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90)

* * *

집으로 돌아온 도웅은 젖어서 잘 벗어지지 않는 신발을 힘줘서 벗어 냈다. 양말까지 홀랑 벗겨졌으나 정리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이며 옷이며 가리지 않고 빗물에 폭삭 젖어서 불쾌감이 배로 되었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맨손으로 닦으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걸음걸음마다 물 자국이 생겼다.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온 도웅은 얼음을 잔뜩 넣은 냉수 한 잔을 쭉 들이켰다.

“후.”

화가 가라앉지 않아서 조금은 짜증스럽게 젖은 머리칼을 타올로 털었다. 새 소파에 앉아 얼음을 와작와작 씹었다.

어희가 알려준 정답 덕분에 고민은 날아갔고 그 빈자리에 분노가 자리를 잡았다.

“도웅 씨, 나 좋아하잖아.”

그 말을 듣자마자 놀랍게도 그간 속앓이가 거짓말이었다는 양 쉽게 인정할 수 있었다.

나는 어희를 좋아한다. 그러나 좋아하는 감정과는 별개로 화가 치솟았다.

사람은 숨기고 싶은 감정이 있기 마련인데, 그걸 당사자에게 대놓고 꽂아버린 어희가 용서되지 않았다. 곰곰이 되새겨보니까 허락도 안 구했다. 알려준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말을 이었으니까.

게다가 일전에 함께 술을 마시면서 직설적으로 꽂지 말라고 부탁도 했던 게 떠올라, 도웅의 분노는 더 커졌다.

절대 용서 못 한다.

“…….”

영영은 아니고 최소 하루는 있어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을 바꾼 도웅은 컵이 빈 걸 보고서 부엌으로 향했다. 오늘은 탄산음료라도 마셔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와르르 얼음을 컵에 쏟은 후 냉장고를 연 도웅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탄산수는 있어도 콜라나 사이다 같은 건 없었다.

“에이드는 안 당기는데….”

컵에 잔뜩 담은 얼음을 손으로 하나 집어 먹은 뒤 나가서 사 올까, 잠깐 망설였으나 창문을 때리는 억수 같은 빗줄기를 보자 망설임이 쏙 들어갔다.

도웅은 비 오는 날이 싫었다.

우산 쓰는 것도 귀찮고 신발이 젖는 건 물론 습기 때문에 반곱슬머리는 더 부스스해졌다.

냉장고에서 모과차를 꺼냈다. 비도 맞았으니까 따뜻하게 모과차 한 잔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차를 끓이고 함께 먹을 간식거리를 찾았다.

쌀과자 세 개와 따뜻한 모과차를 들고 도웅은 소파에 앉았다.

“아. 짜증 나네”

샤워를 해서 개운한 몸도 따뜻한 모과차도 새 소파도 모두 좋았다. 그런데 짜증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짜증 났다.

어희였다면 디저트로 마음을 손쉽게 달랬으리라. 왠지 지는 기분이 들어서 분했다. 이렇게 화가 나 본 적 자체가 드문 도웅은 이 화를 어떻게 해야 해소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답인가….”

쌀과자를 입에 물고 핸드폰을 찾았다. 시간 때우기에는 역시 핸드폰만 한 게 없다. 새로 올라온 호평 가득한 리뷰라도 보면서 시간을 보내야겠다.

“…아니…….”

그리고 핸드폰을 카페 주방에 두고 온 사실을 깨달았다.

최소한의 일만 하며 주방 구석에서 고민의 시간을 보냈다. 핸드폰은 당연히 보지 않고 선반에 올려놓고서 세상에서 제일 큰 고민을 가진 사람처럼 굴고 있을 때 홀이 시끄러워져 나가봤더니 어희가 있었다.

급히 얼음 찜질팩을 만들고 어희에게 감정 팩트 체크 당한 뒤 곧장 집으로 왔으니 핸드폰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

“되는 일이 없네.”

