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90)

술을 마시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눈 건 좋은데 술버릇이 좋지 못했다.

“……어희 씨, 자요?”

“…….”

많고 많은 술버릇 중 하필이면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도웅이었다.

술에 취해 해롱거리면서도 종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본인만 피곤한 술버릇은 도웅을 괴롭게 했다. 불면 최고 기록은 49시간이었는데 스무 살 대학 엠티 때 부어라 마셔라 하다가 집으로 돌아와 이틀을 내리 깨어 있었다. 부작용은 피로 누적.

가볍게 한 잔은 괜찮은데 오늘처럼 끝도 없이 달리다 보면 어느샌가 정신이 또렷하고 잠이 오질 않았다.

“…….”

“…….”

심지어 지루함까지 느끼는 중이다.

아무런 할 일 없이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었더니 무척이나 심심했다. 수련회의 묘미는 밤에 몰래 노는 재미가 아니던가. 그러나 놀 만한 유일한 상대는 자고 있었다.

어수선하게 돌아다녀서 그의 잠을 깨우는 건 내키지 않아 얌전히 누워있기로 했다. 머리맡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들어 밝기를 최저로 낮췄다.

“…….”

별스타그램에 한 시간 동안 시간을 허비한 도웅은 핸드폰을 내려놨다. 계속 핸드폰 액정을 보고 있었더니 눈이 피곤했고 무엇보다 손목이 아팠다. 두 시간 동안 빵 반죽을 치대도 아프지 않았던 손목과 손이 아팠다.

누운 방향을 돌려 어희와 비슷한 자세를 취했다. 두 시간 후면 카페에 나가야 했기에 몸이라도 편하게 있어야 했다.

한 번을 뒤척이지 않고 잠을 자는 어희가 조금 신기했다.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얌전히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가만히 누워있기가 좀이 쑤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고 덮고 있는 이불을 한 번씩 발로 차, 균형을 맞췄다. 인내심은 인내할수록 늘어난다고 했던가? 체감 시간이 제법 길어지자 자연스럽게 자는 시늉을 할 수 있었다.

이불 균형도 알맞았고 발가락도 시원하게 빼꼼 나와 있었다. 과하게 푹신하지 않은 매트리스에 몸이 찰싹 달라붙어 미동하지 않고 눈만 감은 상태로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거 같은 때, 문득 옆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듯 옅고 짧은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집에 가나…?

얼굴을 간지럽히고 지나간 바람만큼 짧은 의문이 스쳤다. 자는 줄 알았던 사람이 돌연 눈을 뜨고 물으면 놀랄 거 같아서 계속 자는 척을 이어갔다.

지금쯤이면 술도 다 깼겠고 알아서 집 찾아가겠지, 싶었다. 그렇게 작은 어수선함을 느끼고 있을 때, 어제 맡았던 달콤한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어희의 코트에서 풍겼던 달달한 향이었다. 기껏해야 이부자리 정리를 끝낸 줄 알았는데 벌써 코트까지 챙겨 입은 모양이다…, 라고 열심히 추리하는 와중에 예고 없이 머리카락 속으로 커다란 손이 훅 들어왔다. 도웅은 눈가를 움찔 떨었다.

“도웅 씨, 저 갑니다.”

“…….”

“좀 주무세요.”

“…….”

탁. 무드등 스위치가 내려갔다. 단내가 사라졌고 침실 문 너머로 도어락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뒤이어서 들렸다.

도웅은 한참 동안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다가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무드등이 꺼져, 어둑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침실 한쪽 테이블에 올려놓은 미니어처, 디저트 웅 카페의 조명이 은은하게 침실을 비추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희가 켜고 간 모양이다. 다락방 같은 아늑함이 더해진 침실에서 도웅은 기껏 잡아놓은 이불 균형을 헝클어 한껏 끌어모아 얼굴을 박았다.

“와 씨, 부끄러워.”

어희라서 자는 척 한 걸 들킨 거 같다. 차라리 진작 눈 뜨고 집에 가냐고 물어볼 걸, 괜히 자는 체했다. 

뒤늦게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어찌할 줄을 모르다, 애꿎은 이불만 퍽퍽 찼다.

* * *

술을 마시고 밤을 새워도 피곤함보다 창피함이 커, 무사히 카페 오픈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틈틈이 시간이 날 때면 제일 안정감이 큰, 주방 구석에 콕 박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오픈 시간부터 어희가 주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와중에 손은 움직여, 어희가 갖고 싶다 한 러그 정보를 찾기 위해 인터넷 쇼핑 기록을 뒤졌다.

러그 전용 판매 사이트까지 찾아본 결과 다행히 알아낼 수 있었다.

“사장님 로얄 주문 들어왔어요.”

양반은 못 되는 어희의 주문 소식이 직원 영호를 통해 들어왔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저녁 시간에 첫 주문이라니. 어희답지 않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어젯밤 주야장천 알콜을 달린 걸 생각하면 납득이 간다.

주문 영수증을 받고서 크루아상과 휘낭시에를 예쁘게 담아냈다. 가로로 기다란 종이 백에 디저트 상자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서 마지막으로 얼음 선별 과정을 거쳤다. 아이스 스쿱에 한가득 퍼 올린 얼음 중에서 모나지 않고 제일 반짝이는 얼음을 골라냈는데 예전만큼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게 바로 숙련자의 경험치 같아서 뿌듯하기까지 하다.

오더 테이블 아래 선반에 둔 흰색 헬멧을 머리에 쓰는 걸 발견한 직원들은 하나같이.

“다녀오세요~”

“사장님 오는 길에 붕어빵 사주시면 안 돼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인사를 건넸다.

