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날씨도 추운데 신문지라도 덮고 주무시지 그러셨어요.”
“날씨가 추워서 감기도 살짝 걸렸어요.”
“0606입니다.”
“네?”
바닥에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올리자 어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넣었다.
“집 비밀번호요. 먼저 갈 테니 일 끝나면 알아서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오세요.”
“아, 네에. 고마워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하던 어희는 이내 말을 삼키고 카페를 나갔다. 도웅은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저 반죽을 밀대로 밀었다.
참 알다가도 모를 남자다. 비밀번호는 또 왜 이렇게 단순해? 생일인가?
반죽을 접고 또 접었다. 크루아상을 오븐에 집어 넣을 때가 돼서야 영호가 출근을 했다.
“사장님, 바퀴벌레 진짜 봤어요?”
아직도 집에 바퀴벌레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색과 크기, 어디로 도망쳤는지 일일이 설명해주자 영호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세스코 불러 줄게. 걱정 마.”
“아니……, 어떻게 바퀴벌레가 생겼지….”
“너희 집 가본 사람이면 다 알걸…. 앞으로 잘 치우고 살아.”
평소보다 힘들게 오픈 준비를 끝내고 어희의 텀블러에 아메리카노를 담아 퇴근했다. 빈손으로 가기 미안해서 뇌물용으로 쿠키 세트와 마카롱, 홀 케이크를 챙겼다.
오픈하자마자 바로 퇴근하다니. 햇살이 참 따사로웠다. 중간에 싹에 물 주는 걸 까먹은 게 생각이 나, 걸음을 멈췄지만 되돌아가지는 않았다. 휴식이 더 급했다.
0606. 단순한 네 자리 비밀번호를 누르자 도어락이 열렸다. 어희 없이 혼자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게 조금 어색했다.
“저 왔어요~”
목소리 볼륨을 낮췄다. 혹 어희가 자고 있으면 대충 소파에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려 했는데 꽁꽁 닫혀있던 작업실 문이 열렸다.
“이거 커피랑 뇌물이요.”
커피가 든 텀블러와 홀 케익을 식탁에 올려놨다.
“이쪽으로 오세요.”
냉큼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일전에 탐험을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때 참 재미있었는데.
“이 방 쓰시면 됩니다.”
복도 끝 파우더 룸 옆의 비어있는 방이었다.
방문을 열었더니 푹신하고 도톰해 보이는 회색 이불이 깔려있었다. 원래 아무런 가구도 들여놓지 않은 공간인 만큼 덩그러니 놓인 이불이 삭막해 보였다.
“세탁기는 이쪽 창고에 있습니다.”
짐 가방을 내려놓고 보금자리의 주인을 쫄래쫄래 쫓았다. 부엌 구석의 다용도실 문을 열자 세탁기와 건조기가 나란히 있다. 옆 선반에는 세제와 라벤더 사진이 붙은 섬유유연제. 납작하게 접힌 건조대도 있었다.
“건조대에 빨래 널어도 돼요?”
“예. 다 마르면 정리만 잘해주세요.”
당연한 일이라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어희가 간단히 세탁실 소개를 끝마친 후 도웅은 주의할 점이나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있는지 물었다. 어희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
“누구랑 같이 살아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발가벗고 다니지만 마세요.”
개념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당연히 발가벗고 다니지 않겠지. 싱글벙글 웃음을 달고서 고개를 끄덕인 도웅은 식탁에 둔 텀블러를 가리켰다.
“커피 마셔요. 저 씻고 자도 돼요?”
“마음대로 하세요.”
어희는 시키는 대로 텀블러 뚜껑을 열고 커피를 마셨다.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면서도 시선이 도웅에게 박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웅은 뒤통수가 따가웠다.
짐 가방에서 칫솔과 속옷, 잠옷을 챙긴 도웅은 욕실로 들어갔다. 변기 뚜껑을 내려 잠옷을 두고서 세면대 앞에 섰다.
