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를 들고 어희에게 찾아간 도웅은 벨을 누르자 5초 만에 현관문을 연 어희를 보고 씩 미소 지었다. 문을 열었을 뿐인데 향긋하고 진한 초콜릿 냄새가 진동을 한다.
“안녕하세요! 뭐 만들고 있었어요?”
어서 초콜릿 토끼끼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기를 바라며 물었다. 그러나 어희는 지극히 경계하는 표정으로 커피와 디저트가 든 종이가방을 받아 갔다.
“예에…. 감사해요. 그럼….”
매정하게 닫힌 문은 올라간 입꼬리를 축 처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어느 때보다 빠른 배달을 끝내고 카페로 돌아오는 길에 도웅은 허!, 하! 같은 헛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직원도 단골도 하나같이 본인을 따돌리고 있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호 어디 갔어?”
어린애처럼 씩씩거리며 카페로 돌아온 도웅은 영호부터 찾았다. 아까 못다 한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늘 같은 자리에 있는 영호가 보이지 않아 다른 직원에게 물었다.
“아…. 잠깐 편의점 다녀온다고 나가셨어요.”
평소와 달리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직원의 말을 듣고서 도웅은 카페를 나왔다. 카페 옆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파릇한 싹에 물을 주었다.
물을 머금은 촉촉한 흙이 초콜릿을 떠올리게 했다. 한동안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지금쯤이면 영호가 돌아왔겠지, 싶어 카페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잠시 바람 쐬러 가셨어요.”
“편의점 가면서 바람 쐬었을 거 아니야?”
“그, 그러게요….”
바람 따로 편의점 따로도 아니고.
영호의 부재에 도웅은 방금 손님이 떠난 빈 테이블에서 노트북을 가져와 일을 처리했다. 발주를 넣은 뒤 세무사에게 받은 세금 처리 메일을 확인하고서 시계를 봤더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영호가 있겠지. 몸을 돌려 영호가 있을 법한 공간을 살폈다.
“…….”
그러나 없었다.
“영호 어디 갔어?”
“네? 어…? 방금까지 여기 계셨는데…….”
카페에 있는 모든 직원이 도웅의 눈치를 살폈다. 기민한 도웅은 그걸 알고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대체 어떤 간악한 무리가 살가운 사장과 직원 사이를 갈라놓았는지 알 수 없다는 게 더욱 그랬다.
서운하다, 서운해.
카페를 샅샅이 뒤졌다. 스텝 룸, 냉장창고, 주방 창고, 화장실, 창고, 건물 화장실까지 찾았는데 영호는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집에 갔나? 라는 생각이 들 만큼.
전화를 걸었더니 세 번의 신호음 후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간편 답장이 도착했다.
“…….”
도웅은 숨바꼭질을 그만뒀다.
같은 공간에서 같이 일하면서 평생 숨어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쪽이 바보다. 숨바꼭질을 그만둔 대신에 도웅은 퇴근을 택했다.
학교를 성실히 다니다가 하루 결석하면 다음부터 결석 일자가 늘어나는 거랑 비슷하게 어희와 어울려 놀면서 일찍 퇴근하다 보니 저녁 늦게까지 머물기 싫어졌다.
도웅은 앞치마를 벗고 도톰한 니트를 셔츠 위에 입고 나왔다. 부스스 정전기가 일어난 머리를 대강 슥, 슥 문질러 정리했다.
“나 퇴근. 영호한테 내일은 어떻게 숨어다닐 건지 물어봐 줘.”
카페 밖으로 나온 도웅은 내리쬐는 햇살 아래에서 가만히 서서 고민했다.
왼쪽으로 가면 집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어희 집이다. 날씨가 좋아서, 이대로 집에 가기에는 아쉽다.
잠깐 망설인 도웅은 오른쪽으로 향했다. 익숙하게 공동 현관 키로 문을 열자 1층에 사는 꼬마와 마주쳤다.
