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을 앞뒤로 살핀 도웅의 눈썹이 슬며시 위로 올라갔다.
“블라인드 레스토랑? 캄캄한 곳에서 밥 먹는 거?”
음식을 떨어트린다거나 얼굴에 묻혀가며 먹는 건 솔직하게 불호다.
“암막 없는 곳에서 그냥 식사하셔도 돼요.”
“그래? 그러면 뭐…… 알겠어.”
어희둥둥까지 붙일 정도로 큰 이벤트는 아니었으나 어희와 함께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바쁘다고 했으니 넌지시 시간이 되는지만 물어봐야지.
“그러면 나 일요일 점심 직전에 퇴근할게.”
도웅이 명함을 챙기자 다른 직원들이 소리 없는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그걸 고스란히 지켜본 도웅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귀여운 사람들….
어째서 이곳에 자신을 보내려는지 모르겠다마는 무슨 파티라도 준비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영호를 통해 일을 꾸밀 리 없지 않은가.
어쩌면 밸런타인데이라거나 화이트데이, 고백데이처럼 비공식적인 이벤트로 사장데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만 받을 순 없지. 보답을 위해 상품권이라도 구매해놔야겠다.
도웅은 흐뭇하게 직원들을 바라보며 명함을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날, 도웅은 어김없이 어희에게 배달을 갔다. 그러나 문을 열고 나온 어희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차마 일요일에 시간이 되냐고 묻기도 전에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얼굴…… 괜찮아요…?”
오해할 여지가 충분한 말에 어희는 상체를 뒤로 젖혀 신발 붙박이장의 거울로 본인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자 도웅이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아. 못생겼다는 게 아니라, 너무 피곤해 보여서.”
그 말에 어희는 반 박자 늦게 “아.” 하고 상체를 원위치시켰다.
“얼른 끝내고 싶어서 어제 밤을 새웠더니…. 걱정하실 만큼은 아닙니다.”
“엇. 그럼 이제 곧 끝나나요? 언제쯤?”
금방 끝나면 일요일에 함께 식사할 수 있겠다. 신이 나서 충혈된 분홍빛을 띤 어희의 눈을 올려다본 도웅은 괜한 말을 꺼낸 거 같아 뒤늦게 입을 합 다물었다.
“왜 묻습니까.”
도웅이 손바닥에 받쳐 든 종이가방에서 커피와 얼음 컵을 꺼낸 어희는 능숙하게 둘을 합쳐 빨대 없이 커피를 마셨다.
그는 어제와 비슷하게 검은색 반소매를 입은 채였고 목젖을 훤히 드러내놓고 있었다. 꿀꺽일 때마다 돌멩이처럼 툭 튀어나온 목젖이 함께 움직였다.
도웅은 숨을 죽인 채 그런 어희를 바라보았다. 본인에게도 있는 건데 어째서인지 어희의 것이 더 큼직하고 단단해 보였다.
“그으냥 물어봤어요. 그냥.”
‘그냥’을 강조한 도웅은 멋쩍게 뒤통수를 긁고 싶었지만 머리에 쓴 헬멧과 양손에 들고 있는 종이가방 덕분에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스리슬쩍 시선을 오른쪽 아래로 피했다.
“자. 얼른 받아요.”
현관문 앞에서 커피를 마신 어희는 컵 뚜껑을 딱, 소리가 나게 닫았다. 그리고는 다시 주섬주섬 종이가방에서 에그타르트 하나를 꺼내 베어물었다. 도웅은 종이가방을 어희쪽으로 더 내밀었다.
“어희 씨? 안 받아요?”
말없이 에그타르트를 까먹으며 멀뚱히 쳐다보는 어희는 보면 볼수록 불안했다. 잘 먹다가도 어느 순간 선 채로 잠들어버릴 것 같았다.
“좀 자는 게 어때요? 진짜 엄청 피곤해 보여요. 누가 툭 치면 바로 쓰러질 거 같은데.”
“칠 사람이 도웅 씨 말고는 없어서 괜찮습니다.”