아무리 그래도 지금 같은, 지갑보다 핸드폰을 먼저 챙기는 시대에 핸드폰을 두고 온 게 이제야 떠올린 게 황당했다.

비는 아직도 매섭게 내리고 있었다. 도웅은 이번에도 외출 생각을 고이 접었다. 핸드폰은 없어도 대체할 건 있다. 침실에서 테블릿pc를 들고나온 도웅은 별스타그램을 켰다.

모과차가 식는 줄도 모르고 테블릿pc 삼매경에 빠졌다가 나른함을 이기지 못하고 낮잠을 잔 도웅은 저녁 열 시에 슬며시 잠에서 깼다.

핸드폰을 두고 온 사실을 까맣게 잊어서 핸드폰을 찾아서 침실까지 들어갔다 온 도웅은 소파 아래에 떨어져 있는 테블릿pc를 들었다.

“으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잠을 자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어희의 해답에 고민이 해결된 건 좋았으나 찝찝했다.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고 조언을 구한다면 좋을 거 같은데, 이 야밤에 뜬금없이 전화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늘어놓기가 귀찮았다. 이 시간이면 부모님께 전화도 못 드렸다. 도웅은 고민하다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장우산을 들고 카페로 향하는 길, 도웅은 불 꺼진 카페 앞에 누군가가 서성이는 걸 발견하고서 걸음을 멈췄다. 짧은 머리칼을 보아 어희는 아니었다.

남자는 커다란 키를 뽐내며 가게 안을 기웃거렸다. 이내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았는지 뒤통수를 한 번 긁고는 몸을 돌렸다. 회색 마스크를 쓴 남자는 도웅을 보고는.

“도웅~”

아는 체를 해왔다.

도웅은 이제 더 이상 대학 동기 놈이 놀랍지도 않았다.

“어~ 웬일이야.”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카페 문을 열자 알아서 들어온 나윤은 마스크를 벗고는 이전에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근처 지나다가 네 생각나서 잠깐 들림. 나 커피 주면 안 되냐?”

“오늘은 안 돼. 마감 다 끝났어.”

이미 청소가 다 되어있는 머신을 켜서 한 잔 내어주기에는 귀찮음이 컸다. 주방에서 핸드폰을 찾아서 나왔다.

어희에게 부재중이 다섯 통이나 와있었다. 그중에 두 통은 카페에 오기 전인 듯 시간대가 맞지 않았다.

인상을 찡그리자 나윤은 눈치 없는 척 도웅을 졸랐다.

“그럼 키위 주스라도 갈아주라.”

그 정도는 힘든 일도 아니었다. 도웅은 냉장고를 열어 키위를 꺼냈다. 아이스 스쿱으로 대충 얼음을 퍼 믹서로 갈아버렸다. 설거지 늘리기 귀찮아, 일회용 컵에 내주었더니 나윤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꿀꺽, 꿀꺽 잘도 마셨다.

“그러고 보니까 지난번 고민은 어떻게 됐어?”

맞은편에 앉아서 핸드폰만 노려보던 도웅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조언을 구할 사람이 있긴 있었다.

“너 그때 나한테 거리낌 없다고 한 거 무슨 뜻이야?”

“뭐가 무슨 뜻이야? 샌드위치 같은 건 안 팔아? 나 배고파.”

배고프면 식당을 가라며 타박하면서도 에그타르트 두 개와 흑미 크림빵 두 개를 접시에 담아왔다. 흑미 크림빵을 보자 또 어희 생각이 났다.

“단순히 여기저기 껄떡거리는 거처럼 보이니까 조심하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잘못 이해한 거 맞지?”

작은 에그타르트를 반으로 쪼개 입에 넣은 나윤은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유 없어? 나 우유도 줘. 크림빵을 가져왔으면 우유도 같이 가져와야지, 센스가 없어.”

이 자식이….

언제부터 크림빵과 우유가 단짝이었는지 모르겠다. 도웅은 300ml 짜리 우유팩 하나를 던졌다. 재주 좋게 받은 나윤이 우유를 뜯으며 말을 이었다.

