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실거리다 못해 넘쳐흐르는 자신감을 숨기지 않았다.
“화이트데이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보답 겸 주려고 했습니다. 결과는 이렇지만….”
화이트데이. 내일이 화이트데이인 건 알고 있었다. 그런 각종 이벤트를 카페 사장인 도웅이 모를 리 없다.
그런데 화이트데이는 사탕이 아닌가? 물론 초콜릿도 많이 주기는 하지만, 도웅은 사탕이 더 좋았다.
유리처럼 색색이 예쁘기도 하고 종일 입에 물고 있어도 부담스럽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탕도 잘 만든다.
“나 사탕 잘 만들어요.”
무심코 자랑을 한 도웅을 어희가 돌아봤다.
반듯한 이마 아래, 눈썹이 미묘하게 올라가 있었고 쌍꺼풀이 없는 눈을 크게 떠, 날카로운 눈꼬리를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만들었다. 묘한 표정에서 박탈감과 허무함이 담겼고 입에서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대체… 못하는 게 뭡니까.”
“숨바꼭질……?”
카페에서 제일 덩치카 큰 영호를 찾지 못한 도웅이 씁쓸하게 대꾸했다.
“여하간 저는 사탕이 더 좋은데 초콜릿으로 참을게요. 어희 씨 설거지 끝나면 같이 만들어요. 탄내 나는 초콜릿, 먹고 싶지 않아요.”
도웅과 어희는 전문 분야가 달랐다.
어희가 소비에 강했다면 도웅은 공급에 강했다. 그런 본인에게 직접 만든 초콜릿을 선물하겠다는 커다란 포부에 감동했다.
발렌타인, 화이트, 빼빼로 데이 등 소소한 이벤트마다 많은 선물을 받곤 했다. 그러나 제작 과정을 눈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혼자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했는지는 거하게 엉망이 된 주방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감동했을지도 모른다. 적당히 사다 줘도 뭐라 하는 사람 하나 없을 텐데 그는 정이 많았다.
“그러면… 창피해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신 도웅 씨도 나중에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도와줄게요.”
퍽 자상한 말이다. 어희의 귓바퀴에 열이 오른 걸 뒤에서 물끄러미 지켜봤다. 피부가 하얘서 그런지 작은 열이나 상처가 돋보였다. 그게 참 야했다.
짝!
미친 생각이 들자마자 곧장 스스로 뺨을 갈겼다. 마찰음에 어희가 놀란 눈으로 돌아봤고 도웅은 마저 설거지하라며 손짓했다.
“별일 아니에요. 모기가 있네요.”
“볼이…… 엄청 빨간데요.”
“볼 빨간 건 어희 씨도 마찬가지예요. 조심 좀 하지.”
나란히 사이좋게 왼쪽 볼, 오른쪽 볼을 물들인 광경이 웃겼다. 초콜릿 토핑으로 사놓은 밍밍한 아몬드 하나를 집어 먹은 도웅은 그의 설거지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 * *
어희와 함께 초콜릿을 만든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초콜릿 마스터인 본인이 도와주면 금방 끝날 거라 여겼는데 오산이었다.
서로 동선이 맞지 않았고 손발은 더욱 안 맞았다. 총 네 번의 실패를 겪은 후 가까스로 탄생한 초콜릿은 울퉁불퉁 못생겼다. 더는 남아있는 커버추어가 없어 여기서 멈춰야 했다.
초콜릿이 담긴 빨간 상자를 전리품처럼 손에 들고 돌아가는 길. 시간은 이미 어둑한 밤이 되었고 도웅은 크게 하품했다.
퇴근은 일찍 했는데 이상하게 일하는 것보다 더 피곤하다. 집에 가서 대충 저녁을 차려 먹고 쉴 계획을 차근차근 세웠다.
건조대에 널어놓은 빨래를 개키고 쉴지 하루 정도는 미룰지, 머릿속에서 소소한 다툼이 일어났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삑, 삑 누른 도웅은 현관문을 열었다.
“…….”
그리고 물바다가 되어있는 거실을 보고서 도로 문을 닫았다. 아무래도 한 층을 더 올라와 버린 모양이다.
내려간 도웅은 층수를 확인하고서 다급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오. 세상에.”
거실은 물천지였다. 장마철 창문을 열어놓고 외출했다 하더라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습관처럼 신발을 벗으려다 이미 신발장도 축축하게 젖어 있어,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워터파크에 온 것처럼 물이 참방거렸다. 티브이, 소파, 러그, 건조대에 널은 빨래까지 몽땅 젖었다. 우선 두꺼비 집을 내린 도웅은 핸드폰 불빛에 의존해서 티브이 코드를 뽑고서 다시 불을 켰다.
대체 어디서 물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욕실은 건조했고 침실도 건조했다. 거실. 거실만 물난리가 났다.
식탁에 초콜릿 상자를 올려두고 거실을 꼼꼼하게 살피는 그때 천장에서 작은 물줄기가 쏟아졌다. 조르륵, 조르륵.
진짜 재앙은 어희의 주방이 아닌 제 거실에서 일어났다. 절망적인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남의 집 차임벨을 이렇게 무지성으로 누르는 경우는 어희 집을 제외하고서 처음이었다.
-누구세요.
인터폰에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다 깬 듯 잠겨있었다. 도웅은 집이 물에 잠기게 생겼다.
“아랫집 사는 사람인데요,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서요.”
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이윽고 “오메, 오메.” 같은 탄성이 끊지 않은 인터폰에서 흘러나왔고 도웅은 나이 많은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1층 카페를 운영하는 건물과 사는 집 모두 주인이 같았다. 신호음을 기다리는 동안 위층 주민이 급히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아이고, 아이고. 부엌이 넘쳤어요!”