“…제가 왜 쳐요?”
어이없다. 어릴 적에야 싸우면서 큰다지만 그다지 말썽을 부리면서 자라지 않았다. 진지하게 친구와 주먹까지 써가며 싸운 적은 기껏해야 한두 번 정도? 성인이 되고 나서는 누군가와 주먹다짐을 한 적은 맹세코 없다.
여태 나를 함부로 주먹이나 휘두르는 불한당처럼 보고 있었나? 그렇다면 실망이다.
다 먹은 에그타르트 비닐을 곱게 접어 종이백에 쏙 넣은 어희는 이번에 빨대를 꺼냈다. 얇은 비닐을 벗겨 내고 커피 뚜껑 중앙에 꽂아 마셨다.
“그럼 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네요. 그건 그렇고 정말 그냥 물어봤습니까? 일이 언제 끝나는지?”
뱉은 빨대 끝이 약간 납작한 형태로 눌려 있었다. 어희는 눈치챘다기보다는 감정을 보고서 확인 삼아 묻는 거처럼 보였다.
“뭐……, 이번 주 일요일에 밥이라도 먹을까 했죠. 저녁 말고 점심이요. 아는 사람의 사촌이 레스토랑 개업 전에 평가를 받고 싶어 해서.”
영호의 말을 그대로 옮겨 말했다.
“아~”
단순 감탄사 끝이 조금 길게 늘어졌다.
“…….”
“…….”
그게 끝이었다.
어희는 꾸준히 커피를 마셨다가 중간중간 디저트를 꺼내 먹었고 도웅은 충실히 손 테이블 역할을 해주었다.
숏 점퍼를 입은 도웅은 아파트의 서늘한 온도가 바깥보다야 따뜻했는데, 따뜻한 집 안에서 나온 어희는 추워 보였다. 더욱이 반소매의 가벼운 차림이지 않는가.
“아. 들어오실래요?”
얼굴을 마주한 지 이십 분이 지나서 권유를 받았다. 피곤하긴 한가 보다. 도웅은 거절했다.
“어서 들고 들어가요. 바쁜 거 아니에요?”
“바쁘긴 한데……. 도웅 씨 얼굴 보니까 일하기가 싫어서.”
피곤을 무겁게 짊어지고 있던 눈꺼풀이 내려갔다. 2초를 기다린 도웅은 황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어어, 눈 떠요! 눈 떠.”
요청대로 어희의 눈꺼풀이 움찔, 떨리더니 번쩍 올라왔다.
“안 잡니다. 눈이 건조해서 잠시 감고 있었어요. 도웅 씨.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이미 리뷰를 달아주는 시일을 늦추는 제안이 걸려있는 마당에 또 다른 부탁을 하겠다고? 도웅의 눈초리가 뾰족해졌다. 그리고 직원 영호에게 그랬던 것처럼.
“들어는 볼게요.”
어떤 부탁인지 궁금은 하니까 들어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텀블러 하나 드릴 테니 앞으로 커피는 일회용 컵 말고 텀블러에 주시면 좋겠습니다.”
의외로 어희 치고는 괜찮은 제안이다.
“저야 좋죠. 그럼 오늘 텀블러 받아 갈게요.”
“지금은 없습니다.”
“…….”
“일요일에 같이 점심 먹고 골라보죠. 오래 서 있게 해서 미안해요. 밤을 새웠더니 정신이 오락가락하네요. 조심히 가요.”
드디어 도웅의 손에서 종이가방을 받아 든 어희가 인사 후 현관문을 닫았다. 완전히 닫히기 직전, 피로가 몰려오는 듯 두 눈을 찡그리듯 감았다가 뜬 걸 보고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어우. 일정이 얼마나 빡빡하면 잠도 안 자고 저렇게 무리를 할까. 다 큰 성인, 그것도 동갑내기를 걱정하고 싶지는 않았음에도 저렇게 무리를 하는데 누가 걱정을 안 할까 싶다.
