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90)

* * *

매일 카페, 집, 카페, 집, 카페만 반복하는 심심한 일상에 로얄 골드 펠리스 3201호, 어희라는 사람 한 명을 알게 된 것뿐인데 하루하루가 재미있게 변했다. 열 살만 더 어렸다면 분명 학교에서도 붙어 다녔을 게 분명하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얼마만의 쇼핑이란 말인가. 어희둥둥을 핑계 대긴 했으나 도웅도 기분 전환되고 좋았다.

도웅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희의 아파트로 성큼성큼 걸었다. 아파트 입구 앞에 서 있는 어희를 발견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키가 큰 말쑥한 차림새의 남자, 누가 봐도 어희다.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도웅이 준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나왔다.

“안녕하세요!”

널따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쾌활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 예.”

놀란 기색 하나 없이 힐끔 돌아본 어희의 표정은 어딘가 음울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다른 인사 없이 걸음을 옮기는 어희를 따라 걸었다.

“잠은 좀 잤어요?”

“아뇨.”

“계속 깨어계셨어요? 오늘 안 피곤하겠어요?”

“예.”

수다스러운 성격이 아닌 건 익히 경험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말을 아꼈던 적은 없었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 혹시 지금 많이 피곤해요?”

“아뇨.”

또 단답이다. 오가는 사람이 많은 백화점 앞에서 도웅은 어희의 팔을 끌어 외진 구석으로 걸었다.

“어희 씨. 무슨 일 있어요?”

놀란 듯 눈을 두어 번 깜박인 어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옷 사기 싫으면 밥이라도 먹을래요?”

“아뇨.”

“정말 괜찮아요?”

“예.”

“그럼 들어가요? 들어갈게요?”

떠보듯 의문형으로 말끝을 올리자 어희는 그제야 “들어가요, 들어가세요.” 하고 말을 길게 했다.

“저는 편하게 입을 만한 무스탕이랑 맨투맨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털 조끼도 사고는 싶은데 예쁜 거 찾기가 어려워서.”

“음. 그렇군요.”

남성복 매장으로 올라가며 무얼 살 건지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늘 완벽한 계획은 어긋나기 마련이었다.

에스컬레이터로 올라오자마자 한 매장에 디피되어 있는 카키브라운색의 긴 코트를 보고 어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어희 씨, 어희 씨. 저거 입어볼래요?”

“…….”

“되게 멋진데.”

뚱한 표정의 어희를 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직원에게 걸려있는 코트를 가리켰다.

벗은 외투를 잡아주려는 직원의 손을 무시하고 의자에 대충 올려놓은 어희는 코트를 어깨에 걸쳤다.

“와. 이거 살래요? 아니면 제가 사줄게요.”

키가 커서인지 코트는 무척 잘 어울렸다. 도웅은 소매를 손끝으로 만졌다. 질감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이리 와 봐요. 거울 봐야지.”

옷 입히기 놀이보다 블록 쌓고 노는 걸 더 선호했던 본인인데, 의외로 재미있다. 약간 흥분 섞인 기세로 전신 거울이 있는 방향으로 어희를 잡아끌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어희는 한 발자국도 떼지 않고 버텼다.

“마음에 안 들어요?”

그래도 일단 거울 한 번 보면 마음이 싹 달라질 텐데 어희는 묵묵히 어깨에 걸친 코트를 벗었다.

“잘, 모르겠어서.”

“그러면 다른 색상으로 입어볼래요? 이 코트 진짜 어희 씨한테 잘 어울려요.”

안 사면 손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쉬울 만큼 잘 어울린다. 보라. 옆에서도 직원이 감탄하고 있지 않은가. 적극적으로 추천을 하고 나서자 어희도 드디어 조금은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렇게 어울립니까?”

알면서 기분 좋아지려 묻는 말이 아니라는 거쯤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웃는 모습이 어색하긴 해도 미소가 박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온종일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음울한 분위기만 폴폴 풍기고 있지 않은가.

만약 어희를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지레 겁에 질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웅이 보기에 그는 울기 일보 직전처럼 보였다. 누가 툭 건들기라도 하면 봇물 터지듯 눈물을 줄줄 흘릴 거 같았다.

“네. 진짜 어희 씨 아니면 아무도 소화 못 함. 다른 코트랑 다르게 기장도 길어서 완전 잘 어울림.”

확신에 차서 ‘이거 안 사면 바보다, 이 바보야!’ 식으로 대답했더니 어희는 선 채로 장장 삼십 분을 고민했다.

그의 손에서 코트를 뺏어 냅다 계산해버리고 싶은 욕구를 참고 또 참으며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드디어 어희가 결단을 내렸다.

“사겠습니다.”

그 한마디가 어찌나 감미롭던지. 리뷰를 써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리액션을 뽐낼 뻔했다.

“감사합니다….”

직원도 아닌 도웅이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계산을 끝내고 쇼핑백 하나가 어희의 손에 대롱 달렸다. 이제 제 옷을 사기 위해 고개를 돌렸는데, 왜인지 또 어희에게 어울릴 법한 옷이 눈에 들어온다.

“…….”

도웅은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어희를 힐끔 바라봤다가 다른 매장에 걸려있는 검은색 세미 셔츠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리고 이내 입매를 아래로 떨궜다.

어차피 어희는 와이셔츠 종류는 잘 안 입으니까 차라리 옆에 걸려있는 오버핏 데님 셔츠가 훨씬 낫다. 자주 입는 목티도 안에 받쳐입기 알맞고….

“아.”

