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열한 시가 넘었는데요?”
“예.”
“원래 이 시간에 밥 먹어요?”
“준비 시간이 길어졌어요.”
개수대 구석에 가지런히 놓인 음식물 쓰레기봉투는 세 개가 넘었다. 그 안에는 식탁에서 본 채소와 커다란 국물용 멸치가 가득해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얼마 동안 이러고 있었어요?”
“세 시간.”
“…….”
“다섯 시간 정도요.”
눈치를 보는 대답에 도웅은 이마를 짚었다. 주방 상황과 시간을 보면 모르려야 모를 수 없다. 어희는 원래 집에서 밥을 지어 먹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가 할 테니 앉아 있어요.”
“아뇨. 제가……, 예. 알겠으니까 노려보지 마세요.”
시무룩한 어희를 무시하고 육수를 우리는 레인지 불을 껐다. 무를 반듯하게 썰고 식탁에 널려있는 채소를 정리했다. 양념을 찾을 때 외에는 어희를 부를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집안일이 매우 서툴러도 밥 짓는 재주는 있었는지 고슬고슬한 쌀밥이다.
밑반찬은 사 온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맛이 있을 수 없으니까. 밥을 두 공기나 비운 도웅은 아직도 한 공기를 깨작이고 있는 어희가 신경이 쓰여 칭찬을 늘어놨다.
“이불이 굉장히 푹신해서 잠이 잘 오더라고요. 고마워요. 갑자기 재워달라 해서 당황하셨을 텐데.”
“예.”
“밥도 고마워요. 잘 먹었어요. 근데 어희 씨 집에서 안 해 먹으면 사 먹어요?”
“아뇨. 집에서 먹습니다.”
그 실력으로?
하마터면 악의 없는 말로 어희를 상처 줄 뻔했다.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양 도웅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주로 도우미를 부릅니다. 그리고 팁을 많이 챙겨드리죠.”
“아~”
그래서 아직까지 잘 살아있는 거구나. 도웅은 단번에 이해했다. 만든 사람의 감정이 보인다며 난리 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해결 방법이 있었다.
“저 때문에 고생하셨네요. 그런데 이건 어희 씨를 위해서 드리는 말인데 앞으로 절대 칼질은 하지 말아요.”
“예…. 이해해요.”
도웅은 어희가 식사를 끝낼 때까지 앉아서 기다려주었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 게 보기 좋았다.
* * *
도웅이 어희의 집에 얹혀살게 된 지 이틀째.
일하다가도 미소가 어릴 만큼 매우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제집처럼 지내라는 어희의 말을 듣고 또 듣고를 반복했더니 정말 제 집 같았다.
저녁 시간, 싹에 물을 주고 카페로 돌아왔더니 익숙한 뒷모습이 오더 테이블에 서 있는 걸 발견했다. 널따란 등 위에 각진 어깨, 느슨하게 묶인 머리카락. 누가 봐도 어희다. 그러나 도웅은 섣불리 아는 체하지 않고 쳐다만 봤다.
어희가 카페에 온 게 믿기지 않았다. 물론 아예 방문을 안 하는 건 아닌데, 주로 출몰 시간은 영업이 끝난 이후 혹은 영업을 하기 전이었다.
결제를 끝마친 어희가 몸을 돌렸다가 그대로 도웅과 눈이 마주쳤다.
“여긴 웬일이에요?”
슬며시 어희의 입매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보인 어희가 말했다.
“일하다가 도웅 씨랑 같이 들어가게요.”
집 가는 길, 심심하진 않겠다. 어희의 손목을 잡아 창가 자리로 끌고 갔다.
“그러면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요.”
마치 ‘일하는데 방해하면 안 돼’ 같은 어조였으나 어희는 군말 없이 자리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오더 테이블 안으로 들어가 방금 어희가 결제한 메뉴를 직접 준비한 도웅은 트레이를 들고 어희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그는 노트를 펼쳐 연필로 선을 가볍게 긋고 있었다.
