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나서야 어희는.
“그렇군요.”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
“네.”
도웅은 더 짧은 대답을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D-1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오후에 도웅은 집주인의 호출을 받고서 일하다 말고 집으로 향했다. 물난리가 났었던 본래 자신의 집.
빌라 앞에서 집주인을 만나 함께 3층으로 올라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연 집은 어수선했다. 거실 바닥에 비닐과 시멘트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집 꼴이 이만큼이나 엉망이라는 걸 보여주려고 불렀나, 의심이 들 정도다.
“못 쓰겠는 건 미리 알려줘요. 업체 불러서 청소하는 김에 처분해줄 테니. 그리고 티브이도 젖어서 못쓰겠던데 같은 모델로 배상해주면 될까?”
티브이…. 어차피 잘 보지도 않는다. 가끔 적적할 때 켜놓는 용이었으니 굳이 새로 사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티브이가 있었던 벽은 액자로 채울 계획이었다.
“티브이랑 소파는 그냥 처분해주세요.”
도웅은 핸드폰을 꺼내 이전에 미리 찾아 놓은 가죽 소파 사진을 띄웠다. 시크하면서도 색감이 내추럴한 청녹색 가죽 소파는 3인용에 스툴까지 포함된, 다소 가격이 있는 제품이었다.
“…이거 사주세요.”
수줍게 핸드폰을 내밀자 집주인은 예쁘다며 영수증을 주면 돈을 입금해주겠다는 쿨한 대답을 해주었다.
도웅은 엉망이 된 거실을 지나 부엌 냉장고에서 어희가 만들어 주었던 초콜릿 하나를 꺼내 먹었다.
오늘 새로 천장 칠을 하고 환기까지 하면 내일 저녁부터 살 수 있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들은 터라 도웅은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저녁 시간. 카페에 찾아온 어희와 함께 귀가하며 집에 초대했다. 어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D-Day.
역시 집주인과 건물주라 그런지 선정한 청소 업체는 기가 막혔다.
먼지 한 점 없이 번쩍번쩍 광이 나는 거실 바닥은 실로 놀라웠다. 오후 여섯 시가 되자마자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본래 집으로 돌아온 도웅은 집안을 둘러봤다. 소파와 티브이가 없어졌을 뿐인데 왠지 내 집 같지 않다. 일주일을 넘게 다른 곳에서 제집처럼 지낸 탓이 컸다.
침실 문을 열고서 그리운 침대에 풀썩 다이빙했다.
“으음~ 집이다.”
거실을 지나올 때까지 남의 집에 몰래 들어온 기분이었다면 익숙한 침실에 들어서자 집에 왔다는 게 자각이 되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코를 박고 엎드려있다가 십여 분이 지나고 몸을 일으켰다.
어희가 좋아하는 달달구리한 디저트를 카페에서 싹 챙겨온 만큼 저녁 메뉴는 간단하게 스테이크로 퉁 칠 생각이었다. 신경 쓴 티는 내고 싶고 복잡한 요리는 싫을 때, 역시 스테이크만 한 게 없다.
고기 한 접시만 덜렁 내놓는 건 아니다 싶은 도웅은 스튜를 끓이고 오일 파스타를 만들었다. 채소가 있으면 좋을 거 같아, 다시 집을 나와 마트에서 샐러드 만들 거리를 사 왔다.
“…….”
분명히 간단하되 신경 쓴 저녁을 대접하려 했는데 왜인지 큰 한 상 차림이 되어버렸다. 다 먹을 수 있으려나 걱정하면서도 티본 스테이크를 구웠다.
적당히 미디엄으로 익힌 티본 스테이크를 썰어 원목 플레이팅 도마에 올렸을 때 마침 차임벨이 울렸고 쪼르르 현관문을 열었다.
“어서 와요!”
“이거, 빈손으로 오기가 뭐해서 사 왔습니다.”