이전에 드레스 룸에 걸려있는 기존 옷까지 매치해서 또 어희 옷을 고르고 있는 자신을 자각하고서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쳤다. 이렇게 한 번 신경이 쓰인 이상 어쩔 수 없다.

“…어희 씨. 저 옷 괜찮지 않나요.”

섣불리 매장에 들어가지 않고 물었더니 어희는 가만히 서서 데님 셔츠를 입고 있는 마네킹에 시선을 두었다.

“안에 까만 목티 매치해서 입으면 잘 어울릴…….”

“괜찮네요.”

“네?”

못해도 십여 분은 고민할 거라 예상했으나 어희는 의외로 냉큼 긍정적으로 굴었다. 신이 나서 그럼 당장 입어보자고 매장 안으로 들어갔더니.

“그냥 사겠습니다.”

걸쳐보지도 않고 대뜸 구매 의사를 밝히는 어희를 보고 있자니 조금 답답해져서 눈을 비볐다.

“그래요, 뭐. 어차피 잘 어울리겠지….”

이후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도웅이 괜찮아 보이는 옷을 추천하면 어희는 묻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샀다. 한 번은 장난으로 구멍이 송송 뚫린 누더기 같은 옷을 추천했더니 사려고 해 말려야 했다.

도웅 자신의 옷은 고작 맨투맨 한 벌에 로퍼 한 켤레인 반면 어희의 양손은 쇼핑백이 가득 들렸다. 이상하게 순종적인 건 어희였으나 이상하게 지치는 건 도웅이다.

피로를 잘 느끼는 타입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웅은 네 시간 만에 항복을 선언하고 백화점을 나왔다. 차가운 밤바람을 허망하게 맞으며 작은 한숨을 흘렸다.

“밥……, 먹을래요?”

사실 밥보다는 술이 고픈 하루다. 하루 동안 예스맨인 어희가 그러자고 대답하기 전에 말을 바꿨다.

“밥 말고 술 마실래요?”

“예.”

예상한 답변에 일본 손 흔드는 고양이 인형처럼 허공에 손을 휘적였다.

“갑시다….”

술집이 즐비한 먹자골목에 들어서서 무엇이 먹고 싶냐 물으면 아무거나, 술은 어떤 걸 마시고 싶은지 물어도 아무거나. 돌아오는 아무거나 라는 대답이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기나긴 먹자골목을 두 번 왕복하다 걸음을 멈췄다.

“편의점에서 술 사서 우리 집에서 마실래요?”

예, 라는 뻔한 대답 대신 어희는 머뭇거렸다. 그 머뭇거림이 기뻐서 순간 들뜬 목소리가 나왔다.

“맛있게 만들어 줄게요. 자고 가도 돼요.”

안줏거리를 만들만한 재료는 집에 웬만큼 다 있었다. 심지어 과일도 많다. 술만 없었는데 그건 집에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편의점에서 사가면 해결된다. 

오히려 좋아.

“…그러죠.”

떨떠름한 수락이 떨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린 편의점에서는 아예 어희에게 어떤 술을 마실 건지 묻지 않았다. 어차피 물어봤자 또 ‘아무거나’라는 대답이 돌아올 게 뻔했기에 알아서 한 아름 구매했다.

소주부터 시작해서 막걸리, 보드카, 와인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계산대에 올려놨더니 금액이 맨투맨 값보다 더 나왔다. 어희가 지갑을 열기도 전에 미리 꺼내놨던 카드를 내밀어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짐은 아무 데나 놔도 돼요.”

집이라는 익숙한 공간이라 그런지 마음이 편해졌다. 신발장 근처에 쇼핑백을 내려놓은 어희는 욕실에서 손을 씻고 돌아와 식탁에 얌전히 착석했다.

“배고프죠? 저녁 안 먹었을 거 아니에요.”

간단하게 치킨 볶음밥을 만들어 내주고 대충 모양만 내면 되는 과일 안주와 치즈 카나페까지 만들었다. 한국인이라면 역시 국물이 필수인지라 양념장을 푼 냄비를 인덕션에 얹어놨다. 무를 서걱서걱 썰어 냄비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술은…… 알아서 줄게요.”

아무 거나를 사전에 차단하고 남은 과일을 갈아 적당히 달곰하게 보드카에 섞어줬더니 쪼록쪼록 잘 마셨다.

소주를 뜯어 길쭉한 유리잔에 콸콸 들이부었다.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어희를 무시하고 잔을 비웠다.

“후! 간만에 알콜 들어가니까 좋네요.”

빠르게 한 잔을 비우고 끓기 시작한 냄비에 해물 믹스와 게 한 마리, 이전에 받은 타이거 새우 두 마리를 넣고서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같은 방식으로 소주를 마시자 한 병이 뚝딱 비워졌다.

“너무… 급하게 마시는 거 아닙니까.”

오늘 처음으로 먼저 말문을 연 남자는 딸기 맛 보드카를 마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해물탕을 먼저 끓여내야 한다는 작은 오기 때문에 다시금 식탁을 벗어나 팔팔 끓는 냄비로 향했다.

갖은 채소를 넣고 뚜껑을 닫은 뒤 팔짱을 낀 채 인덕션 앞에 오도카니 서서 기다렸다.

“사장, 아니 도웅 씨?”

뒤에서 조심스레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섰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의자가 끌리는 작은 소음이 들리자 인덕션을 끄고 해물탕을 식탁 가운데에 올렸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어희가 도로 앉는 걸 보고서 이번에는 막걸리 한 병을 깠다. 해물탕도 있겠다, 이제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 같다.

“어희 씨. 우리 대화 좀 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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