“여기요. 뭐 더 필요한 거 있어요?”
“괜찮아요. 잘 마실게요.”
엄지와 검지 사이, 연필이 걸쳐진 손에 커피잔을 들렸다. 그다지 보기 어려운 광경은 아닌데 왠지 세련돼 보였다.
서빙을 끝내고 돌아오자 직원 영호가 재고를 채워 넣으며 물었다.
“친구분이에요?”
“엉.”
어희에게 내어준 창가 자리는 가림막 있는 테이블이라 주방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오더 테이블로 나왔더니 더 안 보였다. 도웅은 짧게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잘 보이는 곳으로 테이블을 내어줄 걸 그랬다.
“저 테이블은 내가 갈 테니까 그냥 둬.”
“네에, 네에.”
“마감도 오늘은 그냥 청소만 대충하고 일찍 퇴근하라 그러고.”
“아싸.”
좋아하는 영호를 보자 피곤함에 잊고 지냈던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주말마다 약속 있냐 묻던 일과 캐물었더니 난데없이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던 일이, 떠올라버렸다.
“야, 영호야. 갑자기 생각난 건데, 왜 도망 다녔어?”
방금까지 주먹까지 쥐고 좋아하던 영호가 돌처럼 쩍 굳어버렸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못하게 아예 두꺼운 손목을 잡아뒀다.
“그, 그게.”
“사장데이는 대체 언제 챙겨줘? 내일? 모레? 나 모른 척하고 있으면 돼?”
“사장데, 뭐요?”
거짓말을 좀처럼 하지 못하는 타입이다 보니 얼굴이나 행동에 그대로 드러나는 영호가 어리둥절해했다. 그 반응을 보자 확신이 들었다. 사장 데이든, 도웅 데이든 자신을 위한 이벤트는 없었다.
“얼른 말해. 뭐야.”
심통이 났다. 나는 상품권까지 사놓고 기다렸는데….
영호는 엿듣는 직원이 없는지, 주위를 살핀 후 도웅을 데리고 냉장창고로 향했다.
얼마나 은밀한 말을 하려고 이렇게 보안에 신경 쓰나, 유난이다 싶었지만 묵묵히 따라주었다. 냉장창고 문을 닫고서 영호는 흠, 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듣고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이미 기본 전제가 깔린 것만으로 기분 나쁜 말이 나올 거 같다. 도웅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서 팔짱을 끼고 등을 기댔다.
“저도 그렇고 다른 애들도 요새 느끼는 게 있어서 그래요.”
영호뿐만 아니라 직원 모두가? 도웅의 눈이 동그래졌다. 도웅은 자신을 돌아봐도 좋은 고용주였기에 모두가 불만을 품고 있다는 소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들 뭐가 불만인 건데? 내가 월급을 깎기라도 했어, 못 쉬게 했어? 빡빡하게 굴지도 않았잖아.”
이런 항변은 어쩌면 당연했다.
명절마다 선물과 상여금도 챙겨줬고 생일 같은 기념적인 날도 따로 불러 봉투를 넣어줬다. 그런데 대체 뭐가 불만인지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일을 빡세게 시키냐, 그것도 아니었다. 60평 남짓한 카페에 근무하는 직원 수만 열둘이다. 굴리려고 마음먹으면 일곱으로도 충분하다.
억울함을 가득 담은 호소에 영호는 황급히 진정하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무도 불만 있다곤 안 했어요!”
“그럼 뭐야. 뭐길래 자꾸 날 내쫓아?”
“내쫓다뇨. 모두 사장님이 쉬었으면 해서, 그런 거죠.”
그럼 더 납득가지 않는다. 3년 동안 잠잠하다가 이제 와서?
“사실 사장님이 쉬니까 조금 편해서 그랬어요.”
부끄러워하며 볼을 긁적인 영호는 조금씩 이야기를 풀어놨다.