이제는 직접 배달까지 다니는 걸 모든 직원이 알았다. 딱히 숨기려고 노력한 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도웅은 약간 떨떠름한 눈길로 사장에게 붕어빵 심부름을 시키는 직원을 바라봤다.

“슈크림? 팥?”

“팥이요!”

“가게 보이면 사 올게.”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전동 킥보드에 탄 도웅은 자전거 동요를 흥얼거리며 어희의 집으로 향했다.

-띵동.

해장은 했으려나. 아직이면 같이 밥이라도 먹을까. 좋지 못한 자세로 종일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더니 등허리가 뻐근해, 슬쩍 허리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관문이 열리고 어희와 눈이 마주친 도웅은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배달왔어요.”

종이 백을 받쳐 든 도웅의 손보다 얼굴을 빤히 쳐다본 어희는 손가락으로 귀와 턱이 이어지는 사이를 긁적이고는.

“왜 또 도웅 씨가 옵니까.”

조금은 서운한 말을 했다.

“어희 씨는 제 특별 관리 손님이라서요.”

가게에 붙어서 쉴 틈 없이 계속 배달을 나가는 준영이가 안쓰러워, 라이더를 더 고용하려는 지금, 도웅이 오지 않았더라면 앞으로 사십여 분은 기다렸을 게 분명하다.

“잠도 안 주무시고.”

어희의 눈에는 피로나 수면 시간까지 보이는 모양이다. 새벽에 자는 척했던 게 무척이나 민망해, 도웅은 ‘하하, 하.’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어희의 눈은 곧 도웅의 머리에 쓰고 있는 헬멧으로 느긋하게 올라갔다.

“…음주운전 아닙니까?”

“네. 술은 다 깼으니까요. 시간도 많이 지났고….”

음주운전이라니, 그런 살벌한 소리를.

안전 속도를 철저하게 준수하는 도웅에게는 수치스러운 말이었다. 종이 백을 가까이 들이대며 채근했다.

“얼른 받아요.”

“예. 감사히 먹겠습니다. 들어오실래요?”

“아뇨. 붕어빵 심부름도 해야 해서 가봐야 해요. 해장은 했어요?”

“이제 하려고.”

어희는 넘겨받은 종이 백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디저트와 커피로 해장한다는 발상도 어희다웠다. 

한국인이라면 모름지기 시이원한 국밥 종류를 먹어야 든든할 텐데.

그렇게 현관문 앞에서 서로를 또랑또랑 쳐다보는 시간이 길어진 걸 깨닫고 도웅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갈게요. 악수 필요해요?”

대답보다 행동이 빨랐다. 덥석 손을 잡은 어희는 기쁜 사람처럼 슬쩍 미소를 짓고는 이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사포질하다 나와서 손이 좀 더럽습니다. 씻고 가세요.”

악수한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온 도웅은 지난번 어희 헛구역질 사건이 벌어졌던 욕실에 그대로 넣어졌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손에 묻어있는 정체 모를 녹색 분진보다 놀라운 건 빠른 속도로 신발을 벗은 자신이다. 하마터면 구둣발로 욕실까지 걸어올 뻔했다.

아마도 신발장에 있는 신발 한 짝은 뒤집혀 있을지도 모른다.

세면대에서 꼼꼼히 손을 씻고 물기를 닦은 뒤 나오자 어희가 앞에 서서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싱숭생숭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어정쩡하게 손을 들어 보였다.

“악수…, 또 필요해요?”

아래로 향해있는 어희의 손이 홀린 듯 올라왔다.

“손 씻고 와서 잡겠습니다.”

도웅의 어깨 옆, 욕실 문을 손등으로 밀어 열었다. 욕실 안으로 스쳐 지나간 남자에게선 꽃 향이 났다.

입장이 바뀌어 이번엔 도웅이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세면대 앞에 선 어희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거품 비누 펌핑이 세 번이나 이루어졌다. 손이 닳아 없어지겠다는 감상이 나올 정도로 어희는 헹굼과 비누칠을 반복했다.

“맞다, 맞다. 러그 어디서 샀는지 찾았는데, 가게 돌아가면 링크 보내놓을게요.”

주방 구석에서 세운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려 찾은 거라 안타깝게도 지금은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었다.

물소리가 뚝 멈췄다. 드디어 손 씻기를 끝낸 어희가 물기를 타올에 세심히 닦아내는 걸 본 도웅은 재 악수의 시간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이미 깨끗한 제 손을 옷에 문질렀다.

이제 와서 괜히 긴장되는 건 뭐란 말인가.

닿고 싶다는 어희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 도웅이 먼저 내민 악수였다. 그런데 미묘하게 떨린다.

옛날 유학 시절 축제를 즐기다가 지갑을 잃어버린 걸 발견했을 때처럼 떨렸다.

“…도웅 씨. 긴장 풀어요.”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어희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 예전에 지갑 잃어버렸을 때가 떠올랐어요. 유학 생활 중이었고 집에서 많이 먼 축제에 갔거든요. 그런데 집에 갈 차비도 들어있는 지갑을 잃어버려서 되게 막막했어요.”

“같이 간 친구 있었을 거 아닙니까.”

“혼자 놀러 갔어요.”

갑자기 흘러나온 옛날이야기에 흥미가 있는지 어희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물었다.

“거기서 친해진 친구가 무리에 끼워줘서 간식도 얻어먹고 차비도 빌려줬어요. 덕분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참 따뜻한 사람 많아요. 그쵸?”

결론이 이상하긴 했지만,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는 게 도웅의 소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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