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90)

5. 일상 속 재앙

도웅은 새로 구운 초코 머핀을 쇼케이스에 넣으며 시계를 쳐다봤다. 아직 점심도 지나지 않은 열한 시 반. 할 일이 뭐가 남았더라…….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빈 테이블 하나 없이 손님으로 가득한 홀이나 밀려드는 주문은 오늘따라 지루하다.

“…망고 케익이나 만들까.”

주문 실수로 망고 한 박스가 더 들어온 게 기억이 나, 슬렁슬렁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창고에서 망고 상자를 꺼내 열자 특유의 달콤한 과일 향이 올라왔다.

“우와. 망고다.”

기계처럼 망고를 손질하고 있었더니 주방 너머에 앉아 구경하는 라이더 준영이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전에 몽블랑을 사겠다며 새벽부터 찾아온 어희가 앉았던 자리다.

“왜? 망고 좋아해?”

새삼 망고를 보며 눈을 반짝이는 준영에게 물었더니 해맑게 웃으며.

“망고 주스는 마셔봤는데 과일 자체는 먹어 본 적이 없어서요.”

마음이 약해지는 소릴 한다.

스물한 살인 준영은 퇴근 후에도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집안 사정이 무척 안 좋다고 들은 터라 그런지 괜히 마음이 더 쓰였다.

“몇 개 챙겨줄까?”

“아뇨, 아뇨! 괜찮아요! 대신에 한 조각만 먹어봐도 되나요?”

“응.”

먹기 좋게 망고를 썰어 접시에 내주자 머뭇거리며 한 조각을 입에 넣은 준영은 매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만든 디저트를 먹은 어희와 겹쳐 보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쯤 자고 있으려나? 

시간을 확인했더니 고작 십 오 분이 지나있다.

“맛있어?”

남은 망고를 손질하며 준영에게 물었다. 배달을 하러 가기 위해 세 조각을 입에 넣은 준영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망고는 맛있는 과일이었어요.” 같은 귀여운 감상평을 내놓았다.

미리 구워놓은 케익 시트를 자른 뒤 생크림을 듬뿍 끼얹었다. 가장자리에 길게 썬 망고를 넣고 시트를 올리기를 반복했다.

홀 케익으로 쇼케이스에 진열하고 시계를 봤더니 이제야 열두 시다. 오늘따라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은 굉장히 답답했다.

“시계에 돈이라도 붙었어요?”

직원 영호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가뜩이나 험한 인상이 더 험해진 걸 보고서 도웅도 똑같이 미간을 좁혔다.

“엉. 시간이 너무 안 간다.”

“집에 가요.”

사장한테 퇴근하라는 직원은 또 처음 본다. 황당해서 허허, 헛웃음을 흘리다가 문득 어희가 생각이 났다. 아니 솔직하게 문득은 아니었다. 십분 간격으로 한가할 때마다 어희가 떠올랐으니.

“야야, 영호야.”

재고를 확인하고 있는 영호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고 도웅은 같이 일하는 척 옆에 붙어 목소리를 낮춘 상태로 말을 걸었다.

“만약에 너한테 초능력이 생기면 어떨 거 같아?”

“어떤 초능력이요.”

심드렁하게 되묻는 영호에게 도웅은 넌지시 던졌다.

“독심술?” 

딱히 어희가 떠올라서 던진 물음은 아니었고 그냥, 그저 수다라도 떨면 시간이 더 잘 가지 않을까 싶었다.

“흐음.”

“…….”

“사장님 옆으로 좀 비켜봐요.”

하나, 둘, 셋, 넷…….

생크림 재고를 세는 영호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팔꿈치로 찔렀다.

“어? 어떨 거 같아.”

일을 방해받아서인지 영호는 조금 짜증스럽게 냉장고 문을 닫았다. 재고 파일을 보며 볼펜을 딸깍거리다, 대답을 내놓았다.

“독심술, 편하지 않을까요? 사람 사귀기도 유리하고.”

“그런가? 나는 좀 힘들 거 같던데.”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낀 적은 있어도 본 적은 없는지라, 쉬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힘들어 보였던 어희를 떠올리며 작은 반박을 하자 영호는 무슨 소리냐는 듯 두꺼운 눈썹을 위로 올렸다.

“힘들게 뭐가 있어요.”

뭐가 힘드냐 묻는다면……. 

도웅은 둘러댈 말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왜 그…, 예를 들면 너하고 잘 지내면서도 속으로는 네 욕을 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게 왜 힘든 거예요? 속이랑 겉이 한결같은 사람 찾기가 더 어려울 텐데. 독심술 같은 사기적인 능력을 갖고 있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의외로 냉정한 말을 한 영호가 냉장창고로 가는 걸 보고 뒤쫓았다.

“아니지, 아니지! 그런 거에 상처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심지어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힘들 수 있지 않을까? 본인이 원해서 얻은 능력도 아니잖아.”

과일 상자를 열어가며 수를 세는 영호는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도웅을 돌아봤다.

“사장님, 독심술이라도 얻었어요?”

저도 모르게 어희를 대변하던 도웅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제 마음이 들리시나요? 일 안 도와줄 거면 방해는 하지 말아 달라는 제 속마음이 들리세요?”

“…으응. 들리는 거 같네.”

다시금 일에 집중하는 영호를 뒤로한 채 냉장창고를 나온 도웅은 다시금 시계를 쳐다봤다. 

물결 모양처럼 구불구불한 입 모양이 귀여워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오늘 시간 괜찮아요?”

“아뇨.”

오늘은 미니어처에 들어가는 가구를 만들고 야경에 들어갈 조명도 설치해야 한다. 하루라도 헛되이 시간을 보낼만한 일정이 아니다.

