업, 군기, 선배 등등 단어가 머릿속에서 합쳐지지 않고 따로 놀았다. 다음 장으로 잡지를 넘긴 도웅은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 후 여전히 웃음기 남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똥 군기가 너무 심해서 그냥 자퇴하고 유학 갔어요. 이놈은 운동하다 와서 그런지 무난하게 잘 적응했고요. 와. 인연 참 재미있네요.”

집에서만 생활하는 어희로서는 다른 사람과 맺어진 인연이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많지 않았다. 되도록 섞이지 않기 위함이었으니 불만은 당연히 없었으나 간만에 친구의 근황을 알게 되자 즐거워하는 도웅이 조금은 부러우면서도 작은 심술이 났다. 그렇게 친했으면 연락이 끊길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제가 잡지에 실려도 그렇게 반가워할 겁니까?”

물론 인터뷰에 응할 생각은 없으나 ‘만약’ 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했다. 어희의 말에 눈을 지그시 감고 “흠.”하고 얕은 숨을 내쉰 도웅은 눈을 번쩍 뜨고 수긍했다.

“당연히 반가워하겠죠? 그럼 어희 씨는요?”

만약에~ 로 시작한 대화는 대부분 돌아오기 마련이다.

“…어떤 상황인 겁니까? 이 사람처럼 사장님하고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기고 몇 년이 흐른 상황? 아니면 지금처럼 잘 지내다가 잡지에 실린 상황?”

세세하게 배경 설명을 부탁하자 도웅은 복슬복슬한 반곱슬 머리칼을 긁적였다.

“자연스럽게 멀어진 상황이요.”

사장과 자연스럽게 멀어진 상황이……, 나올 수가 있나? 일부러 피하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을 텐데.

아니면 사장보다 더 엄청난 디저트를 만들고 엄청난 감정 색을 띤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어희는 매끄럽게 상상되지 않는 상황을 그려보다, 눈을 흡 떴다.

“무, 무슨 일이에요.”

덩달아 깜짝 놀란 도웅이 엉거주춤하게 상체를 기울였다. 걱정스러운 도웅의 표정과는 별개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그의 감정 색이다. 그리고 태평하게 가상의 인물과 도웅의 감정 색을 저울질하고 있는 자신의 속내를 자각하자 죄책감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단순하게 취향이 같아서, 인상이 좋아서, 걸음걸이가 재미있어서 가까워지고 싶은 반면 나보다 잘나가서, 생긴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질투 나서 멀어지는 일도 있다.

그리고 어희는 이보다 더 단순했다. 그저 눈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감정이면 곁에 두고 싶다, 정도? 다른 사람과 보는 눈이 다르다 보니 외적인 요소보다 감정 색이 더 우선인 게 어쩌면 당연했다.

그리고 눈앞의 도웅은 어린 시절 어희가 쫓았던 빛나는 감정의 표본이었다. 조금 더 과장하자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감정만 모아놨다고 해도 좋을 보석함 같은 사람이다.

이제 와서 죄책감이 든 이유는 보다 멋진 감정이 나타나면 도웅을 홀랑 버릴 거처럼 군 속물적인 자신의 태도다.

직장이라면 조건을 따지는 게 맞다지만 인간관계는 아니지 않나.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후 점심 식사 시간이 되자 따로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도웅은 본인 기내식과 바꿔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여전히 눈에 또렷하게 보이는 휘영청 다정다감한 감정 색이 아쉬워 코끝이 찡해졌다.

도웅과 손님 관계를 넘어설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운 나머지 그날 착각해서 앞지른 고백까지 후회가 들었다. 완전히 차이지 않았다면 조금은 가능성을 재봤을 터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헷갈릴 정도로 조바심과 안타까움에 젖었다. 옆에서 도웅이 무어라 소소한 이야기를 조잘거렸으나 귓가에 겉돌기만 할 뿐 마음은 온통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다는 욕구로 가득하다.

사장과 손님 관계를 넘어서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지속적으로 만나주기만 한다면 친구 사이라도 좋다. 어희는 최소한의 양심으로 애인 자리는 포기하기로 하고 옆을 돌아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외국 영화를 보고 있었던 도웅은 어느새 잠이 들어있었다. 얼굴의 반을 가린 안대에 미처 가리지 못한 하관이 눈에 들어왔다. 

오똑한 코끝 아래에 자리 잡은 도톰한 입술을 따로 떼어내 보자 참 신기한 생김새구나 싶다. 가게 오픈하기 전에 처음 봤을 때 사장이 아닌 직원으로 오해한 이유 중 하나가 지나치게 어려 보이는 인상 덕분이었는데 지금 와 생각해보니 얼굴에 붙은 이목구비가 죄다 ‘나 동안이에요’를 외치는 듯하다. 둥그런 눈매며 말끔하니 위로 향한 콧대, 도톰한 입술까지.

가만히 오랜 시간 지켜보다 마지막 기내식이 나올 때 즈음에 도웅은 누가 깨우지 않아도 알아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하얀 그릇에 나온 비빔밥을 의욕 없이 비빔비빔하자 이번에도 도웅은 제 비빔밥과 그릇을 바꿔주었다. 따뜻한 색이 덧씌워진 그릇을 보고 그를 불렀다.

“사장님.”

사람이 아니었다면 처음 본 순간 홀랑 주머니에 넣었을 터다. 토끼끼 하우스보다 더 큰 집을 지어주고 매일매일 열 번은 넘게 들여다봤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도웅은 멀쩡히 살아 숨 쉬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옆에 두고서 음식에서 그의 감정을 느끼며 스스로 위로하는 행동이 비참하게 느껴진 탓일까. 어희는 저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저 사람의 감정이 눈에 보입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