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90)

그렇게 저주스러운 디자인으로 요청한 주제에 케익이 뭉개질세라 테이블에 올려놓는 손길은 퍽 섬세했다.

“그럼 누구 기다려? 나도 아직 시간 남았는데 같이 기다릴까.”

“그러든가.”

도웅은 무심하게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식은 차를 마시며 잔을 달칵, 내려놨다. 그리고는 의미 모를 숨을 푹 내뱉었다. 그런 도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윤이 말했다.

“야, 도웅. 이렇게 마주 앉아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그러나 도웅의 귀에는 그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저 차가 식을 때까지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오티 때도 너랑 이렇게 술 마시지 않았었나? 너였던 거 같은데.”

슬슬 집에 가서 내일을 준비해야 할 텐데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소파가 아직 안 와서 그런가. 평소라면 가볍게 즐겼을 티 타임이 굉장히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집으로 가지 않고 꾸역꾸역 카페에 붙어있는 걸 자각하자 어이가 없었다.

“그때 눈 왔던 거 같은데. 눈 쌓인 거 보고 오줌 싸러 달려나갔잖아. 너 진짜 또라인 줄.”

“그건 내가 아니라 종필이야! 추억 회상할 거면 제대로 좀 해.”

언제까지 황망하게 앉아만 있을지, 어희가 언제쯤 주문을 넣어줄지, 아니. 넣어주긴 할지, 어희는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온갖 복잡한 생각이 밀려들었다. 심란한 와중에 나윤이 추한 추억을 꺼내 화두에 올렸다. 거짓말로 얼룩진 기억을 정정해주자.

“정말 너 아냐?”

나윤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도웅을 노려봤다.

환장하겠네.

“아니라니까. 종필이야.”

“그랬나.”

“응.”

대충 대답하고서 고개를 내려 찻잔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어쩐지 조금 더 있어도 될 거 같다.

왜?

짜증이 날 만큼 모호했다. 드물게 인상을 찌푸린 도웅은 결국 찻잔을 째려보기에 이르렀다. 내일을 준비해야 하는데, 왜 좀 더 머물고 싶은지 제 마음을 모르겠다. 퇴근하기 싫을 만큼 카페에 애정이 있냐면 당연히 있기야 하다. 그래서 더욱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장 귀가해 푹 쉬는 게 내일을 위한 거고 카페를 위한 일이지 않나?

“뭐 벌레라도 떨어졌어?”

찬장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답답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길 바라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았다.

“웬 한숨? 고민 있어? 하하. 농담 한번 해 봤다. 네가 고민이라니 말도 안 되지.”

해맑은 웃음소리에 도웅은 퍼뜩 머리통을 들었다. 

지금 내 상태……, 고민에 빠졌다고 할 수 있지 않나?

“야, 나윤. 나… 고민 있나 봐.”

도웅은 고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무엇이든 단순화시키는 걸 좋아했고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은 잠시 미뤄뒀다.

미루고 눈앞에 닥친 일을 하다 보면 나중에는 알아서 해결되어있거나 도웅의 손을 멀리 떠나가 있었다. 살면서 마음이 불편할 정도로 큰 고민을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면역 없는 심란함은 살을 붙이고 몸집을 키워갔다.

“…….”

놀란 나윤의 눈을 마주 보며 똑같이 눈을 크게 키운 도웅은 혹 못 들었나 싶어 또 입을 열었다.

“나 고민…….”

“알아들었어. 일단 음료 한 잔 줘봐. 나 너무 놀라서 목 막혀.”

“어엉.”

엉거주춤 일어나 키위 생과일주스를 시원하게 한 잔 갈아왔다.

꽂아 준 두꺼운 빨대를 손가락으로 제쳐놓고 꿀꺽, 꿀꺽 마시는 걸 보고 황당하게도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어희가 생각났다. 종종 어희는 급할 때 빨대를 밀어놓고 벌컥 마시곤 했다.

“허어?”

내가 고민에 빠지다니, 마음이 심란하다니. 같은 중대한 자아 돌아보기 시간에 어희를 떠올린 도웅은 마른세수를 했다.

“자. 그래서 고민이 뭔데.”

달달한 키위 향과 함께 나윤이 물었다.

“고민이 있어.”

“응, 무슨 고민.”

“고민이 있다는 게 고민이야.”

나윤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얼룩졌다. 그러나 이렇다 저렇다 말을 늘어놓을 게 마땅히 떠오르지 않을 만큼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소시오패스 캐릭터처럼 무언가 결여되었다거나 심각하게 이성적인 성격은 못되었다. 달뜬 호흡을 가다듬고 말문을 열었다.

“마음과 생각이 너무 복잡한 걸 고민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지금 고민 중이야. 일단 최대한 침착하게 떠오르는 것들을 말해볼게.”

심장이 쿵쿵 들썩였다.

“나, 왜 여기서 두 시간째 앉아 있지?”

“누구 기다리고 있던 거 아니었어?”

나윤의 입안에서 키위 조각과 얼음 조각이 씹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었어. 포근하고 안락한 내 집에 왜 가기가 싫지?”

“층간 소음이라도 시달리고 있나 보지.”

“전혀!”

이사 왔을 때부터 층간 소음에 시달린 적이 없는 축복받은 집이다. 최근에 누수를 겪긴 했으나 좋은 집주인이자 건물주가 후하게 건물 월세를 절반 깎아주었다.

“너는 왜 놀라면 목이 막혀?”

“뻥이야. 목말라서 음료수 달라고 한 거였어. 고민 상담료.”

“그 케익은 누구 주게.”

“…이게 네 고민 해결에 도움이 돼?”

석연찮아하는 나윤에게 “떠오르는 걸 꺼내는 중이야.” 맞받아쳤다.