“오. 오랜만이다.”
오늘은 줄 만한 간식이 없었기에 인사만 건넸다. 꼬마는 둥글게 눈을 키우더니.
“아저씨 이사 왔어요?”
하고 묻는다.
“아니. 여기 사는 친구가 스페어 키 줬어. 왜 부모님이랑 카페 안 놀러 와~ 계속 기다렸는데. 응?”
첫 만남 때는 경계하느라 집에 들어가지 않았던 꼬마는 이제 엘리베이터 도착까지 함께 기다려주었다.
“아빠가 아저씨 가게 비싸다고 했어요.”
숨김없이 일러바치는 꼬마의 직설적인 말에 공감했다.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내가 몰래 갖다줄게. 아빠는 주지 말고 엄마랑 나눠 먹어.”
우와! 작은 꼬마의 작은 환호성에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타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안녀엉~”
“아저씨 안녕히 올라가요!”
문이 닫히고 도웅은 32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도웅은 제 얼굴이 비치는 벽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손을 들어 슥슥 머리를 정리했다. 짧고 무료한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춰섰다.
문이 열리자마자 도웅은 잽싸게 빠져나왔다.
-띵동, 띵동, 띵동.
벨을 세 번 누르고 기다려도 어희는 나오지 않았다. 같은 방식으로 세 번 누르자 어희가 나왔는데, 오른쪽 볼이 굉장히 빨갰다.
“도웅 씨?”
“안녕하세요. 빨리 퇴근했는데 심심해서 놀러 왔어요. 근데 볼이 왜 빨개요?”
피부가 하얘서 그런지 누가 세게 꼬집은 거처럼 빨간 자국이 매우 잘 보였다.
“들어가도 돼요? 근데 혹시 가스 불에 뭐 얹어놨어요? 탄내 나는데.”
“아? 아아!”
활짝 열어준 현관문 안쪽에서 탄내가 났다. 어희는 급히 당황하며 황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도웅은 자연스럽게 집안에 발을 들였다. 한 십 년 지기 집에 방문한 듯 무척 익숙한 행동이었다.
어희의 집에서는 단내와 탄내가 섞여 진동하고 있었다. 도웅은 이 현관문을 닫으면 질식사하는 게 아닐까, 고민이 되어 머뭇거렸다.
주방으로 뛰어 들어간 어희가 허둥지둥 분주하게 움직이는게 보였다. 그가 어설프게 움찔거릴 때마다 그릇이 부닥치는 소리와 무언가를 깨트리는 소리가 났다.
“…….”
이게 다 무슨 난리래.
도웅은 현관문을 닫고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켰다. 거실 베란다 창 여섯 개를 열고 주방을 둘러봤다.
유리가 얹어진 식탁과 러그가 깔린 바닥은 온통 초콜릿 범벅이 되어있었다. 싱크대에는 밑이 시커멓게 탄 스테인리스 냄비 두 개가 겹쳐있었고 방금 태운 걸로 보이는 냄비 하나 더.
“와…….”
주방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이미 탄 초콜릿을 수습하기 위해 꾸덕한 초콜릿을 휘저은 어희가 손을 놓쳐 바닥에 냄비가 떨어져 2차 재난을 만들어냈다.
급히 키친타올을 뽑아 걸레처럼 바닥을 훔치던 어희는 손바닥을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 손을 뺐다. 키친타올 서너 장을 더 뽑는 걸 보고서 도웅은 그를 말렸다.
“가만히 둬요. 화상 입겠다.”
초콜릿 재앙 한가운데에 망연자실 서 있는 남자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그래서 도웅은 대놓고 식탁 의자에 앉아서 구경했다.
“바닥은 식을 때까지 두고 일단 식탁 먼저 치우는 게 어때요?”
