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90)

느리게 눈을 끔벅이다 찬물로 가볍게 세수를 했다.

축축하게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화장실에서 나오자 코트에 팔을 넣고 있는 어희와 눈이 마주쳤다.

“어? 가게요? 자고 가요.”

물기가 남은 손으로 어희의 코트 자락을 잡았다. 꽃 향 대신 과일주 냄새를 폴폴 풍긴 어희는 고개를 가볍게 살랑살랑 내저었다.

“잠옷 빌려줄 테니 자고 가요. 꼭 집에 가야겠다면 데려다줄게요.”

저보다 술에 취한 어희를 혼자 보내기에는 괜히 걱정되어 소파에 얹어놓은 외투를 챙겼다.

“괜찮습니다.”

술에 절여져서 그런지 한숨처럼 흘러나온 어희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말과는 다르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가만히 서 있지도 못했다. 도웅은 불안정하게 좌우로 흔들리는 어희의 상체를 손으로 잡아 바로 세웠다.

“괜찮긴요. 엄청 비틀거리는 거 알아요? 이러다 넘어지면 그대로 잠드실 거 같은데.”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게 영 불안해서 잡아줬더니 이번에는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어깨처럼 눈을 잡아 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가만히 지켜봤더니.

“으음.”

고민하듯 슬쩍 고개를 추켜올렸다. 티 없이 하얀 그의 턱 아래로 이어지는 목선을 물끄러미 올려봤다.

“그러면, 하루 신세 지겠습니다.”

짧은 고민을 마친 어희가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해왔다. 검은색에 가까운 갈색 눈동자가 거실 밝은 조명을 받아서 그런지 금색으로 보였다. 묘한 모습을 술 탓으로 돌리기에는 정신만큼은 멀쩡하다.

“…도웅 씨?”

외투 자락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더니 어희가 넌지시 이름을 한 번 불렀다.

“아. 갈아입을 옷 드릴게요. 잠시만요.”

정신을 차리고 침실로 향했다. 서랍장을 열어 품이 넉넉한 검은색 반소매 셔츠와 빨간색 체크무늬 잠옷 바지를 꺼냈다. 구매할 당시 사이즈 선택을 잘못하는 바람에 바짓단이 길었다. 크게 접어서 입어야 하는 게 영 불편해서 안 입고 내버려 뒀던 걸 단골에게 입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새 속옷은 없는데 편의점에서 사 올까요?”

잠옷을 건네주고 물었더니 어희가 벗어뒀던 코트를 다시 입기 시작했다.

아니, 잠옷도 내줬는데 고작 속옷이 없다는 이유로 집으로 돌아갈 궁리를 하다니. 이리 매정할 수 없다.

“제, 제 속옷은 못 드려요!”

속옷은 본래 은밀하니까 속옷이 아니던가. 남에게 막 보여주고 빌려주는 옷이 아니니까 속옷인 거다. 속옷 소유권을 주장하는 도웅을 멍하니 쳐다본 어희는 이내 황당한 숨을 내뱉었다.

“하, 음. 제가 사러 가는 겁니다. 속옷.”

“그… 렇군요.”

속옷은 절대 넘겨주지 못한다, 혼자 고집을 피운 게 부끄러워진 도웅은 무안하게 뒤통수를 긁적인 뒤 어희를 제치고 신발을 신었다.

“제가 사 올 테니 어희 씨는 앉아 계세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집에 가다 넘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사람을 편의점까지 혼자 보낼 리 없다. 거실 중앙에 오도카니 서있는 어희를 보고서 현관문을 열었다.

“정 심심하면 리뷰 한 줄…, 부탁드려요.”

술기운이 오른 건 도웅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와 달리 리뷰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구질구질한 한 마디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

카페보다 먼, 두 블록 너머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 생활 매대에 선 도웅은 뚱하니 남성 속옷을 쳐다봤다.

무난하게 깜장 속옷을 살 예정과 달리 파란색에 흰색 줄무늬, 남색에 흰색 도트. 단 두 가지 패턴뿐이었다. 어떤 걸 가져가야 그나마 덜 언짢을까 고민하던 도웅의 손이 줄무늬로 향했다가 도트 속옷을 집었다.

계산대로 향하는 길에 검은색 머리끈이 눈에 띄어 그것도 함께 계산했다.

집 근처 편의점이라 따로 겉옷을 챙기지 않고 몸만 홀랑 나왔더니 몸이 추위에 덜덜 떨렸다. 한 손에 속옷과 머리끈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는데 길목에 길쭉한 인영이 보였다. 익숙한 기시감이 느껴져 걸음을 늦추고 어디서 봤더라, 곰곰이 떠올려봤더니 이전에 몽블랑을 사기 위해 새벽부터 카페 앞을 지켰던 어희가 떠올랐다.

“…….”

“…….”

하얀 입김과 함께 인영이 몸을 돌려 시선이 마주쳤다. 어희였다.

저도 모르게 우뚝 걸음을 멈춰선 도웅은 눈을 깜박였다. 잠깐이지만 추위도 잊을 만큼 어희라는 존재감이 색다르게 보였다.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고 어희가 먼저 성큼 거리를 좁혀왔다.

“왜…….”

왜 나와 있는지 물으려 했다. 그러나 술에 취해서인지 밤공기가 차가워서인지 말이 입김처럼 흐려졌다.

아직 술기운이 가라앉지 않은 불그스름한 얼굴로 어희가 입을 뗐다.

“추우실 거 같아서.”

고작 두 블록 거리 편의점인데도 불구하고 어희의 손에는 코트가 들려있었다. 정작 본인은 목티만 덩그러니 입고 나왔으면서.

“아…. 안 그래도 추웠는데. 고마워요.”

