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젤리 같은 말랑함이다.
깜깜한 어둠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더욱 말랑말랑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렇게 어두우면 그런 상상하지 않나요.”
도웅이 말랑한 감상에 빠져있는 그때 어희는 또 다른 말을 꺼냈다. 손도 보이지 않는 어둑한 공간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깔렸다. 당근 망고 주스를 마시며 귀를 기울였다.
“음. 아닙니다.”
“뭔데요. 말해봐요. 듣고 있었는데 도중에 끊네.”
싱겁게 말을 끊어버리려는 걸 타박하자 중요한 말이 아니라며 한사코 거절하던 어희는 목소리 크기를 낮췄다. 가뜩이나 낮은 목소리에 크기까지 줄어드니, 무슨 옛날이야기를 듣는 느낌이다.
“아까 나간 줄 알았던 사장님이 도웅 씨 뒤에 서서 지켜보는 그런 상상 말입니다.”
“…….”
미친. 괜히 물어봤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그렇다고 뒤를 돌아 확인해보려 해도 보이지 않을 게 분명하고 팔을 휘두르다가 무언가에 부딪치면 그건 그거대로 무서워서 시도하고 싶지 않다.
“참 다행이죠.”
“뭐…, 뭐가 다행이에요.”
여기서 다행인 점을 찾을 수가 있나? 레모네이드를 마시는지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음. 감정이 안 보인다는 거? 공평하게 안 보이니까 뒤에 누가 서 있든, 앉아 있든 신경 안 써도 되잖습니까.”
신경을 안 쓰기에는 이미 늦었다. 계속해서 뒤가 불편했고 어희의 상상력에 도웅의 상상력까지 살을 붙여 몸집을 불려갔다.
“레모네이드에서 폭립 맛이 나는 게 아무래도 아까 흘린 모양입니다.”
소름 돋는 말을 해놓고 정작 본인은 레모네이드나 홀짝이고 있다니.
“불 켤게요.”
대답은 듣지 않고 테이블 아래에 붙은 스위치를 딸깍, 켰다. 순식간에 룸이 환해졌다.
갑작스럽게 밝혀진 빛에 적응하지 못한 어희는 눈을 찡그리며 감았고 도웅은 찡그리면서도 억지로 뒤로 몸을 돌렸다.
“후……. 어희 씨, 이만 가요.”
다행히, 당연히 없었다. 어희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괜히 식은땀만 뺐다. ‘상상’이라기에 미니어처 제작자는 어떤 귀여운 상상을 할까, 감히 지레짐작하며 그를 보챈 자신이 미워졌다.
어희의 레모네이드 잔에는 정말 폭립 한 조각이 얼음과 함께 동실동실 떠 있었다. 그런데도 레모네이드는 절반이나 사라져 있었다.
“도웅 씨, 여기. 닦아요.”
티슈를 건네주며 본인 입술 위를 톡, 톡 두들기길래 홀린 듯 입술을 문질렀다. 하얀 티슈에 폭립 소스가 묻어났다.
“오늘 어희둥둥 성공인가요?”
어희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덕분에 날카로운 눈매가 약간 부드럽게 풀어져 그의 어색한 미소를 조금 자연스럽게 만들어냈다.
“실패한 적 없습니다.”
“그럼 슬슬 리뷰를…….”
조금의 틈이 보인다 싶으면 악착같이 리뷰를 권유하는 도웅이다. 어희는 뻔뻔하게도 못 들은 척 입구로 향했다.
“아, 리뷰 줘요, 리뷰, 리뷰, 리뷰.”
아예 생떼 작전으로 정했는지 도웅은 그를 따라다니며 떼를 쓰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사장님을 마주쳐, 민망함을 담은 억지 헛기침을 했다.
도웅은 가게를 구경하고 빈 테이블에 앉아 본격적으로 후기를 남겼다. 핸드폰이나 인터넷처럼 비대면 후기가 아닌 얼굴을 맞대고 좋은 점을 말하자니 쑥스럽고 아쉬운 점을 말하자니 미안했다.
“…그래서, 차라리 카페 메뉴는 이걸 빼고 간단하게 이걸로……. 애니메이션 피규어보다는……, 소품샵 명함 몇 개 드릴 테니…, 알바생은 꼭 잘 확인…….”
그래도 성심성의껏 장점과 아쉬운 점을 줄줄이 늘어놨다. 상대방이 경청의 자세로 나오니 도웅 또한 삼십 분가량 세세하게 지적하고 들었다. 대단한 사업가는 아니었으므로 블라인드 레스토랑이 가진 고유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인테리어와 소품 의견을 제시하고 소소한 메뉴 피드백을 해주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친해져 삼십 분을 더 떠들고서 레스토랑을 나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어희까지 한 시간 동안 기다리게 한 걸 사과했다. 적당히 맛있었다, 같은 인사치레만 하고 나오기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직원 영호의 친척이었고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어희에게 어필도 하고 싶었다.
리뷰는 이렇게, 지극 정성으로.
나중에 어희에게 받게 될 리뷰가 이랬으면 좋겠다. 장점만 가득한 게 아니라, 개선점도 함께 말해주는.
“왜 그렇게 봅니까.”
“…아니에요.”
리뷰를 떠올리자 조바심이 나서 뱃속이 간질거렸다. 계속 보고 있으면 그의 핸드폰을 뺏어서라도 직접 리뷰를 달 거 같은 충동이 생겨 급히 눈길을 돌렸다.
“텀블러 사야 하죠? 여기서 팔 거 같은데, 가볼까요?”
