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처럼 말을 흘린 도웅은 깜짝 놀랐다. 차라리 지금은 유명인이 된 옛날 대학 동기를 만나도 이렇게 놀라진 않았을 거다.
바로 어제까지 병자처럼 골골거리던 사람은 어딜 가고 오늘은 무척 개운한 얼굴이다. 게다가 혈색도 좋다. 아파트 단지 앞에서 졸고 있거나 쓰러져 있지 않으면 다행이라 여겼건만, 무려 카페 옆 건물까지 와있는 거로 보아 미리 나와 있었던 듯하다.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네요.”
도웅이 입을 벌리고 어, 어어만 연발하자 어희가 실소했다. 어색하게 웃는 모습이 진짜 어희다.
“뭐, 뭐야. 괜찮아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검지를 세워 어희를 가리켰다. 삿대질은 나쁘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자각이 늦었다.
무례한 손가락질을 거두려 할 때 어희가 덥석 잡아 아래로 내렸다.
“제가 안 괜찮은 적이 있었나요.”
“네. 어제도 그저께도 그 그저께도 안 괜찮았잖아요. 뭐야, 뭐예요?”
놀람이 서서히 사그라들자 이번에는 반가움과 동시에 분했다. 어희를 밤새 걱정하느라 정작 본인은 잠을 설쳤다. 두 시간 간격으로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꿈에서 귀신이 된 어희가 몽블랑을 먹고 싶다며 들러붙었기 때문이다.
“원래 이럽니다.”
“…원래 이렇다고요?”
“예. 한 번 밤을 새우면 좀 몰아서 새는 타입이라.”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24시간을 깨어 있으면 비몽사몽일 텐데 태평하게 ‘몰아서 새운다’라고 말한 어희는 참으로 놀라운 사람이었다.
주정이 잠 안 자기인 도웅이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맨정신이 아닐 때의 이야기다. 자고 싶어도 못 자는 불면.
“그게 가능해요?”
“예. 달에 한 번씩 그럽니다. 하다 보니까 되더라고요. 아. 전혀 안 잔 건 아니고 스물두 시간마다 두 시간씩 잡니다.”
“…….”
“오늘 자정부터 줄곧 열 시간 잤더니 개운하네요.”
오늘따라 꽃 향이 짙은 걸 보아 느긋하게 거품 목욕이라도 한 듯하다. 그간 걱정이 허무할 정도로 어희는 멀쩡했다.
“가죠.”
허무하긴 해도 쓰러지는 것보단 나은가?
훨씬 낫다.
단순하게 결론지은 도웅은 어희가 그사이에 잡아놓은 택시에 올라탔다.
영호의 사촌 누나라는 분은 대학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가게 개업을 준비 중이었다.
블라인드 레스토랑이라 지하에 차린 걸까.
도웅은 뒤따라 내려오는 어희의 발소리에 맞춰 계단을 타박타박 밟았다. 기다란 유리창이 달린 나무 문을 열자 문에 달린 황동 종이 쨍하지 않은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아. 영호가 말한 사장님 맞죠? 안녕하세요~”
다른 가게의 사장님에게 사장 소리를 들으니 어색했다. 낮에는 주로 식사와 카페로 영업하고 밤에는 바로 영업할 예정인 듯했다. 가끔씩 밴드도 부를 생각인지 작은 무대까지 있었다.
보편적으로 인사를 나누고 테이블을 안내받아 이동하려는데 계산대 앞에 놓인 미니 블랙 보드를 가만히 구경하고 있는 어희가 돌연 흥미를 보였다.
“블라인드 레스토랑, 재밌겠네요.”
며칠 만에 푹 잠을 잔 덕분인지 눈까지 초롱초롱 빛나 보였다.
“우리는 평범한 테이블에서 식사할 거예요.”
“아…. 그렇습니까.”
이내 관심을 끊은 어희는 세 걸음을 빠르게 걸어 넓혀진 거리를 좁혔다. 도웅은 테이블에 앉아 무심하게 메뉴판을 넘기며 힐끔 어희를 쳐다봤다.
“…….”