튤립 꽃다발과 와인 조합은 평범했으나 내민 사람의 표정이 워낙 무덤덤해서 그런지 특별하게 보였다.
“아. 고마워요.”
집에 화병이 있던가? 꽃다발을 거실 테이블에 올려놨다. 집 안으로 들어온 어희는 썰렁한 거실에 한 번 눈길을 주고 곧바로 욕실에서 손을 씻었다. 그 사이에 와인 마개를 오픈한 도웅은 와인 잔을 꺼냈다.
“맛있을 거예요. 저 요리도 잘하거든요.”
안다고 짤막한 대답을 어희는 이내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자료로 참고하게요.”
핸드폰을 내려놓은 어희의 손에 식기가 들렸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네, 네. 많이 먹어요.”
빈말이라도 차린 게 없다고는 못하겠다. 어희가 사 온 와인을 홀짝이며 힐끔, 힐끔 살폈다. 어떤 메뉴에 손이 더 많이 가는지.
식사를 하면서 한 잔, 두 잔 나눠 마시다 보니 어희가 가져온 와인이 금방 동났다. 적당히 배가 찬 이후에는 카페에서 가져온 디저트를 안주삼아 위스키를 마셨다.
어희는 술이 영 안 받는 날인지 와인만 두 잔 마시고 술을 거부했다. 결국 도웅은 혼자서 자작하며 쿠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뜬금없는 말 해도 되나요?”
새삼스럽게 허락을 구한다고 느끼면서도 어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샷으로 절반가량을 비운 도웅의 얼굴은 이미 취기가 올라 불그스름해졌다.
“우리 되게 신기한 거 같아요.”
“어떤 게 말입니까.”
생크림 케익을 크게 퍼 입에 머금은 도웅이 위스키를 털어 넣었다. 달콤하면서 알싸한 맛을 음미하며 꿀꺽, 삼켰다.
“어희 씨는 제 손님이었는데 친구가 되었잖아요.”
“음.”
어희가 자신에게 고백한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도웅은 아차 싶었다. 동시에 귀가 화끈거렸다. 술기운이 귀까지 점령한 듯했다.
“친구요.”
낮은 목소리로 읊조린 어희는 포크로 케익 위에 올라간 딸기를 찍어 도웅에게 내밀었다. 입 앞에 닿은 딸기를 낼름 받아먹은 도웅은 한 박자 늦게 얼굴을 구겼다.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술 좀 마셨다고 사리 분별 못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갑자기 입에 먹을 걸 대주는 어희도 어희인데 그걸 덥석 받아먹은 게 자신이 어이없었다.
나이가 들긴 든 모양인지 얼굴 전체가 술기운으로 홧홧하고 뱃속이 영 불편했다. 술 힘을 빌려서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심장은 익숙하지 않았다.
“술 그만 마셔야겠어요. 어희 씨도 그만 마셔요.”
“…도웅 씨만 그만 마시면 될 거 같아요.”
식사 때 와인 두 잔만 마시고서 줄곧 레몬 차를 마시고 있던 어희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렇긴 하네요. 어희 씨 오늘 자고 가나요?”
“아뇨.”
힐끔 손목시계를 보는 어희한테 손을 내밀었다. 시계를 달라는 줄 착각한 건지 어희가 손목시계를 풀어 도웅의 손에 얹어주었다.
“시계 말고 악수요.”
“아. 오늘은 괜찮습니다.”
손목에 시계를 차느라 시선을 내린 어희는 덤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맛있는 식사 고마워요. 시간도 늦었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삼분의 일정도 남은 레몬 차를 말끔히 마신 어희가 의자에서 일어났고 도웅은 덩달아 엉거주춤 일어났다.
“벌써 가시게요?”
아직 아홉 시밖에 되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는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었으나 도웅의 시계는 달랐다.
평상시라면 카페에 있을 시간이었고……, 생각을 이어가던 도웅은 어희의 수면 시간이 오후 다섯 여섯 시에서 자정 사이라는 게 생각나, 입을 다물었다.