“웬 껄떡. 네가 그런 스타일은 아니지.”

우유를 마신 나윤은 캬, 소리와 함께 살 거 같다는 표정과 함께 잠깐 생각에 잠긴 듯 크림빵만 묵묵히 먹었다. 그러다 생각이 끝났는지 말을 꺼냈다.

“그런 스타일은 아니긴 한데, 너 모르는 사람이 보면 넌 그런 스타일이야.”

“갑자기?”

“어. 오해 사기 딱 좋아. 호감 있는 거처럼 굴잖아. 뭐, 네 성격이 원래 그런 걸 어찌하겠냐마는. 여하간 그 뜻은 아니었어. 혹시 포장도 돼? 맛있다.”

크림빵이 꽤 괜찮은 모양이다.

상자에 남은 흑미 크림빵 네 개를 모두 포장해, 테이블에 올려놨다.

“여하간 그때 말한 건 다른 뜻이야. 대부분 행동하기 전에 생각이라는 단계를 거치기 마련인데 넌 늘 행동이 앞서고 생각은 뒤에서 허겁지겁 쫓아오는 느낌이지.”

“그건 또 무슨 뜻이래.”

“내가 먹는 이 크림빵을 무슨 수를 써서든 먹어야겠다면 나한테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거나 돈을 주고 나한테 사가겠지.”

그러겠지. 힘으로 뺏지는 않을 테니까.

도웅이 수긍하는 걸 보고서 나윤이 말을 이었다.

“대부분은 ‘와 맛있겠다. 물어봐야지’ 하고서 움직이는데 너는 대뜸 나한테 ‘안녕! 내 이름은 도웅인데 나랑 크림빵 가게까지 갈 정도로 친해져 볼까?’ 식이니까.”

얄밉게 연기까지 하는 나윤은 우유를 털어 마셨다. 그리고는.

“나하고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사실은 크림빵 때문에 접근한 거 알면 얼마나 상처받겠냐. 뭔 십억, 백억도 아닌 고작 크림빵 때문에.”

도웅은 이번에도 수긍하고 말았다.

딱 어희에게 저지른 일이어서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합죽이가 된 도웅은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빵만 뜯어 먹던 나윤은 문득 물었다.

“그건 왜 물어? 고민이 잘 해결이 안 됐어?”

“해결했는데.”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됐나 보네.”

“아니. 누가 해결해주던데.”

대뜸 정답을 꽂아버린 어희 생각이 나버려 도웅은 또다시 슬쩍 인상을 쓰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잘됐네. 그런데 고민도 해결한 양반 얼굴이 왜 그런데?”

“화 났거든.”

도웅의 말에 나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가? 화를? 왜?”

“야. 봐봐. 크림빵을 어떻게 먹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누가 갑자기 그냥 먹으라고 입에 쑤셔 넣어주면 화 안 나겠냐?”

마지막 에그타르트를 날름 먹은 나윤은 손가락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며 별거 아니라는 어조로 대답했다.

“크림빵을 누가, 왜,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사실 내 손에 든 건 크림빵이 아니라 소라빵이 아니었을까 같은 고민으로 이어가니까 답답해서 넣었나 보지.”

“…….”

“정말 그거 때문에 화난 거 맞아? 또 핀트 잘못 잡은 게 아니라?”

도웅은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숨기고 싶은 감정이 있다는 건 맞지만, 좋아하는 줄 깨닫지도 못하고 방황했던 주제에 숨길 여유가 있긴 했나? 숨긴다는 건 일단 내가 갖고 있어야 가능한 부분이었다. 갖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숨긴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으음.”

도웅의 미간 골은 더 깊어졌다. 

심각한 표정을 짓는 도웅을 내버려 두고 나윤은 키위 주스를 바닥까지 빨대로 긁어 마셨다.

“고민 상담료로 한 잔만 더 줘. 딸기랑 키위 갈아주면 안 돼?”

야밤에 찾아온 식객을 노려본 도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