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련자의 빠른 손놀림으로 딸기와 키위를 갈아 내온 도웅은 도로 앉아 조잘조잘 정리가 되지 않는 생각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어희가 감정을 본다는 사실을 배제하고서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래도 한 번 고민의 시기를 거쳤다고 제법 횡설수설하지 않고서 신경 쓰이는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말하다 보니까 이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은 아니거든. 그런데 곱씹을수록 엄청 화가 나.”
“원래 화는 곱씹을수록 커지는 거니까.”
이해는 돌아왔으나 정확하게 왜 그런지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 내가 해결해달라 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내 고민을 가져가 버리잖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같은 말만 빙글 돌려서 반복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윤은 보란 듯이 크게 하품을 했다.
“하암. 삼십 분째 지루하지도 않냐. 주스 괜히 얻어 마셨네.”
“…이게 끝이야.”
“핀트 잘못 잡았네. 삼십 분만 들어도 난 알겠는데. 이거 말하면 나한테 고민 날름 가져갔다고 욕할까 봐 못하겠다.”
나윤이 고민 상담을 해주는 것과 어희가 돌직구로 꽂아버린 감정은 다를 게 분명하다. 도웅은 눈을 한 번 굴리고서 상체를 앞으로 가까이 붙였다.
“아냐. 판단은 내가 할 테니까 일단 말해줘 봐.”
나윤은 피곤이 몰려오는지 주먹을 쥐어 눈 밑을 꾹꾹 누르며 대꾸했다.
“고민을 채간 것도 화가 나긴 했겠지. 네 나름대로 열흘 동안 꾸준히 고민했을 텐데. 그런데 보통 그런 경우에는 고마워해. 네가 화난 건 상대방이 네 의사를 묻지도 않고 해결해버린 부분이잖아. 어쨌든 네 고민이고 깨닫든 못 깨닫든 네가 감수해야 할 몫이라고 여겨서 넌 네가 뺏겼다고 여기는 거 아니야?”
“오. 나 이해 못 했어.”
나윤은 썩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듣다 보니까 연애 얘기 같은데 톡 까놓고 물을게. 고민이 뭐였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나는 몰랐거든. 그냥 계속 신경이 쓰이고 크, 크림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도 날리고 해서, 내가 왜 그랬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나타나서 ‘너 나 좋아하잖아!’ 해버렸어.”
“…그게 끝?”
“응.”
팔짱을 낀 나윤은 한 번 더 크게 하품을 했다. 하품의 여파로 눈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럼 넌 네가 스스로 깨닫고 싶었나 보지. 슬슬 정답에 가까워지고 있을 때 상대방이 정답을 알려주니까 짜증 난 거고. 이걸 스포라고 할 수 있나? 여하간 짜증 날 만하네. 괜히 간섭받은 거 같잖아.”
“그… 런가?”
도웅은 갸우뚱거렸다.
“무슨 퀴즈쇼도 아니고 ‘정답! 도웅은 나를 좋아합니다!’ 해버린 꼴이잖아. 그 사람 누군진 몰라도 눈치가 없거나 네가 답답하게 굴었거나 둘 중 하나일 듯.”
어희는 눈치가 부족했고 나는 답답하게 굴었다. 둘 다 맞는 말이었기에 도웅은 또 합죽이의 길을 택하려다 “그럼 어쩌지?” 하고 물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네가 알아서 해결해야지. 근데 왜 좋아하는 걸 몰라? 같이 있고 싶고 손만 닿아도 존나 좋았을 텐데. 상대방이 뭐 집안 원수쯤 되나?”
차마 남자라서 그랬다는 말은 할 수 없어서 도웅은 입을 꾹 다물었다.
“옛날에는 너 같은 성격이 세상 살기 좋아 보였는데 지금 보니까 영 아니다.”
“나도 요새 체감 중인 부분이야.”
나윤은 꼬물꼬물 마스크 끈을 귀에 걸었다.
“잠깐 들리려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거의 한 시간 붙잡혀 있었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나윤을 보자 도웅은 무척 고마워졌다.
“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
“친구끼리 고마울 것도 많다. 나 간다. 잘 먹었어.”
나윤은 전에도 그랬던 거처럼 바쁜 걸음으로 카페를 나갔다. 멀뚱한 얼굴로 앉은 도웅은 주섬주섬 테이블을 정리했다. 나중에 만나면 밥이라도 한 끼 사줘야 할 거 같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 어희하고 대화를 해봐야겠다. 크림빵으로 비유를 들으니, 내가 그리 답답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어쨌든 어희도 악의는 없었을 게 분명하니까.
* * *
다음날. 자다가 일어난 도웅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혹 기우일까 싶어 슬며시 입을 벌려 소리를 내봤다.
“아아.”
쩍 갈라진 목에서 맛탱이 간 소리가 나왔다.
“어이가 없네….”
혼잣말을 한 도웅은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듣기에도 낯선 목소리에 핸드폰을 열었다. 출근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전화 한 통 걸지 않은 직원 영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사장님 오늘 쉬어요?
쉬기를 바라는 들뜬 목소리에 도웅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 나 감기 몸살.”
-네에? 괜찮아요? 아, 하긴 요새 환절기라서…. 약은 있어요?
“어어. 찾아보면 있을 거야. 내일도 상태 안 좋으면 나, 콜록. 출근 못 하니까 부탁해.”
목에 가시가 돋은 것처럼 말을 하는 내내 따끔거렸다. 걱정하지 말고 몸조리 잘하라는 대답을 듣고 나서 핸드폰을 충전 패드에 올려놨다.
