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90)

목도리와 싸움을 하느라 십여 분을 소모하다 결국 헐겁게 두르고 신발장 앞에 섰다. 발목 부위가 부드러운 기모 처리가 된 브라운 워커를 신고 장우산을 꺼냈다.

평소라면 적당히 혼자 쓸 수 있는 우산을 골랐겠지만, 오늘은 세 명까지 충분히 쓸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우산을 택했다. 어차피 시간도 늦었으니 통행에 방해될 것 같지 않다.

팡. 검은색 우산을 펼쳐 어깨에 가볍게 중봉을 기대었다. 겉면을 때리는 빗소리는 일정하지 않았고 이따금 굵직한 소리를 내기도 했다.

할 말은 없어도 가끔 입을 벌려 입김을 확인하면서 걸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온 세상이 제대로 보이는 건 오직 비가 내리는 날 뿐인데 그런 날에 산책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어희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디저트 웅 방향으로 향했다. 비가 오면 항상 이 방향으로 걸었기에 도웅을 의식한 게 아니었다.

비가 스며든 보도블록을 터벅거리다 가끔은 작은 물웅덩이를 밟기도 했다. 그것조차 불쾌감으로 다가오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우와 나무가 나무색이야. 화단이 삭막한 색이야. 사람들이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어!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감상을 하며 거리를 걷는 도중 단번에 눈길을 잡아끄는 사람이 보여 걸음을 멈췄다.

불이 꺼진 가게 앞. 큼직한 스티로폼 박스 두 개를 쌓아서 간이 의자처럼 걸터앉아있는 그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노곤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하얀 입김이 허공에서 부서졌고 추적하게 내리는 빗소리가 귓바퀴를 맴돌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떠도 남자는 그 자리 그곳에 있었다. 이곳까지 걸어오며 풍경에 대해 기쁜 감탄을 했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도웅은, 감정 색이 없어도 충분히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일순 작은 바람이 불어, 구불구불한 반곱슬의 머리카락이 잘게 흔들렸다. 정면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튼 도웅과 눈이 마주쳤다. 둥글둥글한 눈매가 놀란 듯 살짝 커졌다. 그리고는 입을 움직였다.

“…희… 씨? 어희 씨?”

손까지 방방 흔드는 모습은 영락없는 강아지 같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뭐하십니까?”

우산이 없어서 곤란한 상황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옆에 빼꼼히 걸쳐져 있는 흰색 우산을 힐끔 보고 우산을 접어 차양 안으로 들어갔다.

“하루에 세 번이나 보네요.”

곱게 눈매를 접어 환하게 웃는 도웅에 같은 질문을 던지자 빗물에 살짝 젖은 앞머리를 엄지와 검지로 문질렀다.

“짐이 많아서 잠깐 앉아 있었어요. 어희 씨는 야밤에 어디 가요?”

“산책 중이었습니다.”

이해가 어려운 표정이 살짝 스쳤다가 금방 사라졌다. 지난번처럼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는 게 훤히 보여 나도 그를 따라서 ‘그렇습니다’ 넘기기로 했다. 낙천적인 성격의 도웅은 어희가 당장 하늘을 훨훨 날아간다 해도 놀랄 뿐 손을 흔들어 인사할 거 같다.

“어희 씨, 저 좀 도와주실래요?”

아.

지금 같은 분위기에 지금 내 기분이라면 도웅이 리뷰를 요청하면 바로 핸드폰을 꺼내 별점을 찍어줄 게 분명했기에 눈을 질끈 감고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산 좀 씌워주시면 안 될까요. 한 이삼 분이면 돼요.”

우산? 

예상과 전혀 다른 부탁에 어희는 다시 고개를 돌려 도웅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도웅의 옆에 걸쳐있는 우산을.

어희의 시선을 눈치챈 건지 도웅은 깔고 앉아있는 흰색 스티로폼 박스를 두 번 두들겼다.

“짐이 많아서 우산 쓸 손이 없어요.”

“아….”

“워낙 가까워서 그냥 맞고 가는 것도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신발이 젖는 건 좀…….”

어희는 겉보기에도 세탁이 까다로워 보이는 도웅의 진 블루 가죽 로퍼를 내려다봤다. 발목 옆의 도드라진 복숭아뼈가 신기해 계속 쳐다봤더니 도웅은 딱, 딱 로퍼 앞 코를 서로 부딪치며 말했다.

“우산 씌워주시면 맛있는 거 드릴게요.”

누가 들어도 귀여운 제안이었다. 그러나 어희에게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겠다는 호랑이처럼 보였다.

분명… 호랑이도 권유랍시고 던졌겠지만,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는 건 마찬가지다. 어희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수락했다. 만면에 기쁜 미소를 달고서 주섬주섬 스티로폼 박스를 챙기는 어희의 어깨를 가볍게 옆으로 밀었다.

“제가 들고 사장님이 우산을 씌워주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네? 아뇨, 아뇨. 제가 들게요.”

“어차피 저는 길도 모르니까 사장님이 우산 드세요.”

무어라 거절하기 전에 손에 우산을 쥐여주고 스티로폼 박스를 들었다.

낮은 높이의 가로로 면적이 큰 박스 두 개를 겹쳐 들자 도웅은 미안한지 옆에서 허둥지둥 우산을 펼쳤다.

큰 우산을 들고나온 건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어희는 속으로 소소하게 기뻐하며 도웅의 걸음을 따랐다. 거리는 도웅이 말한 대로 얼마 되지 않았다. 편의점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는 빌라 안으로 들어가자 도웅은 열심히 우산에 묻은 빗물을 털어낸 후 짐을 옮겨 받으려 했다.