지난번 헛구역질 사건 때 수납장을 열어 치약을 꺼냈던 게 떠올라 수납장을 열어봤다.
기다랗게 세 칸으로 나누어진 수납장의 맨 위 칸에는 새 칫솔과 새 치약 상자가, 아래 칸은 휴지, 제일 아래 칸에 쓰던 치약을 발견했다.
칫솔에 흰색 치약을 죽 짜, 입에 문 도웅의 느리게 양치질을 시작했다. 오른쪽 윗니를 문지르다가 바지를 벗고 반대편 이를 닦을 때는 치약이 매워서 눈물이 고였다. 느리게 움직이는 손은 점차 빨라졌다.
“퉤.”
힘이 바짝 들어간 전투적인 양치질을 끝낸 도웅은 입을 헹구고 치약을 꺼내 살폈다. 영어로 가득한 제품 설명은 다른 치약과 별다를 게 없는데 왜 이렇게 매운지 모르겠다.
새 치약 상자가 모두 같은 걸 본 도웅은 칫솔 물기를 털고 어희의 칫솔 옆에 나란히 올려놨다.
달달구리를 입에 달고 살기에 딸기 맛 치약이나 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치약을 고르는 기준은 맵다. 상의를 벗고서 샤워부스로 들어간 도웅은 샤워 수전을 올렸다.
잠옷을 입고 개운하게 욕실을 나오자 소파에 앉아 케익을 먹고 있는 어희가 벌떡 일어났다. 그가 폴폴 풍기던 꽃 향이 저에게도 나는 것이 어색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집주인께서 이번에는 어디를 소개해주려고 그러시지.
바퀴벌레가 없는 욕실에서 개운하게 샤워를 해서인지 도웅은 기분이 좋아져 총총걸음으로 뒤따랐다.
“로션은 가져왔습니까?”
“아뇨~ 빌려주세요. 나중에 갚을게요.”
신세 지는 김에 로션도 신세 지고 싶다.
복도를 지나서 배정된 방 옆의 파우더 룸 불이 켜졌다. 어희는 서랍을 열어 헤어드라이어를 꺼내주었다.
“여기.”
거울이 없는 화장대 위에는 로션과 머리끈 두 개뿐이었다. 헤어드라이어 코드를 어디에 꽂아야 할지 몰라 대롱대롱 들고 어희를 쳐다봤다. 말하지 않아도 그는 코드를 뺏어 아래에 있는 콘센트에 꽂았다.
“쓰고 서랍장에 넣어 놓으세요. 그리고…….”
그리고?
도웅은 다음 말을 기다리며 로션을 한 번 펌핑해 얼굴에 문질렀다. 달콤한 복숭아 향이 훅 퍼졌다.
로션도 단 거 쓰면서 왜 치약은…….
도웅은 말을 삼켰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번 기회에 말을 아끼는 방법을 배우기로 했다. 헤어드라이어를 켰다.
위잉!
“보통……, 드시……?”
헤어드라이어를 켜자 동시에 어희가 입을 뻐끔거렸으나 소음에 묻혀버렸다.
“……뭐라고요?”
드라이어를 끄고 다시 물었다.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인지 눈을 내리깐 모습은 시무룩하게 보이기도 했다.
“……저녁 보통 몇 시에 먹냐고 물었습니다.”
“오, 저녁~”
적당히 나가서 사 먹으려 했는데 저녁도 챙겨주려나 보다. 그렇다면 식사 시간을 맞추는 건 어희가 아니라 도웅이어야 했다.
“어희 씨는 몇 시에 먹어요? 제가 시간 맞춰서 일어날게요. 맨날 집에서 혼자 먹거나 카페에서 샌드위치로만 때워서 그런지 신나요.”
부모님 집에서는 다 같이 먹어서 참 좋았는데.
아쉬운 마음을 숨기지 않고서 물었다. 문지방에 기댄 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럽다고 느껴지기 시작할 때 어희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습니까.”