부엌이 넘쳤다는 말은 대체 무슨 말일까….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남자 집도 물난리였다. 거실뿐만 아니라 부엌까지. 개수대가 막혀서 이 사단이 났는지 싱크대 아래로 물이 범람하고 있었다.
-사장님이 어쩐 일이래요?
마침 건물주님이자 집주인이 전화를 받았다.
엄마 같은 목소리에 핸드폰을 부여잡고 ‘집주인님!’ 통곡하고 싶었으나 도웅은 최대한 침착하게 외쳤다.
“집이 넘쳤어요!”
-……응? 뭐라고요?
야밤에 세입자의 전화를 받은 집주인의 황당함은 이해가 갔으나 도웅은 그 말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집은 물난리가 났고 대충 물을 퍼낸다고 하더라도 벽지며 천장이며 곰팡이가 슬게 분명했다. 물을 잔뜩 머금은 패브릭 소파는 버려야 했고 러그도 죄다 세탁을 맡겨야 한다. 돈이 드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집에 신경 쓸 거리가 생겼다는 게 문제였다.
“3, 4층 난리 났어요. 4층은 부엌이 넘쳤고 3층은 거실이 넘쳤어요. 물난리인데 이거 도배도 다시 해야겠는데요. 티브이는…, 사주시나요.”
-응? 그게 무슨 말이여?
도웅은 한숨을 숨기지 않고 내쉬었다.
“와보셔야겠어요.”
곧 온다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4층 이웃은 패닉 상태였고 도웅은 벌어진 이 모든 상황이 꿈이기를 바랐다.
약 10분 전. 빨래를 개키냐, 미루냐. 사소한 내적 갈등을 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물청소나 해야 할 거 같아 이웃 주민과 함께 집주인을 기다렸다.
마침 근처에 계셨는지 집주인이 올라왔다. 그리고 물난리가 난 집안에 서 있는 두 명의 사내를 보고 소리쳤다.
“이게 다 뭐여?!”
도웅은 위층 주민을 은근히 책망하는 눈빛을 보내며 자신은 피해자라는 소리 없는 어필을 했다.
건물주이자 집주인에게 도웅이란 남자는 놓치기 싫은 세입자였다.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건물 월세는 한 번을 밀린 적이 없고 집 전세금을 올려달라는 말을 하면 아쉬운 소리 없이 입금한다. 게다가 집 관리까지 알아서 척척 하는데, 어느 건물주가, 집주인이 미워한단 말인가.
그럴 뿐만 아니라 가끔 만나면 천진한 웃음을 달고 살갑게 인사를 해오는데 진짜 아들과 어찌나 비교되는지 양아들 삼고 싶을 정도다.
당장 내일 누수 공사와 청소, 도배 업체를 불러 주겠다는 약속을 했음에도 세입자의 마음은 풀리지 않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 시무룩하게 날짜를 되뇌었다.
“이틀……, 이틀이요…….”“으응, 이틀만 참아줘, 사장님.”
세입자 도웅은 한숨을 쉬었다.
“이틀 동안 어디서 지내라는…….”
“근처 호텔이라도 잡아 줄 테니까, 거기서 지낼래요? 요즘 젊은 사람들 멀쩡한 집 냅두고 호텔에서 하루씩 머문다며.”
그깟 호텔비, 내 줄 용의가 있었다. 월세로 먹고살며 저축까지 하는 돈 많은 건물주에게 호텔비는 절대 손해가 아니다. 눈앞의 성실하고 살가운, 단점 하나 없는 완벽한 세입자를 놓치는 게 더 손해였다.
“하아. 그러면 진짜 그대로 복구해주시는 거예요.”
내키지 않아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선택지가 없었다.
“이틀 동안 가게에서 자죠, 뭐.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집주인이 누수를 방치한 것도 아니고 안면몰수하고 따지지도 않았다. 되려 달래주며 모든 일을 저에게 맡기라는 책임감까지 보이는데 이사 결심은 잠시 미루기로 했다.
집을 알아보러 다니고 이사 업체를 찾는 게 더 번거로웠다.
집주인과 이야기를 끝낸 후 도웅은 여전히 물바다가 되어있는 거실을 지나 침실에서 담요와 침낭, 핸드폰 충전기 등 간단하게 짐을 꾸렸다. 카페와 집이 멀지 않으니 샤워할 때나 잠깐 집에 들르면 될 것 같다.
집을 나가기 전 식탁에 둔 초콜릿 상자를 열어 한 개를 쏙 빼먹었다.
“…달다.”
평범한 아몬드 초콜릿 맛이다. 그래도 당분이 들어가니까 스트레스가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혼자 만들었으면 더 예쁘게, 더 맛있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같은 아쉬움과 함께 세 개를 더 집어 먹고서 냉장고에 초콜릿을 넣어놨다.
내일부터 집에 많은 사람이 드나들 텐데 어희가 고생을 하며 만들어 준 초콜릿을 식탁 위에 방치해 놓을 수는 없다.
잠긴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간 도웅은 히터를 켜고 커다란 박스 네댓 개를 바닥에 깔았다. 의자 여러 개를 붙여 그 위에서 자는 것도 생각해봤는데 영 불편할 것 같다.
박스 위에 침낭을 두고 꼬물꼬물 들어가, 담요를 꼬옥 덮었다. 카페에서 대놓고 침낭을 깔고 드러누워서 자는 기분은 굉장히……, 별로였다.
“…에휴.”
도웅은 새벽 네 시 알람을 맞춰놓고 한숨과 동시에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