수면 시간 사이에 약속을 잡아도 꼬박꼬박 잘 나오고 함께 산 짧은 기간 절반은 카페로 찾아와 그의 수면 시간을 잊고 있었다.
“더 있다 갈까요.”
외투를 걸치기 전에 어희가 확인하듯 물었다. 잠을 자든 휴식을 취하든 그가 집으로 돌아가 편안히 있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도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하지 않고서 취한 행동이었다. 어희는 도로 의자에 앉았다.
“도웅 씨, 앉아요.”
엉거주춤하게 선 도웅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지난번보다 많이 마시지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복잡한 심경이었다.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어도 알 수 없어, 더욱 복잡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붙잡을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심지어 어희가 자야 하는 시간에도 자신을 만나준 걸 이제야 알아챈 지금, 도웅은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가만히 서서 인상을 구기는 도웅의 이름이 한 번 더 어희의 입에서 불리고 나서야 대답할 수 있었다.
“어희 씨. 그냥 가셔도 될 거 같아요. 저 피곤해서, 자게요.”
술을 마시면 오랫동안 깨어 있는 버릇이 있는 주제에 멋쩍게 핑계를 갖다 대었다. 그런 도웅을 가만히 바라본 어희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매서운 눈매가 눈꺼풀에 가려졌다가, 나타나는 그 모습에 술기운이 더 올라오는 느낌이다.
“도웅 씨. 무슨 생각 해요.”
무슨 생각 중이냐 물어도 본인 마음이나 생각을 몰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불쑥 내뱉었다.
“오늘 못 잘 거 같다는 생각이요.”
“…주무신다면서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지적한 어희는 오늘따라 끈질기게 말꼬리를 잡았다.
“…….”
“혹시 주정 같은 겁니까?”
절반가량을 비운 위스키병과 도웅을 번갈아 쳐다보는 어희다.
“아뇨. 제 주정 이렇게 진상이 아니에요.”
“도웅 씨 술주정은 뭐에요.”
“…안 자요.”
“앉으라고요?”
이미 앉아 있는 어희가 눈썹을 위로 올렸다.
“아니, 잠을 안 잔다고요. 체력이 방전될 때까지.”
“……그거 위험한 거 아닙니까?”
매일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한 번 마셔서 위험한 정도는 아니다. 어희는 짧게 “아.” 하고 깨달음을 얻은 듯한 낮은 감탄사를 흘렸다.
“그래서 그날 그 시간까지 안 자고 계셨던 거군요.”
그날?
자는 척하는 걸 꿰뚫어 본 어희가 머리카락 안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은 날이 떠올랐다. 민망함에 눈을 둘 곳을 못 찾겠다.
“그래도 그 버릇은 고치는 게 좋겠어요.”
안 자는 버릇 아니면 자는 척하는 버릇?
물어보기도 이상해서 도웅은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금 어희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왜 집에 가지 않는 건지 같은 의문이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뭐 물어볼 거 있어요?”
마침 잘 물어봤다는 양 고개를 끄덕인 도웅은 덜컥.
“아직도 저 좋아해요?”
“…….”
멍청하고 멍청하고 멍청한 질문을 해버렸다.
여러 질문이 머릿속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필이면 있는지도 몰랐던 질문이 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왔고 도웅은 창백하게 질렸다.
당황스러운 건 예고 없이 무례한 질문을 받은 어희일 텐데 그는 의외로 태평했다.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캐묻지 않고 도웅을 잔잔하게 바라보다, 수긍했다.
“예.”
무척 짧은 그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아니. 긴 대답을 했어도 할 말이 없는 건 같았을 거다. 어버버, 말을 잇지 못하는 도웅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서 어희가 되물었다.
“도웅 씨는요.”
저음의 음성에 심장이 펄떡 뛰었다. 호기롭게 로얄 골드 펠리스로 배달을 갔다가 택시비가 없어, 얼음이 녹는 게 눈에 보였을 때처럼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