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바퀴쯤 돌리고 있을 때 갑자기 도웅이 목도리를 죽 잡아당겨 그대로 고개가 아래로 엉거주춤하게 내려갔다.
까맣고 둥그런 눈동자를 마주하며 어희는 자신이 뭘 잘못했나, 그간 행동을 샅샅이 떠올려봐도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예고도 없이 목도리로 목을 조르는 이유를 묻기 위해 입을 떼려는데.
“아무리 코에 걸면 코걸이, 목에 걸면 목도리라지만 이렇게 매면 찬 바람 다 들어와요.”
세 바퀴나 두른 목도리를 휴지 풀 듯 눈 깜짝할 사이에 돌돌 풀어버린 도웅은 목도리를 한 번 정돈한 후 다시 목에 매어주기 시작했다.
풀리지 않게 매듭까지 지어준 도웅은 한 발자국 떨어져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위아래로 훑은 후 만족스러운 얼굴로 어희 가슴께를 가볍게 툭, 쳤다.
“마음 같아서는 밥이라도 한 끼 먹고 싶은데 짐 정리하고 바로 가게 나가봐야 할 거 같아서 어렵네요.”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게다가 바로 출근한다는 사람을 어찌 붙잡겠는가.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어딘가 서운했으나 넣어두어야 할 감정이다.
“콜밴 불렀는데 같이 타고 가요. 어차피 집도 근처인데.”
수속을 마치고 공항 밖으로 나오자 하늘에서 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써도 나풀거리는 얇은 비에 모호하게 옷이 젖는 안개비. 비 오는 날씨를 선호하는 어희로서는 좋은 날이었으나 도웅은 어딘지 멍해 보였다.
“비 오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저 멀리 내다본 도웅은 크게 하품했다.
“비만 오면 노곤해지는 거 같지 않아요? 으으, 더 피곤한 기분이에요.”
말끔한 흰색 밴을 확인하고 캐리어를 돌돌 끄는 도웅을 뒤따라 걸었다.
“저는 비 오는 날이 좋습니다.”
어희는 작게 대꾸했지만 주변 소음에 묻혀 도웅은 듣지 못한 듯했다. 그리 중요한 내용도 아니고 도웅이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기에 어희는 재차 말하지 않고 트렁크에 캐리어를 실었다.
벤에 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꾸벅꾸벅 조는 도웅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받쳐 뒤로 넘겨주었다.
“…아.”
어희 손길에 잠에서 깬 도웅은 졸음이 묻어나오는 눈으로 어디까지 왔는지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금 눈을 감았다.
도웅이 미리 이야기해놓았는지 밴은 로얄 골드 펠리스 앞에 제일 먼저 멈춰 섰다. 트렁크를 여닫는 소리에 깬 도웅은 창문을 열고 잠기운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을 내밀었다.
“어희 씨, 푹 쉬어요.”
진짜 쉬어야 하는 건 당신 같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고 삼켜냈다.
어희는 고개를 끄덕인 뒤 벤이 사라지는 걸 보고 나서야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간단하게 짐 정리를 끝낸 후 여유 있게 반신욕까지 하고 나온 어희는 길쭉한 소파에 앉아 습관처럼 요거요 어플을 켰다.
커피와 디저트를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식탁 한쪽에 놓여 있는 커다란 종이봉투를 보고 디저트 메뉴만 도로 뺐다. 도웅의 부모님이 챙겨준 쿠키 종류만 여섯 가지가 넘었고 앞으로 이틀은 끄떡없을 정도로 양도 많았다.
커피만 시키자니 최소 주문 금액이 부족해, 커피 한 잔을 더 추가 후 결제를 마쳤다. 이제 뭘 하지, 생각이 들기도 전에 스케치 노트를 펼쳤다.
대강 뭉뚱그린 구도에 갖가지 아이템을 배치했다. 핸드폰에 찍어 놓은 호텔 소품과 비교해가며 하나씩 빈 곳을 채워 넣었다. 호텔이 그렇게 좋아하는 야경까지 챙겨 만들려면 아무래도 4층짜리 대공사가 될 거 같아, 가벼운 두통이 일었다.
토끼끼 작품에 다른 이의 의견이 들어가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단 한 번도 조언을 구한 적 없었으나 이번만큼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스케치를 사진 찍어 팀장에게 보냈다. 대가를 받고 일을 한 이상 온전히 어희의 작품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팀장에게 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뭘, 굳이 전화까지…….
어희는 눈매를 좁혀 떨떠름하게 핸드폰을 쳐다보다, 손가락으로 슥 밀어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은 여전히 테이블 위에 있었고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
-작가님! 보내주신 스케치 확인해봤습니다. 정말 좋은데요? 이번 광고 끝나면 아예 비슷하게 호텔 토끼끼를 제작하는 건 어떨까요?
아무래도 돈을 받은 광고다 보니 후에 혹시 모를 책임 전가를 하기 위해 에이전시 의견을 물은 거였는데 어째서인지 팀장은 벌써 새 작품을 구상 중이었다.
“아뇨. 지금 이대로 제작해도 될지 여쭤보려고 보낸 겁니다. 어쨌든 광고니까요.”
-아…, 그러시구나. 예, 예. 이대로 제작해주셔도 충분할 거 같아요. 그럼 마감 기한은 언제로 잡아두면 될까요?
팀장도 직장인이다 보니 ‘같다’라는 모호한 말을 선택했다.
“다음 달 내로 끝날 겁니다.”
개인 작품은 늘 판매용 둘, 소장용 하나로 총 세 개를 만들었으나 이번에는 소장용, 호텔용 이렇게 단 두 개만 만들면 되니 세 개를 만들 때와 비슷한 시간이 소모되었다.
