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90)

이렇게 분노가 들끓었던 적이 있었던가? 

나이가 나이인지라 아예 없다고 호언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매우 오래간만이라는 건 확실했다. 적어도 3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다.

-띵동.

도웅은 비밀번호 대신 벨을 눌렀다. 어희가 저녁 약속을 착각해, 기다리게 했을 때는 서운했던 것이지 화가 난 게 아니다. 심지어 그 일도 불과 2개월 전이었다.

-띵동.

호수처럼 고요하고 달걀 노른자처럼 섬세한 도웅의 감정을 이렇게나 뒤흔들어 놓은 자, 어희라는 남자에게 해명을 듣지 않으면 용서가 되지 않았다.

-띵동.

아니. 핑계라도 좋다. 어차피 나는 본래 목적이었던 리뷰만 받으면 된다.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집착을 담아 한 번 더 벨을 눌렀다.

-띵동.

약속했던 어희둥둥을 해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서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걸까.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서서히 서운함으로 바뀌어 가려 할 때 우당탕탕하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 너머에서 들릴 정도면 크게 넘어졌거나 무언가를 요란하게 떨어트린 게 분명했다. 

설마 또 요리하나? 

도웅은 깜짝 놀라 무지성으로 벨을 누르던 못된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다친 걸까? 

오도카니 서 있기를 몇 분이 지나자 현관문이 열렸다.

“어…, 사고 났어요?”

얼굴을 보자마자 빚쟁이처럼 리뷰를 독촉하려던 도웅은 빼꼼히 보이는 어희의 몰골에 모진 말을 삼키고 걱정을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게 그의 광대에는 퍼런 멍이 들어있었고 현관문을 짚은 왼손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입술은 터져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교통사고 당했어요?”

“…아뇨.”

“계단에서 굴렀어요?”

그거 말고는 딱히 설명이 안 되는 부상이다. 어희 성격으로 보아 지나가는 사람과 주먹다짐을 하지는 않을 테니.

고개를 가로저은 어희는 이내 턱으로 흐르는 액체를 느꼈는지 습관처럼 손등으로 훑다가 붕대에 피가 묻어나는 걸 보고 당황한 눈치다.

“…입술 터졌어요.”

“아.”

“저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활짝 문을 열어준 어희는 도웅이 들어가자 눈에 띄게 움찔했다. 어희둥둥 먹튀에 대한 합당한 분노를 쏟아내기 위해 찾아오긴 했으나 가뜩이나 다친 사람을 몰아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과민하게 반응하는 어희는 어쩐지 평소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현관문을 닫는 모습이 소심하게 보일 정도로.

띠리릭, 문이 잠기고 나서 현관으로 들어간 도웅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집안은 엉망이었다. 어질러져 있거나 더럽지는 않았고 다만 가구 배치가 엉망이었다. 소파는 벽에 딱 붙어있었고 낮은 테이블은 반대편 벽에 갖다 대놨다. 기다란 식탁은 싱크대에 찰싹 붙여놨고 식탁 의자는 베란다 문을 막고 있었다.

“…이사 가요?”

갈 때 가더라도 리뷰 한 줄은 괜찮잖아.

말도 없이 이사를 가려 하다니. 괘씸하고 서운하다. 하루만 더 늦었더라면 어희는 영영 떠나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이 서늘해졌다. 도웅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뇨.”

“그러면 집안 꼴이 왜 이래요?”

“으음.”

미간을 좁히고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 어희는 티슈를 뽑아 터진 입술을 막았다.

“어희 씨.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참다못해 찾아온 단골은 무슨 사고라도 당한 것처럼 만신창이고 집안은 폭풍우가 쓸고 간 듯 뒤죽박죽이다. 도웅은 이 모든 중심에 있는 집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티슈를 피로 적시고 있는 어희는 집요하게 눈을 피했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그의 눈동자는 결국 아래를 향했다.

“어희 씨.”

“…예.”

“무슨 일이냐니까요.”

그에게 다가가자 또 넓은 어깨가 움찔했다. 겁많은 강아지처럼.

“도둑 들었어요?”

“아뇨.”

“그럼 뭐, 누구랑 싸웠어요?”

“아뇨.”

“넘어졌어요?”

“…예.”

얼마나 거하게 넘어지면 손에 깁스하고 얼굴에 멍까지 들까. 심지어 가까이서 보니 멍이 하나가 아니다. 제일 큰 게 광대에 든 푸른 멍이고 이마에도 연하게 멍이 들어있다.

“거짓말?”

“아뇨. 진짜.”

“어디서, 어떻게?”

“집에서, 식탁에 발이 걸려서, 식탁 의자에.”

“팔도?”

“이건 내 발에 걸려서 소파 팔걸이에 부딪쳐서.”

꾸준히 대답은 잘한다.

“방금 우당탕 소리는?”

“작업실에서 나오다 문 모서리에 부딪쳐, 뒤로 자빠졌더니 미니어처가 부서졌습니다.”

그의 변명 같은 말에 작업실에 가봤더니 정말로 미니어처 하우스와 잔해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무언가 밟혀 발을 들어봤더니 작은 알사탕이다. 눈살을 찌푸리고 어희를 돌아봤다. 

원래 덜렁대는 타입은 아닌데 이렇게 다칠 수 있나?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기도 이상하다. 이미 온몸이 아파 보여서.

“그…,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어희는 가볍게 끄덕이는 거로 대답을 대신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예.”

“거짓말.”