“몇 층입니까?”

“삼 층이요.”

계단을 성큼 오르자 이번에는 도웅이 어희 걸음을 따라왔다. 한 층당 한 세대만 사는 모양인지 문은 한 짝씩만 달려 있었다. 도웅이 산다는 삼 층도 마찬가지로.

“안 볼 테니까 번호 누르세요.”

아예 등을 돌리자 뒤에서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띠리릭, 잠금장치가 해제되었고 사장에게 그대로 짐을 넘겨주었다. 그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장우산을 빼가고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한 번 넘겨 정리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에?”

시간도 늦었고 도웅은 내일도 이른 새벽부터 출근할 게 뻔하다. 괜히 시간 낭비를 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올라왔던 계단을 도로 내려가려는데.

“맛있는 거 준다고 했잖아요. 먹고 가요!”

우뚝.

먹고 가라는 건 나를 집에 들이겠다는 건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낯선 사람을 집에 함부로 들이겠다는 도웅에게 약간의 잔소리를 얹어주기 위해 등을 돌렸다.

“네? 들어와요.”

현관문을 활짝 열고서 기다리는 도웅을 보자 또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게다가 잘 생각해보면 도웅은 이미 여러 번 어희의 집을 들락거렸고 어희는 뉴욕에 있는 도웅의 부모님 집까지 방문했었으니 완전히 낯선 사람도 아니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한쪽에 정리해두었다. 처음으로 들어선 도웅의 집은 전체적으로 깔끔한 투룸이었는데, 여유 공간이 제법 넓었다. 직사각형의 얇은 세라믹 식탁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몸에 단내를 항상 묻히고 다니길래 집에서도 달콤한 향이 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집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남들에게 설명하기는 모호해도 단번에 이해시켜줄 수 있는 집 냄새. 오늘 끌고 다녔던 캐리어가 다른 방문 앞에 놓여 있는 걸로 봐서는 짐 정리를 시작도 못 한 것처럼 보였다.

도웅은 찬장을 열어 길쭉한 잔을 꺼냈다. 의외로 카페 사장님의 집은 커피머신 대신에 캡슐 기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모과 청이라도 마시면서 기다려줄래요?”

양문형 냉장고에서 모과가 담긴 유리 용기를 꺼낸 도웅이 물었다. 어희는 청이든 커피든 상관없었기에 얌전히 좋다고 대답했다.

“어희 씨를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생각해보니까 우리 동네 주민이기도 하네요? 집도 별로 안 멀고.”

식탁 아래에 깔린 부들부들한 러그 감촉이 좋아서 나도 하나 사고 싶다. 물어볼까, 말까. 침대 아래에 깔면 딱 좋을 거 같은데.

“마시고 있어요. 새우 구워줄게요.”

꿀 향이 솔솔 올라오는 따뜻한 모과차와 동글동글한 약과 두 개가 앞에 놓였다. 

약과도 맛있지……. 

어희는 생각 없이 비닐 포장을 꼼지락 벗기다가 도웅을 급히 올려다봤다.

“새우요?”

갑자기 웬 새우 대접이란 말인가.

함께 들고 온 스티로폼 박스 하나를 키친으로 옮긴 도웅은 박스를 열었다.

“네. 새우요.”

아무래도 박스에 들어있었던 게 해산물인 모양이다. 박스를 열어 새우를 꺼냈는데, 도웅의 손에 들려있는 새우 크기가 심상치 않다. 도웅의 손이 작은 것도 아닌데 한 마리를 쥐면 꽉 찼다.

“부모님 아는 분이 선물로 보내주셨는데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은 거 있죠.”

새우를 손질하는 도웅의 날개 뼈가 흰 와이셔츠 너머로 볼록 튀어나왔다. 반으로 가른 새우 위에 버터와 치즈를 올린 뒤 레몬즙을 뿌린 사장은 그대로 오븐에 새우를 집어넣었다.

“저 때문에 못 쉬고 계신 건 아니죠?”

어희의 물음에 마늘을 잘게 다지던 도웅은 특유의 곰살맞은 웃음을 보였다.

“아…, 음.”

도웅의 집에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계속 거리를 산책하고 있었을 테니 그건 아니다.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은 건 새우 비주얼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커도 너무 큰 새우는 좀 징그럽다.

“포장해줄까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내 애매한 태도를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난처한 티를 낸 사장은 벌써 플라스틱 용기를 꺼내고 있었다.

“아. 전혀요. 괜찮습니다. 생각보다 새우가 커서 당황한 겁니다.”

“그럼… 드시고 가시는 거 맞죠?”

“예. 그래도 된다면요.”

도로 용기를 집어넣은 도웅을 보고서 쫀득한 약과를 베어 물었다.

마냥 달콤함만 뽐내지 않은 약과에서 은은한 계피 향이 났다. 모과차랑 의외로 궁합이 맞아서 조금 놀랐다. 

약과 어디서 샀는지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버터 향이 솔솔 나기 시작했다. 잘게 다진 마늘을 팬에 버터와 함께 튀긴 도웅은 오목한 접시에 마늘을 건져냈다.

“뭐 도와드릴 거 없습니까?”

사장 혼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기가 영 불편했다. 그러나 엉거주춤 일어난 게 무색하게도 앉아 있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 됐어요, 됐어.”

오븐을 열자 새우와 버터 향이 훅 후각을 자극했다. 기다란 접시에 능숙하게 새우를 올린 사장은 식탁까지 오는 짧은 거리에서 포크와 나이프까지 챙겼다.

“드세요.”

버터와 치즈를 품은 새우를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심지어 도웅이 만들어서 아주 번쩍번쩍 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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