뒤늦게 어희의 코트를 받아 주섬주섬 입었다. 특유의 달콤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서로 말없이 빌라까지 걷다가 뒤늦게 사 온 속옷이 생각나 말을 걸었다.

“아 참. 줄무늬가 좋아요, 도트 점박이가 좋아요?”

내심 도트가 좋다는 말을 기다리며 계단을 올랐다.

“둘 다 별로지만, 굳이 고르라면 줄무늬가 좋습니다.”

“저런.”

차라리 두 개 다 사 올 걸 그랬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며 그에게 사 온 물건을 내밀었다.

“줄무늬는 촌스러웠다는 걸 알아주세요.”

“아, 하.”

군말 없이 속옷과 머리끈을 받아든 어희는 소파에 앉아 샤워 순번을 양보했다.

잠옷과 속옷을 품에 안고 욕실로 향한 도웅은 크게 하품하며 샤워기를 틀었다.

* * *

전날 입고 잤던 체크무늬 잠옷 상의와 검은색 츄리닝 바지를 입고 욕실을 나온 도웅은 푹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탈탈 털었다.

“새 칫솔은 여기 있고 이게 샴푸, 이게 바디워시예요.”

도웅은 일일이 샤워용품을 설명하다, 어희의 긴 머리칼을 보고 린스나 트리트먼트는 없다고 덧붙였다. 상관없다는 대답을 듣고서 이부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침실에 들어갔다.

포근하고 두툼한 겨울 이불을 꺼내 침대 아래에 깔아주었다.

헤어드라이어로 머리칼을 말리고 침대에 앉아 밀린 메시지를 확인하거나 별스타그램을 보는 등 핸드폰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어희의 샤워 시간은 길었다. 사십 분 동안 샤워를 한 어희는 나른한지 소리 없는 하품을 했다.

“여기 드라이기요.”

헤어드라이어를 넘겨주고서 도웅은 그를 구경했다. 딱히 신기해서는 아니었고 핸드폰이 질렸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잠이 들면 모르겠는데, 술만 마시면 신기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따금 거울을 통해 어희가 시선을 마주해왔다.

“그만 보세요.”

이삭 줍는 여인처럼 바닥에 떨어진 머리칼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린 어희는 이불에 몸을 눕히는 순간까지 쳐다보는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건넸다.

도웅은 그제야 침대 끝에 머리를 내밀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똑바로 누워 말똥말똥한 눈으로 천장을 쳐다봤다. 피곤하긴 한데, 잠이 오지 않는다.

“꼭 수련회 온 거 같지 않아요?”

심심해서 말을 붙였더니.

“안 가봐서 모르겠습니다.”

칼같이 막혀버렸다. 두 번 눈을 깜박이고 다시금 말을 붙였다.

“설명해드릴까요?”

“예.”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은 어희에게 두런두런, 친구들과 낯선 곳에서 잠을 자는 설렘과 들뜬 기분을 설명하면서 중학교 수련회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들을 이야기해줬다.

옛날이야기는 늘 그렇듯, 그때 그놈 어디서 뭐 하고 사는지. 로 끝이 났다.

“…수련회 온 거 같네요.”

대꾸나 웃음기 하나 없이 조용하길래 잠이 든 줄 알았던 어희가 부드러운 어조로 공감을 담은 대답을 내놓았다.

“안 가봤다면서요.”

피식 웃으며 침대를 넘어 아래를 내려다봤더니 어희는 눈을 감은 채 대꾸했다.

“만약 가봤다면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이랑 비슷할 겁니다.”

“어희 씨 신나요?”

“음.”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번쩍 눈을 뜬 어희와 눈을 마주쳤다. 흡사 공포영화의 귀신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깜짝이야. 왜 쳐다봅니까.”

크게 놀란 건 도웅이었으나 어희는 작은 불만을 내비쳤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도웅 씨 부모님 집에 갔을 때랑 비슷한 느낌인데 전혀 달라요.”

내 부모님?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울적하지 않았나? 

도웅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 입안에 모은 공기를 오른쪽, 왼쪽 볼로 이동시키다가 힘없이 뱉었다.

“가끔은 제가 보는 시점을 당신에게 공유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시 한 편을 지어보라 시킨 게 아닌데 설명에 어려움을 겪는 어희를 부추겼다.

“그냥 느끼는 대로 말해봐요. 어떤데요?”

몸을 반대로 돌려 누운 어희는 이불을 끌어 올려 볼까지 가렸다.

“따뜻하고 반짝입니다.”

단출한 감상평이다.

따뜻한 건 보일러를 세게 틀어서 그런 것이고 반짝이는 건 침대 무드등 밝기가 너무 강해서 그런 거 같다. 도웅은 손을 뻗어 슬쩍 조명 밝기를 낮췄다.

“평생 파묻혀서 살아도 좋을 만큼.”

“……이불 가질래요?”

솜이 죽지 않은 이불은 포근함이 끝내준다. 그걸 잘 알기에 선심을 쓰며 물었더니 실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갖고 싶으면 진짜 줄게요. 말만 해요.”

오늘 처음으로 듣는 그의 어색한 미소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신이 나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누웠다.

“됐습니다.”

“아, 네에.”

베개 아래에 손을 넣고 누운 도웅은 다리를 쭉 뻗었다가 책상다리를 했다.

“…이불은 됐고 식탁 아래에 깔린 러그, 어디서 샀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러그는 왜요?”

“사고 싶어서요.”

“아음. 작년에 산 거라 인터넷 기록 뒤져 봐야 하는데 잠시만요.”

테블릿pc를 가져오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자 어희가 이불을 슬며시 내려 도웅을 쳐다봤다.

“내일이나 모레 찾아주셔도 됩니다. 주무세요.”

“아. 너무 산만했나요? 죄송….”

도로 침대에 돌아온 도웅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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