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90)

테이블에 다가간 도웅은 흰색 봉투를 열어봤다. 어희가 뭘 부랴부랴 싸 들고 왔는지 궁금했다. 처음 멀리서 봤을 때는 약국 봉투인 줄 알았는데 사이즈가 제법 컸다.

봉투 안에는 각종 해열제와 감기약, 해열 패치, 비타민 젤리, 이온 음료, 홍삼액, 투명한 비닐에 쌓인 생강까지 있었다. 생강은 집에 와서 깔려고 한 모양인지 흙이 묻어있었다.

흰색 봉투를 확인한 도웅은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몸 상태는 여전히 좋지 못했는데, 혼자서 끙끙 앓을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천장 무늬를 세면서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눈꺼풀이 올라가는 빈도가 뜸해지고 나중에는 잠에 빠졌다.

“…웅 씨. 도웅 씨.”

편안한 잠에 빠진 도웅을 깨운 건 어희의 손길이었다. 미약한 힘으로 어깨를 흔들며 다정한 어조에 눈을 뜬 도웅은 눈을 비볐다.

“밥 먹고 또 주무세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침대에서 먹을래요?”

“아뇨, 아뇨. 쏟으면 큰일 나요.”

침대에서 내려온 도웅은 어깨와 팔을 잡은 어희의 이 과함이 어색했다. 꼭 자신이 술 취한 사람 같았다.

그래도 덕분에 무사히 식탁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포장한 음식을 다시 그릇에 담았는지 국그릇에 국밥이 담겨 있었다. 도웅은 고맙다고 말하며 미지근한 물을 한잔 마셨다.

“먹여줄까요.”

“……절대 괜찮아요.”

수저를 들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방금도 걸을 수 있었는데 부축을 하질 않나. 어희의 병간호는 과한 감이 있었다.

소고기국밥을 먹으며 빈속을 달래며 어희를 곁눈질로 살폈다.

아파서 잊고 있었는데 싸운 게 생각난 참이다.

“저기, 어희 씨.”

맞은편에서 국밥을 먹던 어희의 시선이 느껴졌다. 도웅은 고개를 숙여 국밥을 먹으며 말을 이었다.

“어제 친구 도움을 받아서 고민을 해봤는데요.”

“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압니다. 그런데 오늘은 쉬셔야 할 거 같아요.”

“네?”

“말 많이 하면 안 좋답니다.”

어희의 시선이 거두어지더니 다시 수저를 들었다. 도웅은 눈을 깜박이다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위에 안 좋은데도 꾸역꾸역 누워있기를 권하는 어희 때문에 도웅은 또 침대로 돌아오게 되었다.

너무 많이 잔 탓에 잠도 안 오고 멀뚱히 누워서 어희가 설거지하는 소리를 들었다.

“뭐 시킬 거 없습니까?”

없다고 하면 바로 나갈 거 같은 느낌이 들어, 도웅은 테이블 옆에 있는 선반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거기 열면 가습기 있을 텐데, 그거 좀 틀어주세요. 목이 건조해요.”

목은 하나도 나아진 게 없었다.

말하는 중간중간에 간지럽고 따가워서 목을 한 번씩 가다듬어야 했다.

어희가 가습기를 침대맡에 틀어주었고 도웅은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목이 편안해지자 어희는 의자에 앉아서 도웅만 쳐다봤다.

더 시킬 거 없냐는 듯이.

“어희 씨. 제가 생각해봤는데, 어제는….”

어제 잠들기 전에 카페 혹은 어희의 집에서 침착하고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갈 거라는 상상을 그려봤지만, 현실은 병자와 간호인 그리고 도웅의 집이었다.

“말을 많이 하면 목에 무리가 가요.”

어희는 또 말을 자르고 쉬기를 권유했다. 가만히 누워있기에는 지루했다.

“저 열 떨어진 거 같은데 말 좀 해도 되지 않을까요….”