층수가 높아서 아래층에서 오는 엘리베이터를 한참 기다렸다. 1층을 누르고 문이 스르륵 닫히려 할 때 도웅은 급히 문 열림 버튼을 열었다.
“어어.”
일요일에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한 어희의 말이 이제야 생각나서였다. 피곤에 절어있는 사람을 데리고 모레 점심을 먹으러 가자니 작은 죄책감이 몰려온 탓이다.
그냥 쉬라고 할까?
생각하며 도웅은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
아니지. 가뜩이나 피곤한 사람 뭐하러 또 붙들러 가…. 내일 말하는 게 낫겠다.
다시 엘리베이터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무리하게 일정 소화하다가 오늘도 밤을 새우면 어쩌지?
문 열림 버튼으로 손을 갖다 댄 도웅은 멈칫하더니 누르지 않고 그대로 손을 내렸다.
“나 뭐하냐…….”
관리비는 1원도 내지 않는 놈이 남의 아파트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한 게 양심에 찔리면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두 살 먹은 어린 애도 아니고 본인 일정에 무리가 없으니 점심 약속을 받아들인 거겠지.
도웅은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엘리베이터는 총 세 번을 멈춰, 주민을 태웠다. 도웅은 괜스레 눈치가 보여 구석에서 어깨를 접어 공간 차지 비율을 줄였다.
* * *
일요일 점심 약속을 한 당일이 되어도 도웅은 여전히 불안했다. 그저께도 어저께도 배달을 가며 어희를 살폈는데, 그의 상태는 나아질 기미는커녕 오히려 죽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나빴다.
심지어 어제는 이야기 도중 선 채로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도웅이 어깨를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바닥에 이마를 박았을 것이다.
“하….”
카드 단말기의 디지털시계가 열 시 사십사 분이 되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11시에 보기로 하였으니 일 분이 지나면 카페를 나가야 했다. 나갈 채비는 다 했으니 몸만 나가면 된다.
“하아아아아아.”
우연히 마주친 시간이 44분인 것도 불안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어제 어희의 상태를 봤기 때문일까.
차라리 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불안하진 않았을 텐데.
아니다. 상상해보니 어제 배달을 가지 않았더라면 더 불안했을 거 같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배달 주문을 하는 어희가 주문을 안 한다면 119를 먼저 부르는 게 맞을지도.
“사장님. 얼른 나가요.”
오더 테이블에서 주문을 받는 직원 영호가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사십사 분이잖아. 이런 불안한 시간에는 못 나가. 일 분만 더 있다가……, 어 바뀌었다.”
때마침 바뀐 시간에 벌떡, 도웅이 의자에서 일어나 직원 영호의 등짝을 가볍게 손바닥으로 도닥였다.
“오늘 하루 고생 좀 해줘. 너희 사촌 누나분한테 내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라이더 면접은 네가 봐주고 밥은 뭐 알아서 잘 챙겨 먹으니까 걱정 안 할게. 나 간다….”
“내일 봐요, 사장님.”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해. 그리고 오늘 3201호는 주문 안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준영이 망고 좀 챙겨줘. 실한 걸로.”
“네에.”
“……나 진짜 간다?”
구질구질하게 미련을 두는 도웅은 절대 카페가 걱정돼서 그런 게 아니었다. 피곤한데도 어희가 고집을 부릴까 봐, 그게 걱정되었다.
직원 영호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약 삼 분가량을 얼쩡거린 도웅은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 시간까지 질질 끈 뒤에야 카페를 나왔다.
무심하게도 하늘은 맑았고 날씨는 무척 좋았다. 도웅은 내리쬐는 봄 햇살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걸음을 옮겼다.
시간은 끌만큼 끌었다. 어희한테 약속 취소 연락은 오지 않았으니 상태가 어떤지부터 확인 후 같이 밥을 먹으러 가든, 혼자 가든 결정하기로 했다.
“도웅 씨.”
비장한 걸음을 내딛는데 누군가가 팔목을 잡았다. 돌아보니.
“어, 어어, 어!”
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