“근래에 사장님이 일찍 퇴근하고 설날에는 아예 사흘 쉬었잖아요. 그래서 알게 된 거죠. 아무리 좋은 사장님이라도 없는 게 제일 마음 편하다는 걸….”
씁쓸한 표정은 덤이었다.
도웅은 “허어.” 기가 찬 숨을 내쉬었다. 뭐, 사장이 없는 게 마음 편해?
“그렇기야 하겠네.”
그럴싸했다. 이해도 간다.
이유를 알자 별것도 아닌 걸로 사람 속을 썩인 영호의 어깨를 가볍게 한 대 툭, 쳤다.
“그럼 나 오늘은 일찍 들어갈게.”
“네? 사장님 화나신 건 아니죠?”
보면 모르냐고 물으려던 도웅은 모든 사람이 어희 같지 않음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엉. 나 커피 들고 바로 퇴근할 테니까 마감 빡빡하게 해.”
나온 김에 어희랑 산책하고 들어가면 알맞을 거 같다. 청소만 대충 하라는 말을 그새 잊은 도웅은 스텝 룸으로 들어가 퇴근 준비를 마쳤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페퍼민트 티를 나란히 들고서 어희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처음 봤을 때는 선 몇 개만 그어져 있었는데 어느새 어희의 노트에는 미니어처 도면이 그려지고 있었다.
자 없이 단번에 말끔한 선을 그어 깔끔한 가구를 그려내는 게 신기해, 말없이 지켜봤더니 인기척을 느낀 어희가 뒤를 돌아봤다.
조명을 받은 어희의 눈이 이색적인 금색으로 보였다.
“아. 끝났습니까?”
급히 노트를 덮어 테이블을 정리하는 어희를 도와서 트레이를 들었다.
“일찍 가게요.”
트레이를 바에 갖다 두고서 어희와 함께 카페를 나왔다. 밤이 되어도 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고 적당히 선선했다. 날씨만큼 적당히 좋은 날이었다. 천천히 걸으며 빨대를 물었다.
둘은 나란히 걸으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적당히 서로의 걸음을 의식하며 속도를 맞췄다. 로얄 골드 펠리스 정문에 도착하고서 어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산책이라도 하고 들어갈까요?”
“아.”
먼저 산책을 제안하려 한 건 도웅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까먹고 말았다. 십여 분을 걸어오는 동안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멍해졌다. 이따금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기분 좋다고 느낄 뿐이었다.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져 보이는 도웅을 물끄러미 쳐다본 어희가 먼저 발을 떼었다. 아파트 단지에 마련된 산책로 방향이었다. 도웅은 그를 뒤따랐다.
“도웅 씨.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하네요.”
말없이 산책로를 빙글빙글 삼십 분째 돌고 있자 어희가 말을 걸었다. 나긋한 음성에 “그러게요.” 그다지 흥이 없는 대답을 꺼냈다.
구불구불한 산책로를 돌다 보니 다시 출발 지점이 나왔다. 벌써 세 바퀴째다. 도웅은 크게 생각하지 않고 걸었고 걸음을 늦춘 어희는 발맞춰 걸었다.
“어희 씨.”
일정 간격으로 켜져 있는 달빛 조경 등은 밤하늘의 달만큼 예뻤다. 너무 멀어 손도 닿지 않는 달보다 당장 만질 수 있는 조경 등이 훨씬 낫다.
“가끔 사람이 감상에 젖을 때가 있잖아요. 저는 지금이 그날인가 봐요.”
“…….”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도웅은 평상시보다 퍽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달을 봐요. 저는 이렇게 밤하늘을 보고 있으면 꼭 떠오르는 게 있어요. 어희 씨가 언제 리뷰를 달아줄까, 오늘 달아줬을까? 하며 새로 등록된 리뷰를 일일이 확인하곤 한답니다.”
“그렇군요.”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좋은 날에, 상냥한 리뷰를 달아주시는 건 어떻게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