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희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그들이 도웅의 부모님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도웅과 비슷한 분위기며 감정을 띠고 있었으니까.
조금 의외인 건, 도웅의 목도리를 아버지가 짰다는 점이었다.
“어서 와요.”
목도리처럼 요란하면서도 따뜻한 색을 둥둥 띤 도웅의 아버지는 어희를 보고 보조개가 들어갈 만큼 환하게 웃었다. 그 옆의 어머님도 반갑게 맞이해주었는데, 어희는 그들에게 어정쩡하게 인사를 하고 집안에 들어서는 순간 눈가가 시큰해졌다. 집안 가득 채워진 감정이 해일처럼 그를 덮치는 듯해서.
“많이 춥죠? 웅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도웅의 어머니가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어희는 네. 하고 대답하면서도 복잡한 심경이었다.
도웅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따뜻하고 상냥한 감정에 둘러싸여 자랐으니 그도 같은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코트를 받아주는 도웅이나 선물로 가져온 화분을 기쁘게 받는 그의 어머니, 귀찮은 기색 없이 당연한 것처럼 오븐에서 고기를 꺼내는 아버지까지. 둘도 없는 단란한 가족이었다. 어희가 그리도 갖고 싶었던.
“어희 씨, 그릇 줘요.”
차고지를 나오면서 했던 말처럼 도웅이 옆에서 작게 속삭이고는 어희의 접시와 본인 접시를 바꾸려 했다. 어희는 그런 도웅의 손목을 잡아 식탁 아래로 내렸다.
“괜찮습니다.”
“둘이서 뭘 그리 속닥여? 어희 씨, 이것도 먹어봐요.”
어희의 앞 접시에 두툼한 살이 붙은 갈비찜이 얹어졌다. 도웅이 그걸 보고는 본인도 접시를 내밀었다. 어머니는 나이가 몇이냐며 애정 어린 타박을 했고 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도웅의 앞 접시에 갈비찜을 올려줬다.
어희는 정성껏 만든 음식으로 가득한 식탁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 화목한 가정 속에서 유일하게 어울리지 않는 건 손님인 저뿐이었다.
묵묵하게 배부른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먹고 있는 어희에게 도웅이 슬며시 귓속말을 했다.
“여기서 제가 만든 게 하나 있는데 뭔지 알아요?”
고민할 필요도 없는 수수께끼다. 어희는 입에 남은 케이크를 마저 삼키고 대답했다.
“체리 에이드요.”
“우와.”
“맞췄으니까 상으로 쿠키 가져가도 됩니까?”
내일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먹을 당을 챙길 심산으로 물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 도웅의 어머니가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마침 많이 만들었으니 갈 때 챙겨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도웅의 아버지가 거들었다.
“케이크는 필요 없나? 쿠키보다 더 맛있을 텐데.”
은근히 어머님과 경쟁을 하는 듯했다.
“케이크도 주시면 감사하게 먹겠습니다.”
어희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 케이크든 쿠키든 이렇게 멋진 색을 띠고 있는데 하나라도 더 챙겨준다면 감사한 일이다.
저녁 식사는 풍족했고 디저트는 달콤했다. 어색하긴 했지만, 나눈 대화도 즐거웠다.
도웅은 어희를 데려다주겠다며 차를 끌고 나왔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어희는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게 티가 났는지 도웅은 운전을 하면서도 어희의 기분을 살폈다. 하지만 어희는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창밖만 내다봤다. 품에 안고 있는 커다란 종이봉투에서는 도웅의 부모님이 앞다투어 챙겨준 디저트의 달콤한 향이 솔솔 올라왔다.
“체한 건 아니죠?”
“예.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벌써 세 번째 비슷한 걱정이었다. 도웅의 걱정이 진심이라는 걸 잘 알기에 어희는 한숨을 삼켜내는 대신 다른 말을 입에 담았다.
“부러워서 그렇습니다. 제 부모님은 전혀 따뜻하지 않았거든요.”
차 속도가 천천히 줄어들었다.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는 뜻인지, 아니면 편하게 말하라는 뜻인지는 몰라도 이것 또한 도웅의 배려처럼 보여 말을 이었다.