“끝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어희는 무정하게 전화를 끊은 뒤 메모장을 켰다. 새벽에 시장에 가서 구매할 재료 체크 리스트를 적고 있을 무렵 난데없이 현관 벨이 울렸다. 잠시 잊고 있었던 커피 주문이 떠올라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커피 주문이라니. 안 주무세요?”
커피 석 잔이 담긴 비닐백을 든 도웅은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사장님이야말로 안 쉽니까?”
아무리 출근한다, 듣긴 했어도 배달 같은 피곤한 일은 잠시 미뤄둘 줄 알았다. 현관문을 열면 라이더가 서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정말 의외로 도웅이 있어서 조금은 반가우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사장도 직원처럼 일해야 안 망하는 법이거든요.”
어희는 도웅이 내민 비닐백을 받아 들었다.
헬멧이 말끔한 거로 보아 안개비는 그친 모양이다.
“호출 없이 자유자재로 이 아파트에 드나드는 건 사장님뿐일 겁니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오늘도 그는 호출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도웅은 실실 웃으며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뺐다.
“서비스요.”
오른쪽 주머니에서는 마카롱 세 개를, 왼쪽 주머니에서는 마카롱 두 개를 꺼내 총 다섯 개의 마카롱을 얹어줬다.
“여섯 개 챙겨왔는데 하나는 오는 길에 뇌물로 줬어요. 저 올 때까지 기다렸나 봐요. 그간 왜 안 보였냐고 막 따져 묻던데.”
기분 좋은 웃음을 작게 터트린 도웅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그럼 전 가볼게요. 맛있게 드세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는지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걸 본 뒤 얌전히 문을 닫았다. 손에 들린 커피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지갑을 챙겨 다시 집에서 나왔다.
마침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도웅을 보고 걸음을 거의 뛰다시피 짧다면 짧은 복도를 달렸다. 고개를 숙이며 하품을 하는 사장의 모습이 보였고 그 순간 문이 닫혀, 버튼을 눌렀다.
다시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에 고개를 올린 도웅과 눈이 마주쳤다. 도웅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어희는 지갑을 열었다.
“…어, 마카롱 서비스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예, 압니다.”
도웅은 분명 그렇게 말했고 어희는 틀림없이 그렇게 들었다. 지갑을 열어 공동 현관 카드키를 내밀었다.
“…….”
“…….”
도웅은 카드키와 어희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문이 두 번이나 다시 닫히려 해, 결국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소리 없이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의 두 남성은 서로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한 명은 갑작스럽지만,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다른 한 명은 상대방의 감정을 보며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이게 뭐예요?”
15층을 지날 때가 돼서야 도웅이 제대로 물었다.
“앞으로 뇌물 갖다 바치지 말고 찍고 들어오시라고……. 공동 현관 키입니다.”
“아~”
그제야 이해한 도웅은 괜찮다며 고개를 살랑살랑 내저었다. 사양을 사양하며 꿋꿋하게 카드키를 내밀자 도웅은 못 이긴 척 받았다.
“그럼 저 진짜 가볼게요. 추우니까 바로 들어가요.”
친절하게 32층을 눌러준 도웅은 손을 흔들며 엘리베이터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공동 현관 밖에 세워둔 전동 킥보드에 타고 쌩하니 사라지는 걸 보고 나서야 어희는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
간만에 도웅의 커피를 마시며 빈둥거리다 간단하게 틀이라도 잡아 둘 셈으로 작업실로 향했다. 미리 정해놓은 길이에 맞춰 판자에 선을 죽, 죽 그었다.
서너 시간 동안 호텔 뼈대와 겉면, 발코니까지 세세하게 판자가 들어갈 모든 부위를 그려낸 후 한숨 돌리며 의자에 앉아 새 커피를 뜯었다.
등을 젖히자 의자 등받이가 부드럽게 뒤로 밀려났다. 커피 빨대를 입에 물고 스탠드 조명이 켜진 작업대를 멀뚱히 쳐다봤다.
이제 막 시작한 터라 앞으로 남은 할 일이 태산처럼 느껴져 벌써부터 지치는 기분이다. 여태 수많은 토끼끼를 만들어냈으나 이렇게 시작도 전에 의욕이 바닥을 친 적은 처음인지라 지루하면서도 이게 평균 직장인의 마음처럼 느껴져 색달랐다.
“으음.”
아무런 이유 없이 발로 바닥을 밀어 의자를 빙그르르 돌리다, 불현듯 전동 킥보드를 타고 사라진 도웅이 뇌리를 스쳤다.
요즘 충전은 제대로 하고 있나?
일전에 전기 좀 빌려 쓰겠답시고 잠시 눌러앉았던 일이 떠올랐다.
걱정된다는 말로 사람 마음을 올려놨다가.
“다, 당뇨 걸리면 단골 잃으니까!”
바닥으로 내팽개쳐버린 게 얄미워 반나절 동안은 보고 싶지 않았음에도 그를 다시 집안으로 들여 보내준 건 늘 밝았던 그에게서 울적함이 보인 탓이다.
아무래도 큰 오해를 하는 거 같아 보이는 도웅에게 서투른 위로를 건넨 이유도 비슷했다.
어희는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쳐다봤다. 어느덧 오후 열 시 반.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되었지. 사장은 아직 카페에 있으려나.
빨대로 커피를 빨아들이며 암막 커튼을 걷었다. 고정창에 물방울이 맺혀 있는 걸 보고 프로젝트 창문을 열었더니 비가 오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부슬부슬 내리던 안개비가 아닌 제법 굵직한 빗줄기다.
“…산책이라도 할까.”
가볍게 나갈 채비를 했다. 목도리를 목에 두르면 따뜻할 거 같아 돌돌 말아봤으나 어딘가 어설펐다. 사장이 둘러줬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해봐도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