대학로 중심에 있는 커다란 잡화점을 핸드폰으로 띄워 보여줬다. 사실 널리고 널린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텀블러를 사는 게 제일 간단했다. 그러나 도웅의 자존심이 허용치 않았다. 어희가 쓰는 텀블러에 다른 카페 브랜드가 박혀있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심지어 그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줘야 하는 건 더더욱.
도웅은 어희를 데리고 대학 중심가로 향했다. 저녁 시간이 되자 인파가 더욱 많아졌다. 어깨를 좁히고 팔짱을 껴도 어희는 계속 지나가는 사람들과 부딪쳤다. 그의 미간 사이 골이 깊어진 걸 보고 도웅은 손목을 끌어 빠른 걸음으로 인파를 헤쳐 나갔다.
“진작 빨리 걸어올 걸 그랬어요.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 엄청 많네.”
잡화점에 도착해서 손목을 놔준 도웅은 텀블러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코너를 구경했다.
“어떤 게 좋아요?”
“도웅 씨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세요.”
“제 마음에 들어서 뭐 해요.”
“커피를 담아주는 건 도웅 씨잖습니까.”
“…….”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와인 색 550ml짜리 텀블러를 골라 어떠냐 물었더니 용량이 작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무난한 검은색 1리터 텀블러를 골랐더니 수락이 떨어졌다. 어희는 검은색과 흰색 텀블러 두 개를 구매했다.
간단하고 빠른 텀블러 쇼핑을 마치고 잡화점에서 나온 도웅은 엄청난 인파를 보며 물었다.
“차라도 한잔할래요, 아니면 이대로 해산?”
여기에도 저기에도 카페가 눈에 많이 띄었다. 단연 시간을 보내기에 제일 만만한 것도 카페였다.
“아니면 대학로니까 연극이라도 볼까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학로까지 올 만한 일이 손에 꼽았다. 간만에 연극도 괜찮아 보여 제안했더니 어희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 제일 빨리 볼 수 있는 연극으로 고릅시다. 검색해보기 금지.”
계획을 연극 보기로 정하고 어떤 연극을 볼지는 정하지 않았다.
재미가 보장된 연극을 포기하고 모험을 해야 하나?
“재밌겠다! 좋아요. 아트 센터로 가요.”
신선한 재미가 있었다. 곧바로 어희와 함께 아트 센터로 향했다.
직원에게 무건 제일 빨리 볼 수 있는 연극을 요구하자 표 두 장을 받을 수 있었다.
오 분 후, 입장. 화장실도 급하게 다녀와야 할 정도로 긴박했다. 간신히 시간 맞춰 입장 줄을 선 도웅과 어희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가 짧게 웃었다.
괜히 앞에 앉았다가 뒷사람이 불편할까 봐 적당히 뒷좌석으로 예매했는데 관람하기에 불편함이 없었고 오히려 좌석이 여유로워서 보기 편했다.
좁고 딱딱한 의자가 불편한지 어희는 가끔 자세를 바꿨다. 그럴 때마다 도웅은 힐끔, 어희를 구경했다. 연극은 지루했는데도 어희는 간간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기도 했다.
어느 부분이 재밌어서 웃는지 궁금해, 다시 연극에 집중하면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게 재밌다고?
연극이 끝나고 인파에 묻혀서 밖으로 나왔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밤과 낮의 어중간한 색감에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어땠어요?”
영화나 연극을 보고 나오면 묻는 통상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이미 도웅은 답을 정해놓고 있었다. 별로, 지루함, 시시함 같은 감상평일 게 뻔했다. 다른 사람과 닿지 않게 주의해서 나오던 어희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좋았습니다. 아주.”
“…어느 부분이?”
도저히 그의 취향은 종잡을 수가 없다.
연극 초중반부터 도웅은 좌석이 여유로웠던 이유를 깨달은 참이다.
“꿈으로 가득 차서 반짝거리는 게 좋았습니다.”
아. 그래서 좋다고 한 거구나.
꿈으로 가득 차서 반짝인다는 말이 어희의 눈에는 정말 그렇게 보인 건지 아니면 이들의 열정을 비유한 건지 헷갈렸다. 다만 지금 어희도 반짝이고 있다는 걸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도웅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웃어 보였다.
그러자 어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방금까지 연극이 좋다며 입술이 신기한 호선을 그었으면서 이제는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왜요? 가스 불이라도 켜고 나왔어요? 아니면 지갑이라도 잃어버렸나?”
놀라도 너무 놀란 눈치라 덩달아서 놀란 도웅은 그에게 계속해서.
“배 아파요? 화장실? 아는 사람이라도 봤어요?”
“…어, 아무 일도 아닙니다.”
아무 일도 아니라던 어희는 놀란 표정 그대로 택시까지 잡아탔다. 그의 놀란 눈매와 슬며시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진짜 아무런 일도 아니에요? 표정은 그게 아닌데….”
앞만 쳐다본 어희가 서서히 고개를 돌려 도웅을 쳐다봤다. 검은색에 가까운 동그란 진갈색 눈동자는 어째서인지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좋은 일이, 떠올라서 그렇습니다. 괜찮아요.”
좋은 일이 있다는 사람치고는 넋이 나가 보였다. 좋아도 너무 좋은 일인가 보다, 넘긴 도웅은 화제를 돌렸다.
“흠…. 집에 가서 뭐 할 거예요? 일?”
“생각할 거리가 생겨서 생각할 겁니다.”
퇴근 시간이라 차가 막힌다는 기사님의 말처럼 도로가 꽉꽉 막혔다. 차라리 지하철을 이용할 걸 그랬나, 싶다가도 옆에 어희를 생각하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택시가 나은 선택이었다.
게다가 같은 동네에 살다 보니 돌아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아서 참 좋다.
도웅은 어희와 단둘, 아니 기사님까지 셋인 거북이 택시가 나쁘지 않다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