“형 주게.”

“네가 형제가 있었던가? 너 나랑 같은 외동이잖아.”

“같이 사는 형. 됐지? 다음은 뭔데.”

목구멍이 살짝 조여진 느낌이라 미간을 좁히고 힘껏 입을 열었다.

“왜 주문을 안 하지?!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거야?”

스스로도 느낄 정도로 목소리가 격앙되어 있었다.

“누가 주문을 안 해?”

나윤의 질문에 도웅은 헛숨을 들이켰다.

아무런 문제 없이 자랐다는 게 문제였다. 면역이 없다는 건 이렇게나 무서운 거였다. 생전 처음 가져본 심란함은 원인을 찾기까지 빙 돌아야 했다. 타고난 성격이 한몫했겠지만, 번듯하고 화목한 가정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도웅은 어떠한 근심, 걱정거리 없이 성장했다.

하다못해 기껏 들어간 대학의 선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퇴를 결심하고 유학길에 오를 때까지도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손님이.”

그런데 지금은 걱정이 생겼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주문을 하는 어희가 3년 만에 처음으로 이틀이나 주문을 하지 않았다. 이건 심각한 문제였다.

“…가게 힘들어?”

눈치 없는 척하는 대학 동기 놈은 미안한 얼굴로 얻어 마신 키위 주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법 눈치가 빠르다 자부하고 있었으나 정작 자신에게는 둔감했다. 마른세수를 한 도웅은 보다 더 심각해졌다.

“…리뷰 못 받겠다.”

카페와 연을 끊어버릴 줄이야.

믿고 기한을 늘려줬더니 뒤통수를 맞아도 거하게 맞아버렸다.

“아니야. 내가 꼭 달게. 사진 리뷰 달게.”

징그럽게 달래는 나윤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끔찍한 케익 사진이 실린 리뷰가 달린다면 더 큰 일이다. 벌써부터 카페 매출이 뚝뚝 떨어지는 게 불 보듯 뻔했다.

“아니! 너는 절대 달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달지 마. 누가 목에 칼 대고 협박해도…, 아니 그런 경우면 달고 그것만큼 위급한 상황 아니면 달지 마.”

“거참…. 이랬다저랬다 까다롭네.”

나윤의 중얼거림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보냈다.

“나 집에 갈래. 너도 가.”

믿고 믿었던 어희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될 줄이야. 집도 알고 있는 사람의 뒤통수를 치다니, 간도 크다.

귀에 대롱대롱 달린 마스크를 똑바로 쓴 나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조심해. 너 되게 거리낌 없으니까.”

거리낌이 없다니. 생뚱맞게 무슨 이야기인가. 

도웅은 이해가 되지 않아 나윤을 쳐다봤다.

“행동하는 데에 너무 거리낌이 없잖아. 가끔은 조심하면서 살아야지.”

힘은 행동의 원천이 아닌가?

영문 모를 소리에 도웅은 다시 눈을 끔벅였다. 벌써 카페 문을 열고 나가려는 나윤은 눈매를 곱게 접어 웃었다.

“나 간다. 케익 고마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린 나윤이 남기고 간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퇴근 준비를 했다.

* * *

집에 도착한 도웅은 나윤이 했던 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했다.

1학기도 못 다닌 짧은 대학 생활에서도 어장남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니지 않았던가. 어희가 저를 좋아하게 된 계기에 타인의 간섭은 없었다고 했지만, 아예 도웅 자신까지 연관이 없지는 않을 터다. 누군가의 조언은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

그래서 더 기다렸다. 일주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틀을 더하면 총 구 일을 기다린 셈이다.

그러나 어희는 여전히 주문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기분이 꿀꿀했고 저조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태풍 소식까지 들려와 가뜩이나 가라앉은 기분을 더 음울하게 만들었다.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했는데 어느 이가 실없이 하하 호호 웃고 있겠는가. 오해가 쌓여, 고백을 받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둘은 단골손님과 카페 주인인 단순한 관계였다. 비록 이렇게 되었다고 한들, 리뷰를 달아주겠다고 약속을 하지 않았던가. 도웅은 속이 문드러져 가고 있었다. 하루에 다섯 번은 한숨을 쉬었고 세 번은 이를 갈았다. 그리고 직원 영호는 로얄 골드 펠리스의 ‘로’자도 꺼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하루가 또 저물었다.

마감 후 여유 있는 티 타임은 어느새 분노와 복수로 얼룩진 시간으로 변질되었다.

열 번을 우린 차에 울적한 도웅의 얼굴이 비쳤다. 

함께 전시회도 보러 가고 밥도 먹고 해외까지 가지 않았는가. 게다가 짧지만 동거도 했었다! 어째서 나를 배신한 걸까.

9일간 도웅은 전동 킥보드에 먼지가 쌓일까, 매일 마른걸레로 한 번씩 닦아냈다. 내일도 마른 걸레질을 할지 모른다는 게 더 울적하게 만들었다.

맹물이나 다름없는 차를 홀짝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어희 얼굴을 보고 직접 이야기를 해봐야 할 거 같다.

창고에 정차해놓은 전동 킥보드를 꺼냈다. 오랜만에 헬멧을 쓰고 가게 문단속을 했다. 이제는 여름이 오려는지 저녁에도 얇은 셔츠 차림으로 돌아다녀도 춥지 않았다.

안전 속도를 지키며 어희가 머무는 아파트, 로얄 골드 펠리스에 도착했다. 늘 세워뒀던 공동 현관 구석에 전동 킥보드를 주차하고 어희가 줬던 현관 키를 갖다 대자 문이 열렸다.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도웅의 심장은 다시금 쿵, 쿵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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