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도웅은 이제…, 아니 진즉 어희라는 사람이 익숙해졌다. 매일 얼굴을 보고 가끔 어희둥둥을 하며 바깥나들이를 해서 그런 걸까. 친밀도가 마구마구 치솟았다. 그래서 이제는 어희둥둥을 할만한 게 떠오르지 않아, 곤란했다.
디저트 웅 미니어처를 무드등 삼아 침대 위에서 작은 수첩에 볼펜으로 점 세 개를 찍어낸 도웅은 난감함에 골머리를 앓다가 그동안 함께한 것들을 하나씩 나열해봤다.
“끄응. 이제 뭘 할 수 있지.”
몽블랑, 식사, 전시회, 쇼핑, 연극 등 이제는 안 한 걸 찾는 게 더 힘들다. 어희둥둥이 아니긴 해도 해외여행까지 다녀오지 않았던가.
“절친이네, 절친이야.”
이 정도면 절친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팔락, 수첩을 앞장으로 넘기자 이전에 써놓은 어희둥둥 목록이 나왔다. 한 장을 앞으로 넘겼더니 아기자기한 케이크 디자인이 나왔다.
예전 토끼끼 굿즈와 물물교환용으로 만든 조개 화폐 케이크였다. 수첩을 파르륵 넘기다 침대 뒤로 드러누웠다. 양팔을 올린 상태로 멍하니 천장을 올려봤다. 당분간 어희둥둥은 휴식기에 접어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나의 절친은 뭐 하고 있으려나…….
왼쪽으로 몸을 돌린 도웅은 눈을 깜박였다. 불과 며칠 전, 침대 바로 왼쪽 옆에서 어희가 폭신한 이불을 깔고 자고 간 게 떠올랐다.
방금은 어희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이번에는 어희가 보고 싶었다. 천천히 눈을 굴리는 도웅의 시야에 지나치게 예쁜 디저트 웅 미니어처가 들어왔다. 어쩌면 지금 어희가 보고 싶다 느낀 건 토끼끼 마법일지도 모른다. 눈을 깜박인 도웅은 손바닥으로 제 머리통을 탁, 탁 쳤다.
잡생각아, 날아가라~ 훠이 훠이~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오늘. 도웅은 새벽이 아닌 낮에 나와 있는 어희를 발견했다. 쓰레기봉투를 내다 놓는 카페 옆 골목, 땅에 자란 풀에 물을 주고 있었다.
싹을 발견한 건 바로 이틀 전이다. 디저트 웅 흡연 구역이기도 한 이 골목에서는 종종 직원들이 나와 흡연을 하곤 했다.
이틀 전. 도웅은 흡연하는 직원을 따라 나와 수다를 떨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작고 귀여운 연녹색 싹이 눈에 들어왔다.
쓰레기를 두는 벽과 거리를 두고 핀 싹을 보고 도웅은 감상에 빠졌다.
이제 진짜 봄이구나.
새해에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움트는 작은 생명력을 보자 감성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물을 주기 시작했다.
하루 두 번. 아침, 저녁으로 컵에 물을 담아와 물을 주었다. 오늘 새벽에는 정신없이 바빠서 물을 주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지난 지금. 물을 주다가 발견한 것이다. 어희를.
일회용 황사 마스크를 쓴 어희가 쌩하니 대로변을 지나갔다. 큰 키와 느슨하게 묶인 머리 뭉치를 보고서 단번에 알아봤다.
해가 쨍쨍하게 떠 있는 낮에 돌아다니는 어희를 볼 줄은 몰랐던 터라 자연히 오늘 만나기로 했던가? 싶어 고개를 기울였다. 당연히 아니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은 아니고 어디를 가는 거지.
골목을 빠져나온 도웅은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띌 만큼 큰 어희를 따라갔다.
지하철역을 지나고서 도웅은 그림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마치 스토커 같지 않은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멈칫. 어희의 걸음이 멈췄다.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어희는 좌우를 살피더니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여보세요.