“저는 다 잘 먹어서 상관없어요. 시이원한 소고기 뭇국이나 고소한 나물, 매콤 새콤한 파김치 같은 거, 없어도 돼요.”
“…….”
대화가 끝났겠거니 헤어드라이어를 켜고 머리를 말렸다. 타올로 털어가며 바짝 말리고 드라이어를 끄자 어희는 보이지 않았다.
헤어드라이어를 원래 위치에 갖다 놓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주워 뒷정리했다.
“나갔다 올 테니 편하게 계세요.”
외출 준비를 하고서 나온 어희의 말에 도웅은 걱정 말라고, 푹 쉬고 있겠다고 대답했다.
곧 도어락 해제 소리와 현관문이 닫혔다. 도웅은 마저 정리를 끝내고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갔다. 이불에서 어희 냄새가 났다.
단내와 꽃 향이 묘하게 섞인 어희 냄새다. 섬유유연제에 붙은 라벤더와는 달랐다. 이불은 아무리 빨아도 집주인 냄새가 배는 모양이다.
도톰한 이불은 무겁지 않고 포근하기만 해, 코까지 올린 상태로 눈을 감았다. 삼 일 만에 제대로 취하는 만족스러운 휴식이다.
도웅이 잠에서 깼을 때는 사방이 어두웠다. 눈이 부어서 잘 떠지지 않을 정도로 깊게 자고 일어난 도웅은 베개 근처를 더듬었다. 곧 손에 직사각형의 물건이 닿았다. 손끝으로 가볍게 두어 번 터치하자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눈을 찡그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열 한시 이십 분이다.
“끄응.”
어쩐지 눈이 무겁다 했더니 열두 시간이나 잤다. 팔을 위로 뻗고 등허리를 좌우로 가볍게 움직여 스트레칭을 했다. 최근에 아무리 잠을 많이 못 잤다 하더라도 열두 시간은 너무 했다는 생각을 하며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깜깜할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집안은 밝았다. 달그락, 식기 부딪치는 소리와 물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아무래도 어희가 무언갈 하는 모양이다. 은은한 조명이 켜진 복도를 지나 거실로 나온 도웅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지난 재앙이 다시금 떠오른 탓이다.
환하게 불이 켜진 주방에서 어희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었고 식탁은 물론 싱크대까지 아주 엉망이었다.
도웅은 잠이 덜 깬 눈으로 이게 꿈일까, 현실일까 헷갈려 일단 침착하게 식탁 의자를 빼 앉았다. 각종 채소가 널브러져 있는 식탁 중앙에 까다 만 마늘이 보였다.
무언가가 팔팔 끓는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수저로 냄비 안을 휙 저었다. 그리고 식칼을 들고서 무언가를 썰려 했다. 그러나 그 자세는 뒤에서 보는 도웅이 놀랄 정도로 엉성하고 불안했다.
저러다 다칠 거 같아, 그를 말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딱! 소리와 함께 칼이 바닥으로, 어희의 발 옆에 떨어졌다.
보기만 해도 섬찟한 순간이었다. 깜짝 놀라 잠이 깬 도웅이 어희를 칼 반대 방향으로 밀쳤다. 도웅도 힘이 약한 편은 아닌지라 어희는 두 걸음 밀려났다.
“안 다쳤어요?!”
칼보다는 도웅의 존재에 놀란 토끼 눈이 된 어희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 열 개가 모두 붙어있는 걸 확인한 도웅은 주운 식칼을 도마 위에 얌전히 올려놨다. 그리고 벌어진 상황을 살폈다.
냄비 안에는 다시마와 멸치가 팔팔 끓고 있었고 도마에는 큼직한 무가 절반쯤 썰려있었다. 방금도 무를 썰다가 칼이 엇나간 듯했다.
“뭐해요…?”
대충 상황으로 짐작이 가나, 혹시 몰라 물었고.
“저녁 밥이요.”
어희는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