다른 누구도 아닌 어희가 먹고 싶은 게 없을 리 없지 않은가.

“예. 거짓말입니다.”

깔끔하게 인정한 어희를 보자 화가 쏙 들어갔다. 벽에 찰싹 붙어 놓은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런데 가구는 또 왜 이렇게 해놓은 거예요?”

“또 다칠 거 같아서 치워놨습니다.”

“…작업실은요.”

“그건… 광고 때문에 불가항력입니다.”

후. 한숨을 내쉬었다.

맡은 광고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보다. 어희에게 빚을 진 거처럼, 도웅은 마음이 무거웠다.

어느 날은 잠도 안 자고 삼 일을 꼬박 새우질 않나, 지금은 크게 다쳤어도 일을 쉴 수 없단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서 은밀하게 티켓을 구할 걸 그랬다. 도웅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붕대가 감긴 어희의 손을 바라봤다.

“그 손으로 일할 수 있어요?”

“어찌어찌합니다.”

불쑥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어희는 작은 알사탕을 하나 까먹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단 게 먹고 싶은 모양이다.

“디저트라도 가져올까요? 아니면 커피라든지?”

당신 내 디저트 좋아하잖아. 

마음 한구석에서 외쳤고.

그런데 왜 주문하지 않았어? 

다른 곳에서 대꾸했다.

그리고 불현듯 대학 동기 놈의 조언이 뇌리를 스쳤다. 

지금 나…, 거리낌 없다.

“도웅 씨?”

넌지시 불린 이름에 어희를 바라보자 피가 멎었는지 입술에 티슈 조각을 묻히고 찡그리며 웃었다.

“혹시 지금 불안합니까?”

직설적으로 꽂지 말라 했건만 또 내 감정을 맞추는 그에게 냉큼.

“네.”

긍정했다.

불안하다. 왜 불안한지 모르겠는데 불안하고 기분이 엉망이었다. 걸음도 조심히 걷는 어희가 거침없이 도웅에게 다가왔다.

여섯하고도 반 발자국을 걸어오면서도 어희는 한 번 미끄러질 뻔했다. B급 코미디 프로의 몸 개그처럼 보였다.

“왜, 그러세요.”

“어희 씨가…….”

“예. 제가?”

“리뷰도 안 써주고 도망간 줄 알았어요.”

분명 그랬다.

그래서 일주일 넘는 기간 동안 의심하고 화가 났다. 그런데 막상 두 눈으로 그를 보니까 화가 눈 녹듯 사라졌고 의심만 남았다.

“…정말요?”

마지막 남은 의심을 되려 어희가 던졌다.

“네. 매일같이 주문하는 사람이 거진 열흘간 주문을 안 하는데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어희 씨 내 디저트 좋아하잖아요.”

뒤늦게 도웅은 말을 덧붙였다.

“물론 제 카페에서만 주문하라는 고집은 아닌데, 어쨌든 우린 약속을 했잖아요. 어희둥둥, 리뷰. 구두였어도 약속은 약속이에요.”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다.

그리고 어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리뷰, 내 리뷰….

“도웅 씨. 리뷰, 달아드릴까요.”

“…….”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말간 눈을 끔벅이는 걸 보고 어희는 재차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언제요?”

“지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어희는 핸드폰을 찾으러 작업실로 향했다. 영 불안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이윽고 정말로 핸드폰을 손에 들고서 나온 어희를 보자 도웅은 심장이 풀쩍풀쩍 뛰었다. 꿈속에서만 이뤄졌던 목표가 드디어 현실로 다가온 순간이다. 심장이 풀쩍 뛸만했다.

“열흘이 안 지나서 다행입니다.”

요거요 시스템은 주문한 지 열흘이 지나면 리뷰를 달 수 없었다. 하루 더 늦게 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큼직한 요거요 로고가 어희의 핸드폰에 띄워진 걸 두 눈으로 확인하자 마냥 설렘으로 뛰었던 가슴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주문목록을 채우고 있는 내 가게를 보자 더욱.

제일 상단, 빨간 글씨로 < 11시간이 지나면 리뷰를 달 수 없어요 :( > 같은 문구가 보였다. 어희의 손끝이 리뷰 작성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빼앗아버렸다.

“…….”

어희는 제 손과 도웅의 손을 번갈아 쳐다봤다.

“리뷰는 다음에 받을게요. 쉬세요.”

요거요를 종료하고 핸드폰을 멀리 있는 식탁에 올려놨다. 힘 조절에 실패해, 탕! 하는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어쩌면 액정에 금이 갔을지도 모른다. 도웅은 벌게진 얼굴로 신발을 구겨 신고 어희의 집을 뛰쳐나왔다.

계단을 서너 칸씩 뛰어 내려가다 15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고 전동 킥보드를 몰아서 집으로 향했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처음으로 안전 속도보다 5km를 넘었다.

황급히 집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쓸어 올리다, 깨달았다.

“내 헬멧.”

두고 왔다. 어희의 집에.

“으아악.”

소파에 몸을 던져 작은 비명을 질렀다. 마음 같아서는 온갖 난동을 피우며 맘껏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혼자 건물을 쓰는 게 아닌 이상 그런 민폐는 끼칠 수 없다.

그래, 민폐는 끼칠 수 없다. 그런데 방금 끼치고 왔다. 어희에게.

그토록 원한 리뷰를 얻을 수 있었음에도 내 손으로 저 멀리 던져버렸다. 정확히는 식탁이었지만, 어쨌든 스스로 포기한 건 변함없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도웅의 일생일대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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