“아. 그렇구나….”

도웅의 입에서 나온 섭섭한 어조에 어희는 우유잔을 내려놨다. 아쉬운 감정이 보이는 걸로 보아 정말로 서운한 모양이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혹 도움이 필요한 일인가?

짤 주머니와 흑미 크림빵을 정리한 도웅은 위생 장갑을 벗고 팔을 위로 올려 크게 기지개를 켰다.

“쇼핑이나 갈까 했죠. 왜, 네 번째 어희둥둥 남았잖아요.”

아. 쇼핑….

단 한 번도 옷이 부족하다 느낀 적 없다. 오히려 외출 빈도가 드문 주제에 옷이 많았다.

“다음에 가죠. 어희 씨 시간 될 때.”

“음… 몇 시에 갑니까.”

다시 생각해보니 옷이 적은 거 같기도 하다. 벌 수가 아니라 종류가 적다. 도웅도 매번 까만 옷만 입는다며 쇼핑을 제안하지 않았는가.

“음. 만약 가게 된다면 저녁 여섯 일곱 시?”

혼자서 시간을 가늠해본 도웅은 이내.

“아. 그 시간이면 어희 씨, 자고 있을 시간이죠? 어차피 시간도 안 된다고 하셨으니….”

멋대로 약속을 취소하려 했다. 물론 정식으로 약속이 성사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하다. 묻지도 않고 멋대로.

“안 잘 겁니다. 일곱 시에 뵙죠.”

“네?”

“어디로 가면 됩니까?”

“바쁘신 거 아니에요?”

“예. 아닙니다.”

바쁘긴 한데, 덜 바쁘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면 오늘은 덜 바쁜 날이 된다. 이건 유동적으로 시간을 쓰는 것이지 게으름이나 나태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

“왜, 그렇게 보십니까.”

어희는 저를 미심쩍게 바라보는 도웅에게 물으며 흑미 크림빵을 마저 입에 넣었다.

음. 역시 입에 착 달라붙는 게 무척이나 맛있다. 

도웅과 알고 지내면서 어희는 다른 음식을 맛볼 기회가 많아졌다.

“바쁜데 안 바쁜 척 거짓말하는 걸로 보여서요.”

“전혀 아닙니다.”

전적으로 사장의 말이 맞다. 어쩌면 사장도 내 감정이 눈에 보이는 모양이다.

“그래요?”

“아니요. 사실 바쁜 건 맞습니다. 그런데 저녁 시간도 못 낼 정도는 아닙니다.”

달콤하고 포만감 가득한 간식 시간을 끝내고 어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쁜 시간에 괜히 자리를 차지하고 싶지 않았다.

“잘 먹었습니다. 그럼 일곱 시에 만나는 거로 알고 있으면 될까요.”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목도리를 두를 수 있게 되었다. 확답을 받기 위해 도웅을 돌아봤다가 곧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음?”

도웅의 감정 색이 미세하게, 정말로 미세하게 변했다. 깜짝 놀라 연신 눈을 깜박이자 어느새 사라진 후였다.

“네? 왜요?”

어희는 저를 응시하는 까만 눈동자에 대고서 차마 무엇에 애정을 느꼈냐, 물을 수 없어 고개만 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애정, 그것도 연정에 가까운 확실한 감정이었다. 기대감이나 설렘 같은 오해하기 쉬운 감정이 아닌 확실한 애정이었다.

“그러면 여섯 시 반 정도에 볼까요? 집 앞에서 만나요. 어때요?”

어희의 당황을 모르는 도웅은 해맑게 약속 시간을 확인했고 어희는 좋다는 말만 한 다섯 번 하고 황급히 카페를 나왔다.

돌돌돌, 바퀴 달린 보스턴 백을 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머릿속을 장악한 건 ‘왜?’라는 의문이다.

그동안 어희는 도웅에게서 저런 감정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것도 갑자기 보인 그의 감정은 심히 당황스럽다 못해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걸로 여기기엔 도웅은 집, 카페만 반복했다. 언제, 어느 순간에 좋아하는 사람을 만든단 말인가.

아닌가? 요새는 틈틈이 잘 만드나?

뻔한 장소, 한정된 사람만 만나다 보니 요즘 사람들의 방식을 모르겠다.

혼자서 무안함을 느껴 괜히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목덜미를 손으로 쓸었다. 닫힌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흐릿한 형체를 보다 고개를 푹 숙였다.

“아.”

띡, 띡.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이 멈칫 멈췄다가 천천히 남은 버튼을 마저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장 턱 앞에 앉아서 세운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려놨다.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니까 있었다. 불이 꺼진 새벽 카페 안에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가 있었다.

새벽마다 함께 일하는 직원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세워지자 기분이, 무척 좋지 못했다.

좋아하는 이가 다른 이를 좋아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 마당에 기분이 좋은 것도 이상하다.

“허어.”

바닥을 기는 기분을 자각하자 자조적인 한숨이 섞여 나왔다. 본인이 뭐라고 참견을 한단 말인가. 정말 쓸모없다.

어희는 불 꺼진 현관에 앉아서 한동안 넋을 놨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사 온 재료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칫솔을 물고서 양치를 하던 도중 우연히 커다란 거울을 마주하자 웬 음침한 남자가 보였다.

멀대처럼 큰 키의 남자는 머리카락을 방치해, 기르고 있었는데, 징그러우면서도 무서웠다. 눈 밑에 자리 잡은 짙은 다크서클이 어두컴컴한 분위기를 한껏 더하고 있었다. 더는 보기 싫어 눈을 내리깔고 치약 거품을 뱉었다.

열두 시 십 분…. 시간 더럽게 안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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