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태풍
“하아….”
기운 없이 주방 구석에 박혀 도웅은 생각했다.
어째서 어희와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날이면 늘 주방 구석에 박혀있게 되는 걸까…….
양손을 얼굴에 얹어 벽에 머리를 기대고서 바로 어제 일을 회상했다.
“도웅 씨는요.”
항상 듣는, 낮고 느긋한 목소리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당장 심장이 가슴에서 머리로 올라왔을지도 모른다는 바보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귓가에 심장이 껄떡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바로 직시해오는 어희의 눈동자 때문인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의 입술에 시선을 빼앗겨서인지 도웅은 한참 동안 입을 꾹 다물었다.
딱 울기 직전의 사람처럼 얼굴이 터질 거처럼 빨갛게 달아올랐을 때까지 어희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말이 안 되잖아.”
“말이 안 되잖아.”
어희한테 했던 대답을 고스란히 혼잣말로 내뱉은 도웅은 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비볐다. 그 말을 하자 어희는 미소를 지었다. 크게 다르지 않은 어색한 미소였다.
전에도 이번에도 구석에 박혀있는 이유는 다른 이 탓을 할 것도 없이 도웅 자신 때문이었다.
자괴감과 알 수 없는 혼란이 덮쳐왔다. 그의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로 심란하면서도 저녁 시간이 지나갈 때까지 주문이 없는 어희가 궁금했다.
“도웅 미친놈….”
궁금하긴 뭘 궁금해. 궁금할 자격도 없다.
어희 주문이 끊긴 건 처음 있는 일이었으나 도웅은 안도감과 호기심이 교차했다. 호기심을 느끼는 자신에게 자괴감이 얹어지는 건 덤이었다.
밤을 홀딱 새고 새벽에 나와서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종일 구석에만 박혀 울음을 터뜨릴락 말락 한 이 심정을 헤아리고 있었다.
마감을 끝낸 직원들이 퇴근할 때까지도 도웅은 도저히 구석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걱정 어린 말을 한 영호가 퇴근하고 나서 고요해진 카페 홀을 주방에서 쳐다봤다.
대체 나는 어희랑 뭘 하고 싶은 거야.
오늘 하루 열 번은 넘게 마음속을 떠도는 질문에 답은 없었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고 체격이 큰 남성이 들어왔다. 베이지색 볼캡 모자와 하얀 마스크를 쓴 남자를 보고 순간 키가 엇비슷해, 어희인 줄 착각한 도웅이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남자는 카페를 두리번거리더니 바 테이블 너머, 주방 안에 있는 도웅을 발견하고서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크 주문 좀 하려고요.”
또박또박하면서 말 속도가 약간 빨랐다. 영업 끝났다고 거절하려다, 종일 일도 안 하고 찌그러져 있었다는 게 떠올라, 작은 한숨과 함께 홀로 나갔다.
남자는 메모 기능에 직접 그려온 듯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런 디자인 원해요.”
디자인과 레터링 문구를 확인한 도웅은 눈을 끔벅였다. 그도 그럴 평범한 케익의 형태가 아니었다. 아니. 모양으로 따지면 원형인 건 똑같았으나 색이나 레터링 문구가 일반적이지 못했다.
비싼 돈을 들여가며 커스텀 케이크를 주문하는 경우는 대다수가 무언가를 기념하거나 축하하기 위함일진대 남자가 그려온 케이크는 저주에 더 가까웠다.
“어…….”
녹즙처럼 거무죽죽한 녹색 케이크 위에 시뻘건 불과 검은 덩어리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정중앙의 레터링 문구는 ‘턱시도 잘 어울리더라’ 였다.
“……저 손님. 정말 이대로 해드려요?”
일정상 힘들다는 핑계로 거절해도 되긴 하나, 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래 이런 무서운 케익을 주문한담. 일단 들어는 보고 싶었다.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닌데……, 이 까만 건 뭔가요?”