“…….”
꼿꼿하게 펴고 바르게 앉은 어희와 눈이 마주쳤다. 다시 메뉴판으로 시선을 원상 복귀시켰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메뉴라 그런지 마땅히 끌리는 게 없었다.
“뭐 먹을래요?”
어희가 파스타를 고르면 리조또를 고를 요량으로 물었다.
“그릴 폭립 먹겠습니다.”
“…….”
도웅은 다시 메뉴판을 펼쳤다.
적당히 어울리되 상반되는 메뉴를 시키려 했는데 폭립이면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 메뉴판 첫 장과 끝장을 두 번 왕복한 다음 호출 벨을 눌렀다.
“콥샐러드, 그릴 폭립, 쉬림프 오일 파스타, 레모네이드 하나, 당근 망고 주스 하나 부탁드려요.”
빠르게 주문을 수첩에 적고서 재확인 후 사라지는 사장님의 꽁무니를 쫓는 어희의 시선을 도웅이 쫓았다.
“아는 사람이에요?”
그럴 리 없겠지만, 주변에 그다지 관심을 쏟지 않는 어희치고 제법 길게 쳐다본 게 수상했다.
“아뇨.”
“그런데 왜 그렇게 오래 봐요. 용건 있는 사람처럼.”
“계속 쳐다보면 블라인드 룸으로 한 번은 권해주지 않을까, 해서 쳐다봤습니다.”
주문하는 순간에도 집요하게 쳐다보더라니, 목적이 있었다. 그의 솔직한 말에 도웅은 헛웃음을 흘렸다.
“많이 궁금해요?”
“예.”
“그러면 옮겨달라고 할게요.”
굳이 불편함을 감수하며 음식을 먹기는 싫었으나 동행해준 사람이 이렇게까지 궁금해하면 제 고집만 피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호출 벨을 누르자 아까보다 늦게 도착한 사장에게 블라인드 룸으로 바꿔달라 요청했고 바로 옮길 수 있었다. 혹시 몰라서 미리 준비해놓은 듯하다.
좁은 암막 커튼을 걷자 문이 나왔고 문 앞에는 이중으로 암막 커튼이 쳐져 있었다. 도웅은 사장의 팔을 잡고서 간신히 의자에 착석했다.
눈앞에 손을 흔들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도웅은 모든 감각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끼며 테이블에 양손을 올리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약한 빛이 새어 들어오더니 사장이 어희를 데리고 들어와 맞은편에 앉혔다.
“적외선 cctv가 설치되어 있으니 주의해주시고요. 비상시에는 당황하지 마시고 테이블 아래에 있는 버튼을 눌러주시면 전체 불이 켜질 거에요. 식사 끝내고 나오실 때도 여기, 만져지시죠?”
손수 손을 잡아 테이블 아래에 톡 튀어나온 플라스틱 스위치까지 가져다준 사장은 금방 음식을 가져오겠다며 나갔다. 들어올 때 사용되었던 문이 잠잠한 걸 보아 스텝 전용 통로가 따로 있는 듯했다.
“…어때요? 블라인드 룸은.”
“…….”
“어희 씨?”
테이블에 올려놓은 손을 앞으로 쭉 뻗었더니 어희의 손끝에 닿았다. 도웅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손끝 감촉에만 의지해, 어희가 앞에 있다는 걸 느끼는 기분이, 묘했다.
“왜 말이 없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생각 중이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흐음. 어희 씨. 이런 어둠 속에서도 감정이 보여요?”
닿아있는 손끝이 돌연 사라졌다. 물을 마시는지 작게 꿀꺽, 액체류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 손끝이 닿았다. 손톱 위에 안착한 손가락을 치울 필요가 있을까. 그냥 두기로 했다.
“아뇨. 안 보입니다.”
“그렇구나….”
그래서 음식 바꿔 달라는 말이 없는 건가.
다른 말 없이 앉아 침묵을 지켰더니 어디선가 맛있는 음식 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했다. 도웅은 어희의 손 밑에 깔린 제 손가락을 까딱였다.