“감정이 보인다고 말했을 때가 네 살 때였나. 그날부터 안과, 신경과, 정신과 등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부모님은 제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뭐, 저라도 안 믿을 테지만.”
“…….”
“토끼끼도 여섯 살 때 처음 만든 겁니다. 정신 발달에 좋다고 어머니가 손에 점토를 쥐여주셨거든요.”
그 놀이가 직업이 될 줄은 어머니도 몰랐겠지.
어희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어쩐지 몸은 노곤하고 마음은 울적했다.
“아까 감정은 여러 색이 합쳐진 거처럼 보인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제 부모님은 썩은 귤이었습니다. 곰팡이가 잔뜩 핀. 얼굴도 제대로 못 볼 정도로 뒤덮여 있어서, 어찌나 무섭던지.”
“음.”
듣고 있다는 뜻인지 도웅은 짧은 목 울림으로 호응했다. 그러나 어희는 이어서 할 말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어희 씨 덕분에 부모님 봐서 좋았어요. 뭔가 보답할 수 있는 게 있으면 말만 하세요. 다 들어드릴게요.”
호텔이 가까워지자 도웅은 보답을 입에 올렸다. 도웅과 닮은, 요란하게 매력적인 목도리에 턱을 숨긴 채.
“그러면…, 목도리 저 주시면 안 됩니까.”
자식에 대한 사랑이 물씬 묻어있는, 도웅의 목에 둘린 저 목도리가 갖고 싶었다.
도웅의 눈썹이 위로 살짝 올라갔다가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다.
“많이 추워요? 쓰던 거 말고 새로 사드릴까요?”
“아뇨. 사장님 목에 돌돌 말려져 있는 그 목도리가 갖고 싶습니다. 아버님 사랑이 많이 느껴지거든요. 주기 싫다고 해도 이해는 합니다.”
솔직하게 털어놓자 도웅은 헤헤,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이거 아빠가 짜주신 거거든요.”
뉴욕에 오고 나서 들뜬 기분을 숨김없이 표출하는 도웅은 부모님과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어린아이가 된 거 같았다.
“이걸로 보답이 된다면 드릴게요.”
호텔 앞에 차를 세운 도웅은 제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휙 휙 풀어 어희 목에 걸어주었다. 그리고는 눈매를 둥글게 휘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봐요. 데리러 올게요.”
가뜩이나 예쁜 사람이 더 예뻐졌다.
도웅의 집에 방문했을 때처럼 비슷한 감정이 전신을 뒤덮었다. 어희는 목 아래부터 발끝까지 짜르르 번지는 떨림을 느꼈다.
“예. 조심히 가세요. 식사도 목도리도 감사합니다.”
목소리도 살짝 떨렸던 것 같다.
어희는 도웅의 차가 사라지는 걸 끝까지 지켜보다 목에 감싸진 목도리에 코를 묻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감정에 울적했던 마음에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
* * *
뉴욕행 비행기에서와는 다르게 귀국은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애초에 뉴욕으로 갈 때는 지레 불안을 느낀 어희가 수선을 피워서 도웅을 괴롭힌 것이지 어희만 얌전하게 굴면 도웅도 조용했다.
어희가 말없이 아버님이 싸준 쿠키를 오독오독 씹어먹고 있을 때 도웅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어희 씨, 어희 씨.”
주변을 인식한 듯 목소리를 낮게 깐 그에게 어희는 고개를 가까이해, 귀를 갖다 대주었다.
“손 안 필요하세요?”
멀쩡히 붙어 있는 손의 필요 유무를 묻는 도웅의 속내며 말뜻을 이해하기 어려워 눈을 깜박였다. 결국 반쯤 누워있는 몸을 일으켜 옆자리 도웅을 멀뚱히 바라봤다.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어려운 말이라 어희는 이제 제 청력을 의심했다. 몸을 둘둘 두른 감색 담요 안에서 도웅은 꼼지락거리며 무언가를 꺼내는 동작을 취했다. 역시나 잘못 알아들은 게 틀림없다. 손이라니, 말이 안 된다.