어제 모과차까지 끓여 마셨는데 몸살이라니, 억울해 죽을 거 같았다. 귀찮아도 침실에서 나가 약을 찾아 챙겨 먹은 도웅은 이불을 여미고 전기 매트 온도를 높였다. 불과 이틀 전만 해도 정리할까 했던 전기 매트였다. 하루씩 미룬 게 이럴 때 도움이 되었다.
“우으.”
뜨뜻한 숨결을 내뱉으며 몸을 덜덜 떨었다.
자고 일어나면 열도 내려가고 좀처럼 괜찮은 상태가 될 것이다.
“…….”
괜찮은 상태가 되긴 개뿔. 혼자 사는 마당에 느슨하게 굴면 안 된다.
상태가 더 악화되어 응급실에 실려 가거나 구급차를 부를 새 없이 황천행일 수 있다. 혼자 사는 만큼 주의해야 했다.
도웅은 다시 핸드폰을 들어 영호에게 전화를 걸려다 멈췄다.
아무리 집이랑 카페가 가까워도 직원에게 병간호를 부탁하는 건 영 아니다. 심지어 영호는 도웅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망설일 것도 없이 핸드폰을 내려놓은 도웅은 얌전히 쉬기로 했다.
단순 몸살에 간호를 부탁할 정도로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며 자신을 다독였다.
그리고 다섯 시간 후. 도웅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잡았다. 손가락으로 통화기록에서 번호를 터치했다. 신호음이 세 번이 채 지나지 않아서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예, 도웅 씨.
“어, 어, 어희 씨. 살려주세요….”
눈앞이 핑핑 도는 건 물론이고 머리통이 깨질 거 같았다. 집단 구타라도 당한 거처럼 온몸은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핸드폰을 잡았을 때는 곧장 119를 부르려 했다.
그러나 구급차를 부르기에는 자신의 상태가 그리 나빠 보이진 않는다. 죽을 만큼 아프긴 해도 죽지는 않을 거 같다. 결정적으로는.
‘고작 몸살로…, 바쁜 분들을 불러도 괜찮을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도웅은 어희에게 SOS를 쳤다.
“저, 콜록. 몸살로 집에서 죽어가고 있어요…. 도움, 도움….”
하염없이 도움을 외치고 있을 때, 핸드폰 너머의 어희가 도어락 비밀번호를 물어봤고 도웅은 소중한 열 한자리의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전화가 뚝 끊겼다.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옆으로 치운 도웅은 이불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희가 온 듯했다.
큰 소리로 그를 부를까 하다가,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아 얌전히 누워있었다.
“도웅 씨. 많이 아파… 보이는군요.”
식은땀에 젖어 있는 내 몰골을 본 어희는 손에 들린 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놨다.
“병원 가야 합니까?”
구급차를 고민했을 때처럼 도웅은 잠깐 생각하고는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네.”
몸과 입이 따로 놀았다.
어희는 봉투를 뒤적여 직사각형의 네모난 박스를 꺼냈다.
“…오는 길에 체온계 사 왔으니까 열부터 재보죠.”
어희, 당신 제법 준비성이 철저하잖아.
뉴욕 이후 그가 구세주처럼 보였다.
어희의 손이 턱을 잡아 옆으로 돌렸다. 차가운 감촉과 세심한 손길에 조금 나은 거 같기도 하다.
“으어….”
무자비하게 귓구멍을 쑤시고 들어오는 귀 체온계의 행태에 짧게 신음했다. 삐빅하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귀가 편해졌다.
“며, 몇 도에요?”
한 39.9도는 되는 거 같은데.
체온계를 확인한 어희는 다시 도웅의 귓구멍을 쑤셨다. 그리고는.
“37.9도네요.”
안심하는 어조에 도웅은 믿을 수 없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체온을 잴 것을 요구했다.
“37.9”
같은 숫자에 도웅은 잘못 들은 게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39.9?”
“아뇨. 37.9”
총 다섯 번을 재도 변함이 없었다.
아니, 이렇게 아픈데 39.9도가 아니라고? 도웅은 슬쩍 전기 매트 온도를 낮췄다.
그래도 성급하게 구급차를 부르지 않아서 다행이다. 도웅은 안심했다.
“저 그런데 진짜, 켁. 아파요.”
혹 엄살처럼 보일까 봐 이불을 올리며 한 마디했다. 중간에 나온 기침이 이렇게 뿌듯할 수 없다.
이마에 어지럽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위로 넘겨준 어희는 이마에 해열 시트를 붙여주고는 봉투를 뒤적거렸다.
“약 먹었습니까?”
“네. 다섯 시간 전에요.”
“밥은요.”
“아직이요. 별로 입맛이, 콜록. 없어요.”
“그래도 이따 약 먹으려면 드셔야죠. 죽이라도 먹을래요?”
어희가 부엌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 터라 도웅은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국밥…, 사거리 나가면 소고기 국밥집 있는데, 거기서 포장 주문해주세요.”
“죽이 낫지 않겠습니까.”
“거기 국물이 끝내줘요…. 소고기 추가해주세요…….”
정말 아픈 거 맞냐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민망해진 도웅은 이불을 끌어 올렸다.
“예. 그러면 금방 사 올 테니까 쉬고 계세요.”
가만히 천장을 보고 누웠다.
이마가 시원해서 기분이 좋은 건지, 의외로 고열이란 걸 알게 되어 기운이 나는 건지 몰라도 어희가 오기 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염없이 천장을 쳐다보다, 몸을 돌아눕자 어희가 들고 온 봉투가 보였다. 도웅은 약 먹을 때 빼고는 일어난 적 없는, 천근만근 무거운 병자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