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90)

“…….”

벌컥 내뱉은 말을 주워 담기에는 늦었으나 아직 수습할 여지는 있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날 때부터 보였습니다.”

그러나 수습하지 않았다.

당신과 내 비밀을 공유하고 싶다. 보다 더 깊은 관계가 되기를 원한다는, 유치하다면 유치한 충동이었다.

“…….”

“…….”

어희의 고백을 마지막으로 침묵이 흘렀다. 바로 옆에 앉아있음에도 도웅이 어떤 감정인지, 어떤 감정을 두르고 있는지 알기 두려워 어희는 눈을 내리깔았다.

거짓말을 한다며 웃어넘길까 아니면 시답잖은 소리라 여길까?

어쨌든 믿지 않을 거란 건 확신했다. 믿음은 공짜 나눔 행사 같은 게 아니다. 크든 작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어희 역시 많은 대가를 지불했고 지불받아왔다.

잘 익은 홍시를 주면 썩어 문드러져 흔적만 남은 접시가 돌아오는 게 대부분이었다. 처음에는 화나고 속상하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러려니 넘길 수 있었다. 초연보다는 반복된 학습에 의한 체념에 가깝다.

불신과 혐오에 익숙해졌다 한들 사람 마음은 간사한지라 도웅이 보여줄 감정이 두려워 겁먹은 병아리처럼 시선이 자꾸 아래로만 향한다.

“…….”

“…….”

그런데 이건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거 아닌가? 소음에 묻혀 제 말을 듣지 못한 건 아닌가? 

고요한 비즈니스 석에서 그럴 리 없겠지만, 긴장으로 한껏 졸여진 마음에 ‘혹시나’ 하는 추측을 곁들이자 마음이 느슨해졌다.

어희는 고개를 살짝 틀어 슬쩍 사장을 곁눈질했다.

“…….”

“…….”

혹시나는 역시나 아니었다.

놀란 듯 커다랗게 떠진 눈은 누가 봐도 못 들은 사람의 반응이 아니다. 가뜩이나 둥글둥글한 눈매를 더욱 둥글게 만든 도웅과 시선이 마주쳤다.

“…….”

“…….”

도웅은 놀란 눈을 하고서도 비빔밥을 먹고 있었다. 열심히 우물거리다 삼켜내면 새로 한 숟갈을 떠 다시 입에 넣었다. 눈길은 여전히 어희에게 고정된 채로.

먹는 데에만 사용되던 도웅의 입이 말을 꺼내기 시작한 건 비빔밥을 모두 비운 후 물까지 시원하게 마신 뒤였다.

냉수를 마시는 순간에도 시선은 제 얼굴에 고정되어있어 어희는 조금 많이, 무서웠다. 3년 전. 폭풍우를 뚫고 잔돈을 주기 위해 달려오던 때가 떠올랐다.

“오…….”

도톰한 입술이 벌어지더니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다음 말을 기다렸으나 도웅은 입술을 동그랗게 만든 후 또다시.

“오…….”

동실동실 떠 있는 감정은 여전히 따뜻한 색이다. 혹 불쾌해하지 않나 샅샅이 살펴도 평소의 색이랑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군요.”

놀란 눈은 여전한데 어조는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렇군요’를 마지막으로 도웅은 입을 다물었고 어희 또한 딱히 붙일 말이 없었기에 침묵했다. 

비행기가 뉴욕 맨하튼에 도착해 입국 수속을 밟기까지 도웅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늘이 뚫리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길쭉하게 지어진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할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한국으로 돌아갈 때 뵙죠.”

“어…….”

바로 돌아설 줄 알았던 도웅은 왜인지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고 올라왔다. 감정을 볼 수 있어도 속마음까지 읽을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그가 어떤 생각인지 몰라 어희는 눈만 끔벅였다.

호텔 측에서 미리 준비해놓은 스위트 룸 앞까지 따라온 도웅을 노골적으로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자 그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예.”

괜스레 주위를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크기를 낮춘 도웅은.

“감정이 보인다는 건 어떻게 보이는 거예요? 제 머리 위에 호기심이라고 쓰여 있나요?”

감정은 여러 가지가 합쳐진 혼합물인데 일본 만화, 죽음의 노트도 아니고 명확하게 글자로 보일 리 없지 않은가.

“아뇨. 색으로 보입니다.”

“아~ 그렇구나. 신기하네요.”

의외로 도웅은 쉽게 이해했고.

“따로 통역을 붙여줘서 크게 불편하지는 않겠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집 번호 남겨둘게요. 급한 일이나 도움이 필요하면 바로 연락해요.”

혹 잃어버릴까 봐 걱정한 건지 수첩 두 장에 같은 번호를 적어 뜯어 주었다. 숫자까지 예쁜 그는 손을 흔들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 * *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호텔 룸에 처박혀 있기를 어언 이틀째. 지루해도 이리 지루할 수가 없다. 음식은 하나같이 기름지고 짜다. 간단하게 연어 샐러드로 끼니를 대신하고 침대에 널브러진 어희는 대한민국을 그리워했다.

내일이면 비행기 탄다. 조금만 참자. 

예정된 귀국 날짜를 위안 삼으며 의욕 없이 광고 스케치를 했다.

내키지 않아 했어도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대충할 수는 없었다. 다섯 장째 윤곽만 잡아놓은 스케치도 마음에 들지 않아 연필을 내려놓고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이틀 동안 디저트 웅을 대신해서 달콤함을 채워준 벌크 아이스크림이었다.

“……달다.”