“…….”
“손님?”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올려 손님을 쳐다보자 눈이 마주쳤다.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곧 있으면 얼굴에 구멍이 날 거 같아 물었더니 눈 밑에 눈물점을 매단 남자의 눈이 커졌다.
“어어? 도웅?!”
이윽고 남자의 마스크 바깥으로 28년 동안 꾸준하게 불려온 이름이 터져 나왔다. 덩달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도웅은 떠듬떠듬 대꾸했다.
“어, 어? 네? 누구세요?”
손님 중에서 이리 친숙하게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어희를 제외하고 없었기에 더욱 당황했다. 남자는 우와, 이야, 같은 감탄사를 연발하다가 살짝 모자를 올리고 마스크를 내려 보였다.
말끔하게 잘생긴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도웅은 뒤늦게 “어어?!”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 나, 나윤?!”
단번에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말을 더듬었다. 그랬더니 도로 마스크를 올린 한때 대학 동기였던 손님은 눈매를 휘며.
“도, 도, 도웅?”
놀리듯 똑같이 도웅의 이름을 더듬었다.
“뭐야,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이전에 어희와 함께 뉴욕행 비행기에 탔을 때 잡지에서 본 나윤이 눈앞에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가라앉지 않았다.
“케익 주문하러 왔다니까. 이야, 이게 얼마 만이래. 잘 있었냐? 유학 간다고 연락 두절 되더니 한국은 또 언제 왔대.”
“어어, 들어온 지는 삼 년, 아니 사 년 됐지. 너 인터뷰한 잡지 봤어!”
잡지 이야기를 꺼내자 나윤은 눈물점을 달고 있는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그놈의 인터뷰 때문에 마음 아픈 일을 겪었어. 자세히 말하기는 힘드니까 그 주제는 꺼내지 마.”
어울리지 않게 서글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가 핸드폰을 울리는 알람을 확인하고서 짧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서글픈 표정.
워낙 순식간에 바뀌는 변화에 솔직하게, 조금 무서웠다.
“여하간 케익 주문 가능해?”
“어어, 가능하지. 그래서 이 까만 건 대체 뭐야?”
케이크에 얹어진 검은 괴생물체를 가리켰다. 삐쭉삐쭉 검은 덩어리는 꼭 머리카락을 뭉쳐 놓은 거 같기도 했다.
“뭐긴. 까마귀잖아.”
그것도 모르냐는 어투에 열이 받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일 것이다.
“이게 어떻게 까마귀야.”
“누가 봐도 까마귀야.”
확신에 찬 나윤을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심정을 억눌렀다.
“이거 누구한테 주게?”
“있어. 나 이만 가봐야겠다. 여기 오면 너 맨날 있어? 몇 시까지 해?”
“저녁 열 시까지는 있을걸.”
마감 끝내고 차 한잔하는 여유를 만끽하다 보면 그 시간이다. 나윤은 잘됐다는 양 눈을 빛냈다.
“간만에 술 한잔해야지.”
“……나 술 끊었어.”
대학 엠티 때 49시간을 깨어 있게 한 술친구가 나윤이었다. 선배들을 모두 녹다운시키고 둘이서 밤새 술잔을 나누다 나윤 혼자 편하게 잠들어버린 씁쓸한 기억이 떠올랐다. 도웅은 외롭게 모두가 잠든 새벽에도 깨어 있었고 모두가 느지막이 일어난 이른 점심시간에도 깨어 있었다.
“뻥치네.”
나윤은 어울리지 않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터트리고는 펜을 쥐는 시늉을 했다. 눈치껏 메모지와 펜을 건네자 열한 자리 숫자를 휘갈겨 적었다.
“내 번호. 케이크는 언제 찾으러 와?”
“급해? 빠르면 내일 오후에 찾으러 와도 되는데.”
“그렇게 급한 건 아닌데 꼭 내일 찾으러 올게.”