“곧 나오려나 봐요. 주문할 땐 배가 안 고팠는데 막상 음식 냄새 맡으니까 허기져요.”
“저는 처음부터 배고팠습니다. 아침도 못 먹어서.”
“…티브이 같은 데서 보면 막 서로 먹여주다가 다 묻히고 그러던데…….”
우리는 그런 거 하지 맙시다, 라고 미리 말하려 했다.
“아. 우리는 각자 먹는 걸로 해요.”
다행히 어희도 묻히며 먹고 싶진 않은 모양이다. 다행이긴 한데, 쓸데없이 말끝을 흐리는 바람에 왠지 원한 거처럼 보였을까 봐 신경이 쓰였다.
테이블에 접시가 놓이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따뜻한 온기가 앞에서 느껴졌다.
“맛있게 드세요~”
친절히 손에 식기를 쥐여준 사장님은 도르륵, 바퀴를 끄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나눠드릴 테니 드세요.”
육질이 부드럽게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대강 파스타 면을 헝클어, 풀어내려다 허공과 접시만 긁었다. 도웅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줄 수나 있겠어요?”
“…….”
“블라인드 룸은 잔을 플라스틱으로 주나 봐요. 하긴 괜히 유리잔에 줬다가 깨면 대형 사고지. 이렇게 어두운데.”
“그……, 아까처럼 스푼 뻗어보세요. 나눠드릴게요.”
어떻게든 주고 싶은 모양인지 스푼까지 뻗어보라 지시하는 어희가 재미있어 테이블에 놓인 식기 중 더듬더듬, 스푼을 찾아 소심하게 뻗었다. 괜히 쭉 뻗었다가 어희를 찌르면 큰일이다.
챙. 스푼 끝에 미약하게 다른 식기가 닿았다. 어희가 뻗었으니 닿는 게 당연한데, 이 작은 행동이 왠지 재미있고 기뻤다. 도웅은 씩 미소 지었다.
“자, 얼른 줘요.”
도웅은 칼싸움처럼 맞닿아있는 어희의 식기를 가볍게 쳤다.
“살 발라서 스푼에 올려줄 테니 가만히 계세요.”
신중한 목소리에 도웅은 칼싸움을 멈추고 어희의 말 대로 가만히 들고만 있었더니 정말 끝에 조금씩 무게가 추가되고 있었다.
“대충 된 거 같습니다. 먹고 싶으면 또 줄 테니 스푼 내밀어요.”
어차피 폭립인데 손으로 뜯어 내밀어주면 해결되지 않을까?
도웅은 떠오르는 의문을 접어두고 대답했다.
“네, 네. 잘 먹을게요.”
적당히 덜었겠거니, 스푼을 입으로 넣는 순간 고기 조각이 우수수 파스타 접시로 떨어졌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고기로 탑이라도 쌓았어요?”
“맛없습니까? 괜찮은데요.”
입맛에 맞는지 접시에 포크가 긁히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그 뜻이 아니라고 설명하려던 도웅은 앞이 안 보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기고 파스타를 먹었다.
단순하고 간단한 쉬림프 오일 파스타는 가끔 폭립 맛이 났다. 그럴 때마다 황당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거 어희둥둥인가요?”
어희둥둥은 아니었다. 우연히 직원의 사촌 누나가 레스토랑을 오픈한다기에 화환 대신 방문한 거였고 간단하게 혼자 가기 뭐해서,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하려 했던 거다. 그러나 도웅은 그렇다고 대답하는 걸로 어희둥둥에 편승하기로 했다. 어희가 만족했으니 이 정도 작은 거짓말 정도는 해도 될 거 같다.
“기대한다고는 했지만…, 저와는 안 오실 줄 알았어요.”
마땅히 같이 갈만한 친구가 어희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좋아하는 분이랑 올 줄 알았거든요. 아. 도웅 씨는 없다고 하셨지만.”
아직도 이상한 오해를 하는 어희의 풀기보다는 “예에, 그러셨군요.” 성의 없이 넘겼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요.”
무엇이든 서투른 청년의 수줍은 고백처럼 들려서 괜히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