혀가 썩을 만큼 달았다. 연거푸 세 숟가락을 입에 욱여넣고 훤한 천장 조명을 올려다봤다. 조명 끝에 달린 장식은 왜인지 도웅이 만든 마들렌을 떠올리게 했다.

사장은 잘 지내려나…….

자연스럽게 도웅의 근황으로 생각의 흐름이 흘러갔다. 마지막으로 본 게 이틀 전임에도 한 이 주 동안 멀리 떨어진 기분이다.

스케치를 이어 하기 위해 다시금 연필을 들자 손끝에 선명하게 묻어있는 그리움에 기분이 좋아야 할지 씁쓸해야 할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들고 발코니로 나가 야경을 내려다봤다. 휘황찬란한 맨하튼의 야경은 눈과 마음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광고를 맡기로 한 당사자에게 호텔 측에서 야경을 권유했다는 건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일 텐데 마음에 전혀 와닿지 않았다. 대다수 고객에게 극찬을 받은 게 분명한 맨하튼의 야경보다 도웅의 색이 더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화려한 야경을 두고 무심하게 아이스크림을 퍼먹다, 어희는 문득 자신이 너무 부정적인 게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뭐만 보면 사장, 사장.

생각 끝마다 따라붙는 도웅의 존재가 기꺼우면서도 언짢다.

“어이없어.”

숟가락을 물고 지금 상황을 간략하게 내뱉었다. 답답해서 나온 건데 어째 더 마음이 답답하다. 거기다 오래 앉아 있었더니 춥기까지 하다. 날씨와 상관없이 아이스크림은 포기 못 해서 꾸역꾸역 먹고 있었더니 입술에 감각이 없어졌다.

벌크 아이스크림 절반가량을 비웠을 무렵 전화기가 울렸다. 처음에는 다른 객실 소리가 왜 여기까지 흘러들어오나, 무덤덤하게 반응하다가 뒤늦게 알아채고 침실 안으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어희 씨? 저 도웅인데요. 저녁 먹었어요?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가 이내 전화라는 걸 깨닫고 “아뇨.” 짧게 대답했다.

테이블 한쪽에 샐러드를 먹었던 빈 접시가 보였지만, 어쨌든 샐러드는 말 그대로 샐러드일 뿐 밥은 아니다. 한국인은 밥심인데 이틀째 연어 샐러드, 견과류 샐러드, 리코타 치즈 샐러드만 먹었더니 힘이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삼시 세끼 샐러드만 먹었고 지금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며 칭얼거렸으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짧아도 너무 짧다.

-일 때문에 온 거 알아서 되도록 방해하지 않으려 했는데요.

“…….”

-목소리로도 감정이 보이나요? 그러면 제 진심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저 정말로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거든요.

“…전화로는 안 보입니다.”

예전처럼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말해주면 좋으련만 도웅은 계속해서 뜸을 들였다. 답지 않게.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설마 부모님과 의견 다툼이 있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건 아닐 테고.

-우리 집에 저녁 먹으러 올래요? 부모님께 어희 씨 이야기를 했더니 엄청난 잔소리를 들었지 뭐에요. 아. 감정이 보인다는 얘기는 안 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

아까부터 ‘감정’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때마다 의식하듯 목소리 볼륨이 확연하게 작아지는 거로 보아 근처에 부모님이 계시는 모양이다.

-비행기 표가 도움받은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 호텔에 있다니까 계속, 정말로 계속 식사 초대하라셔서요. 부담스럽지 않으시면.

“가겠습니다.”

부담스러울 리가. 도웅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곧장 수락했다. 수화기 옆에 있는 펜을 들었다. 메모장에 꼬불꼬불 작은 토끼끼를 그리며 입을 뗐다.

“주소 불러주시면 알아서 택시 타고 가겠습니다.”

-아. 그냥 준비하시고 나오시면 돼요. 저 지금 호텔 로비거든요.

“네?”

-호텔 로비요. 이거 프론트에서 거는 전화였는데 모르셨구나.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준비하고 나오세요. 그래도 거품 목욕은 하지 마시고요.

거품 목욕은 안된다며 당부하는 말에 어희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일전에 빨리 준비해야 한다는 걸 잊은 채 한가로이 욕조에 물이나 받으며 기다리고 있었던 게 떠오른 탓이다.

“알겠습니다.”

순순히 대답하자 전화가 뚝 끊어졌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린 뒤 주변을 돌아봤다.

먹고 나서 방치해놓은 샐러드 접시와 커피잔이 갑작스레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반쯤 녹기 시작한 벌크 아이스크림도.

“음.”

옷을 갈아입고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뒤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점검했다. 옷이 너무 튀지는 않은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얼룩이 있는지. 거울을 보는 건 언제나 익숙하지 않았다. 무난한 차림을 한 거울 속 남자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가 금세 눈을 내리깔았다.

한층 덧씌워진 감정 색에서 설렘과 약간의 걱정을 엿볼 수 있었다. 설레는 건 당연히 도웅에게 가는 감정이었고 걱정은 왜인지 모르겠다. 뭐가 걱정되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문고리에 메이크업 카드를 걸어 놓고 룸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쾌적한 엘리베이터는 내려가는 도중에 총 네 번을 멈췄고 로비에 도착하자 어느새 꽉 찼다. 평소라면 차라리 계단으로 갈 걸, 후회할 법했으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엘리베이터에 탄 호텔 이용객은 모두 어희와 비슷한 색을 띄우고 있었다.

쉼 없이 두근거렸고 쉼 없이 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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