짓궂은 심보를 자랑하며 나윤은 빠른 걸음으로 카페를 나갔다. 폭풍처럼 휩쓸고 간 대학 동기의 빈자리를 어리벙벙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별안간 닫혔던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
“아, 맞다! 모카 케이크로 부탁해!”
나윤은 빠른 걸음으로 나간 만큼 더 빠른 걸음으로 돌아와 요구사항을 밝히고 사라졌다. 덕분에 잠시나마 사라진 울적함은 텅 빈 카페를 보자 다시금 생겨났다. 어희가 처음 앉았던 바 테이블에 앉아 어희와의 관계에 대해 되짚었다.
다음날. 도웅은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이틀간 로얄 골드 펠리스 3201호, 어희에게 주문이 들어오지 않은 건과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에 심각하게 고뇌에 빠져있었다.
밥은 걸러도 디저트는 거를 사람이 아닌데….
혹 쓰러지기라도 한 건 아닐까 걱정되어 낮에 메시지를 보낼까, 말까 망설이다 보내지 않았다. 걱정에도 자격이 필요했다. 도웅은 이미 차갑게 식은 찻잔을 들었다가, 마시지 않고 도로 내려놨다.
손님이었다가, 가벼운 계약 관계였다가, 친구 겸 단기간 동거인이었던 어희가 계속해서 생각났고 신경이 쓰였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노란색 찻물에 시무룩한 얼굴이 비쳤다. 심란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축 처져 있을 무렵 돌연 창문에서 퉁! 하고 묵직한 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라 엉거주춤 일어나자 좀비처럼 창문에 들러붙어 있는 형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윤이었다.
“문 열어 줘어~”
그리 급한 건 아니라고 했던 나윤은 약속대로 오늘 주문한 케이크를 찾으러 왔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열한 시다.
“거기 더러운데 꼭 붙어있고 싶냐.”
문을 열어주며 투덜거리자 나윤은 제 크림색 긴 야상을 내려다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깨끗한데 뭘. 나 기다리느라 집에도 못 간 건 아니지? 미안, 미안. 일이 늦게 끝났지 뭐야.”
도웅은 다른 손님이 볼까 창피해, 재빠르게 쇼케이스 제일 구석진 자리에 보관해놓은 케이크 상자를 꺼냈다.
“최대한 요청대로 만들긴 했는데, 정말 이거 어디다 쓰려고?”
도웅은 본인이 만든 수많은 디저트 중에서 제일 무섭고 음침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나윤의 커스텀 케익을 내밀었다.
“어디다 쓰긴. 선물하려고 그러지.”
“…그걸?”
“엉.”
“모르긴 몰라도 그거 선물했다간, 큰일 치르지 않을까.”
걱정 섞인 놀림을 던지며 픽, 실소했다.
그러자 카드를 내민 나윤은 씩 입꼬리를 올려 똑같이 웃었다.
“큰일을 겪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선물 받은 쪽이라. 얼마야?”
“팔만 원.”
비싸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가격을 신경 쓰는 모습은 아니었다. 카드를 긁어 영수증과 함께 돌려줬더니 나윤은 케이크에 꽂을만한 초를 찾았다.
“빨간 초, 아니다. 검은색 초도 괜찮겠다. 그리고 폭죽도 줘.”
“…검은색 초 없어.”
검은색 초는 들여놓지 않은 터라 빨간색 초와 폭죽을 챙겨줬다.
“그럼 잘 가.”
거의 8년 만에 만난 대학 동기가 반갑긴 했지만 어희에 대한 걱정 때문에 더는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없었다. 도웅은 미련 없이 나윤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 가라고? 우리 간만에 만났는데?”
“너 바쁘잖아. 어서 가.”
“누구 오기로 했어?”
나윤의 물음에 도웅은 자리에 도로 앉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니….”
케익 상자를 들고 멀뚱히 서 있던 나윤은 뜬금없이 맞은편에 착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