어희가 물티슈를 뽑아 식탁을 닦기 시작했다. 물티슈에 초콜릿이 녹아 점차 영역을 넓혀갔다. 도웅은 본인 집과 같은 러그가 깔린 식탁 아래를 봤다.
“갈색 무늬 러그도 팔았어요? 나도 이걸로 살걸.”
어희의 귀가 부끄러운 색으로 물들었다.
“스크레이퍼 없어요? 긁어낼 만한 거.”
식탁 위를 긁는 시늉을 하자 어희는 싱크대 아래 서랍을 열었다.
“뒤집개로 괜찮을까요….”
시무룩한 어희의 손에 은색 뒤집개가 들렸다. 손을 내밀어 뒤집개를 받아 든 도웅은 소매를 걷어붙인 뒤 전투적으로 굳은 초콜릿을 긁어냈다.
“그런데, 뭐 만들어요? 초콜릿 토끼끼?”
“아뇨. 그냥…, 평범한 초콜릿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삭, 삭 긁어내는 감촉이 나쁘지 않다.
“도와줄까요? 초콜릿 완전 잘 다뤄요. 거의 장인급.”
과장을 보탰다. 그런데 보상으로 리뷰를 달아달라고 할 거 같았는지 생각도 안 하고 바로 칼같이 거절당했다.
“그러면 옆에서 코칭이라도 해줄게요.”
가만 보니까 오른쪽 볼도 초콜릿이 튀어 화상을 입은 거 같다. 탄 냄비에 어희의 시선이 박혔다.
“어……,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타이밍 잘 맞춰 왔죠?”
정말로 타이밍을 잘 맞췄더라면 냄비가 타기 전에 왔을 것이다.
어희와 손 맞춰서 주방 정리를 대략 끝낸 도웅은 선반을 뒤져 쓸만한 식기를 꺼냈다.
“선물용이에요? 몰드가 다 비슷하네.”
심플한 사각형, 익숙한 조개 모양, 귀여운 버섯 과자 모양 몰드는 무척 깨끗했다. 몰드에 초콜릿을 붓는 과정은 도달하지도 못한 게 틀림없다.
카카오부터 시작하는 것도 아닌데 왜 주방이 이 난장판으로 변했는지 모를 일이다. 적당히 중탕하고 적당히 템퍼링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도웅의 의문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물이 끓는 냄비 안에 욕심만큼 초콜릿을 가득 담은 그릇을 올려놓은 어희는 미친 듯이, 정말 말 그대로 미친 듯이 초콜릿을 휘젓기 시작했다. 초콜릿이 녹기도 전에 펄펄 끓는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어어, 위험해요. 불 꺼요. 고봉밥이에요? 초콜릿을 왜 이렇게 산처럼 쌓았지? 그거 다 녹일 수는 있어요? 손 조심해요. 으악, 물 들어갔다, 물 들어갔다!”
잠깐 사이에 어희는 엄청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섬세한 미니어처를 만드는 사람이 초콜릿을 녹일 때만큼은 상남자가 되어 투박하고 거칠게 다루었고 결과는 개수대 행이었다.
“……미치겠네.”
짧은 한마디에 설거지하는 어희의 손이 멈칫했다.
“제가 꼭 도와드리고 싶은데, 아니. 솔직한 심정으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다 해드리고 싶은데 어희 씨 생각은 어때요?”
“그러면 의미가 없어서…….”
도웅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누구한테 줄 건데요? 어희 씨가 만든 것처럼 적당히 못나게 만들어 줄게요.”
“그……, 도웅 씨에게 주려고 했습니다.”
반쯤 포기한 어희의 목소리에 도웅은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달리 야무지게 묶여있는 머리카락은 그의 기합 같기도 하다.
“저한테? 왜요?”
갑자기 디저트 창업이 하고 싶어졌나? 그래서 나한테 평가받으려고? 토끼끼 카페? 개업한다면 집 근처에서는 안 될 텐데. 이 주변은 디저트 웅이 꽉 잡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