“…….”
낮은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흘러나왔다. 택시를 타고 로얄 골드 펠리스로 배달을 갔을 적이 떠올랐다. 그때는 직원인 줄 착각했었는데 잠깐 돌았나 보다. 이 목소리를 어떻게 직원이랑 착각할 수 있는지, 황당해서 소리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도웅 씨?
그늘진 곳에 서서 핸드폰을 볼에 갖다 붙인 어희에게 다가갔다. 같이 밥이나 먹을까.
“아, 어희 씨. 지금 뭐 해요?”
-으음. 말하기 곤란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우뚝 걸음을 멈췄다.
“왜… 요?”
어디서, 어떻게 전화를 받고 있는지부터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까지 다 알고 있는 도웅은 망설였다. 말하기 곤란한 상황이면 아는 체하지 말고 도로 돌아갈까.
“많이 곤란해요?”
-많이까지는 아니고……. 뭐 좀 사러 갈까 합니다.
“아하…. 뭘 사러 가는데 곤란하기까지 해요?”
속옷이라도 사러 가나? 같은 남자끼리 부끄러울 게 뭐가 있다고. 하여튼 유난이다.
-먹을 거 사러 갑니다.
쿵.
말 그대로 쿵, 도웅의 심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먹을 걸 사러 가? 혹시 디저트 웅을 배신할 셈인 걸까?
“밥? 밥 사러 가요?”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가다듬었다. 먹는 게 케익이나 커피만 있는 건 아니다. 밥, 음료수, 하다못해 과일을 사러 가는 거일 수도 있다.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방금 떨어트린 거 같은 심장을 찾아 애먼 바닥을 두리번거렸다.
-단 거… 사러 갑니다.
“…….”
단 거……?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도웅은 아예 작정하고 몸을 숨겼다. 어디 얼마나 맛있는 디저트 집을 찾아가는지 알아야겠다.
어희는 끊어진 핸드폰을 장시간 쳐다보다가 주머니에 넣었다. 오로지 전화 통화를 위해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고 도웅도 은밀하게 따라갔다.
상황만 보면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도웅은 속이 쓰리다 못해 아렸다.
리뷰도 받지 못했는데 단골을 영영 잃게 되었다. 감히 디저트 웅의 단골을 빼돌리려는 간 큰 카페에 눈도장이라도 찍어줘야겠다는 결심으로 열심히 뒤를 밟았다.
주변 카페를 잡아먹으며 몸집을 불린 디저트 웅의 사장 도웅은 질투에 눈이 멀어 십 분에서 삼십 분, 삼십 분에서 한 시간을 걸었다.
버스나 택시를 타지 않는 어희의 걸음을 열심히 뒤쫓느라 지치거나 힘들 법하건만 도웅한테는 오히려 투지를 불태우는 장작이 되었다.
이렇게 먼 거리를 배달도 안 시키고 직접 걸어간다고? 십 분 거리인 내 카페는 꼬박꼬박 배달을 시키면서?
리뷰를 약속했으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도웅은 서글프기까지 했다. 그리고 드디어 어희가 한 가게에 들어갔다.
“…….”
[럽럽초코] 라는 촌스러운 간판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초콜릿 재료 소매] 라고 적혀있었다. 바깥에는 각종 포장지와 박스, 플라스틱 몰드가 나와 있다. 도웅은 허, 하고 헛숨을 흘렸다.
초콜릿 토끼끼라도 만들려는 모양이다. 어희를 다른 카페에 뺏길까 봐 집요하게 뒤를 밟은 도웅은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했다. 대로변으로 나와 버스를 타고서 카페로 돌아온 도웅은 초콜릿 토끼끼를 기대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초콜릿은 제빵만큼 자신 있는 분야였다. 유학 시절 수제 초콜릿으로 쏠쏠하게 용돈벌이를 했을 정도로.