“…….”
손이었다. 말끔하되 자세히 보면 자잘한 상처가 많은. 끝이 불그스름한, 잘 뻗은 손가락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손이요, 손.”
손금 하나하나 세세하게 보일 만큼 가까워진 손바닥을 보며 할 말을 찾아 입을 뻐끔거렸다.
“손은 왜…….”
“얼마 전에 많이 만져 달라면서요. 참 변태스러운 사람인가 했는데, 기운이 옮는다느니 했던 말 감정 맞죠?”
안 잡을 거야?
어희는 강아지풀처럼 살랑살랑 흔들리는 도웅의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길쭉한 네 개의 손가락이 다칠 세라 조심스레 양손으로 쥐었다.
“기내식 때까지만이에요.”
순순히 손을 내어준 도웅은 다른 한 손으로 쿠키 봉투를 뒤적여 뺏어 먹었다.
애초에 도웅의 아버님이 준 거니 뺏어 먹는다는 표현은 어딘가 이상했으나 양해를 구하진 않았으니 뺏어 먹은 걸로 치기로 했다.
* * *
둥둥 저 어딘가를 부유하는 정신이 돌아온 건 손안에 소중히 품고 있었던 온기가 쏙 사라지고 주변이 약간 부산스러워졌을 때였다.
“어희 씨, 밥 먹고 더 자요.”
손의 온기가 긴장을 놓게 만들었는지 아니면 피로가 누적되었었는지 어희는 저도 모르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메뉴도 묻지 않고 햄버거를 주문한 도웅은 능숙하게 제 햄버거와 어희의 햄버거를 바꿔주었다.
자다 일어나서 기름진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으나 도웅의 색이 묻은 햄버거는 나쁘지 않아,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슬슬 한국이네요.”
보는 이가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음식물을 씹고 있을 때 옆에서 도웅이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못해도 열 시간은 있어야 할 텐데.
“아까는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안 깨웠어요. 그래도 마지막 기내식은 챙겨 먹어야죠.”
마지막 기내식?
어희는 베어 문 햄버거 단면과 옆자리의 도웅을 번갈아 쳐다봤다. 도웅은 푸스스 웃으며 앞에 붙은 패널을 가리켰다.
“세 시간 후면 한국이에요.”
“…예?”
“호텔에서 잠 많이 못 잤어요? 얼굴에 팩까지 얹어줬는데도 한 번을 안 깨고 잘 자던걸요.”
어쩐지 은근히 얼굴이 미끈하더라니.
어희는 별말 없이 햄버거를 먹은 뒤 체리 콜라까지 마셨다. 꽤 괜찮은 포만감이 들었다.
이렇게 길게 세상모르고 잔 게 얼마 만인지.
미련이 남아 더 잘 요량으로 담요를 덮고 누웠다. 그리고 그대로 세 시간이 지나, 좌석을 올려야 할 때가 왔다.
“와~ 한국이다.”
“…….”
“어희 씨도 많이 피곤하죠?”
“……예, 뭐.”
떨떠름한 대답과 함께 좌석을 올렸다. 남은 세 시간 동안 얕은 잠도 들지 못한 채 말똥말똥 누워만 있었다. 혹 도웅의 손이 없어서일까 싶어 뻔뻔하게 손까지 빼앗아 쥐고 있었으나 기분만 좋을 뿐 정신이 아주 깨끗했다.
비교적 간단하게만 짐을 꾸린 어희와 달리 도웅은 직원들 선물이다 뭐다 하며 짐이 더 많아졌다. 도르륵 캐리어를 끌고 공항 밖으로 나오자.
“푸후. 진짜 한국이네….”
가짜 한국이 있는 것도 아닌데 믿기지 않는지 짧은 숨을 터트린 도웅은 두 팔을 위로 올려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도 영 몸이 풀리지 않는지 양옆으로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팔다리도 길쭉길쭉해서 그의 몸풀기에 방해가 될세라, 어희는 두 발자국 옆으로 피해 목도리를 요령 없이 돌돌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