한때 템퍼링하면 도웅이었고 도웅하면 템퍼링이었다. 나중에 어희가 초콜릿에 관해 물어온다면 얼마든지 전문 지식을 뽐내며 도와줄 수 있었다. 벌써부터 어희가 감탄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 거 같다.
다음날 도웅은 일찍이 배달 갈 준비를 했다. 전동 킥보드를 꺼내 놓고 헬멧을 쓴 채로 납작하게 접혀있는 종이가방을 미리 펴놨다.
“사장님……. 주말에 뭐해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새싹이에게 줄 물을 컵에 받고 있는데 직원 영호가 주말 일정을 물어왔다.
기시감을 느끼며 일한다고 대꾸했더니 재고를 확인하는 척 냉장고를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낯가림 심한 아이가 애써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처럼 보여 속이 상했다.
“이번엔 또 왜?”
“그게…, 펫 박람회 관심 있으신가 해서요.”
뜬금없이 펫 박람회? 도웅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절대 없는데?”
도웅은 강아지든 고양이든 소동물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사랑을 받으며 가족의 일원이 된 반려동물도 마찬가지다. 순진무구한 눈을 마주하면 괜히 애잔하다. 그래서 항상 피해 살았다.
지나가는 길에 강아지를 만나면 눈을 질끈 감았고 펫샵이 생기면 길을 빙 돌아갔다.
“그럼 아쿠아리움은 관심 있으신가요.”
“절대 아니?”
아쿠아리움이든 동물원이든 마찬가지다.
커다란 초식 동물을 보면 갇혀 있는 게 짠했고 육식 동물은 무섭다. 수족관은 크든 작든 그냥 불쌍했다.
그래서 어희가 만든 토끼끼가 마음에 들었다. 토끼도 원숭이도 아닌 작은 캐릭터가 동물을 떠올리게 하지 않았고 하우스는 하나같이 따뜻한 색뿐이다.
“왜? 아. 주문 들어왔다.”
기다리고 있었던 어희의 배달 주문이 들어왔다. 바로 수락을 누르고 메뉴를 준비하는 도웅의 곁을 직원 영호가 맴돌았다.
“뭐야, 왜 자꾸 따라다녀.”
서비스로 나갈 음식을 꺼낸 도웅은 냉장고 문을 닫자 바로 옆에 서 있는 영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일하는데 걸리적거리더니 기어이 사람을 놀라게 만든다.
“뭔데. 빨리 말해.”
그러자 어울리지 않게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는.
“주말에 드라이브라도 가는 게 어때요….”
“너하고? 무슨 고민 있어?”
진지하게 들어 줄 용의는 있다. 개업 때부터 함께 한 의리가 있는데 주말 드라이브야 얼마든지 가줄 수 있다.
“몇 시가 좋아?”
“점심시간이요….”
“그래, 그럼. 카페는 애들한테 맡기고 갔다 오자.”
듬직하고 성실한 영호가 고민 상담을 할 정도면 쉬운 고민은 아닐 것이다.
차곡차곡 종이가방에 디저트 상자를 쌓고서 어희의 텀블러에 얼음을 담았다.
투명한 플라스틱 컵이 아니다 보니 굳이 얼음 선별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었다.
“아뇨. 사장님 혼자… 가시면 안 되나요.”
이건 또 무슨 말이람.
투샷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뚝딱 만들어 텀블러 뚜껑을 닫은 도웅이 직원 영호를 쳐다봤다가 이내 고개를 털었다.
“이따 이야기해.”
지난주에는 사장데이 같은 이벤트를 챙겨주려는 줄 알았다. 그래서 직원 수만큼 상품권 봉투도 준비했다. 그런데 이번 주말까지 사람을 꾸역꾸역 내보내려 하다니.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야겠다.
메뉴가 담긴 종이가방을 들고 카페를 나오면서도 도웅은 찜찜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