“오늘은 최소한으로만 말하도록 해요.”

귓구멍이 또 무자비하게 쑤셔졌다.

“…….”

체온계를 보고 말을 하지 않는 어희한테 “그거 봐요. 내렸죠? 이제 말해도 되죠?” 묻자 어희는 체온계를 세 번이나 더 쑤셔 넣었다.

“38.1도입니다. 가만히 누워서 쉬세요. 화장실 가고 싶으면 말해주시고요. 앞으로 필요한 말만 하세요.”

간호를 받고 있는데 어째서 열이 더 오르는지 모를 일이다. 도웅은 이러다가 39도까지 올라가면 어쩌지, 걱정하며 어희 말대로 얌전히 침대에만 누워있었다.

간간이 어희가 해열 패치를 교체해주었고 타올에 물을 적셔와 팔과 다리를 닦아 주었다.

확실히 몸이 아파서인지 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아침에서 점심, 점심에서 늦은 오후로 깨어날 때마다 시간은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어희는 한결같이 보였다.

의자에 앉아 한 번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잠에서 깨거나 뒤척이면 꼭 침대로 찾아와 이불을 올려주었다.

그리고 완전히 수마를 벗어나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는 바깥이 어두컴컴해진 저녁이었다. 내내 도웅의 곁을 지키던 어희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저녁 여덟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몸이 한결 가벼웠다. 부엌으로 나와 약을 먹으며 집을 둘러봤다. 어희의 신발이 없는 걸로 봐서는 돌아간 듯했다. 어희도 일이 있으니 종일 붙어있지는 못하는 게 당연했다.

땀에 젖은 트레이닝복을 벗고 속옷과 잠옷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 종일 씻지도 못하고 땀이 났다가, 식었다가를 반복했더니 몰골이 꾀죄죄했다.

뜨거운 물로 씻고 나온 도웅은 부엌에서 무언가를 끓이고 있는 어희를 보고 눈을 비볐다. 열이 너무 높아져서 이제는 헛게 보이는 모양이다. 사실 지금 몸이 나아진 게 아니라 더 안 좋아진 게 아닐까. 최후의 발악으로 기운을 내고 있으니 지금이라도 구급차를 부르라는 몸의 배려인 걸까. 도웅이 착잡함을 숨기지 않고 한숨을 푹 내쉬자 어희가 돌아봤다.

“저녁은 꼭 죽을 드셔야 할 거 같아서 사 왔습니다. 닭죽 괜찮죠?”

“어어? 안 갔어요?”

환각이 아니었다. 하긴, 감기 몸살로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다. 도웅이 가까이 다가가자 어희가 말렸다.

“머리부터 말리고 오세요.”

“네에.”

걸음을 돌려 헤어드라이어를 꺼냈다. 머리카락이 상하지 않게 찬 바람으로 말리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봤더니 어희가 서 있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싶어 헤어드라이어를 껐더니.

“미지근한 바람으로 말려요.”

“아. 네….”

시시콜콜한 것까지 걱정 어린 참견을 했다. 전에는 어떤 바람으로 말리든 신경 쓰지 않았으면서.

찬바람에서 미지근한 바람으로 바꾸고 어희의 감시하에 머리카락을 말렸다.

“그런데 진짜 왜 아직도 안 갔어요? 밥은 제가 알아서 해 먹으면 되는데.”

닭죽에 떠먹으며 묻자 어희는 “아픈 사람을 두고 어딜 갑니까.”라고 말해 도웅을 감동 시켰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는 어희의 등을 보며 도웅은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어제의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목 상태를 점검했다.

무슨 말만 꺼내려고 하면 딱딱한 얼굴에 다정한 어조로 ‘목 쓰지 마세요’ 같은 말로 입구 컷을 해 버리니 사전 점검은 필수였다.

“아아, 아아. 아.”

괜찮았다. 마침 설거지를 마친 어희가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유자차까지 한 잔 내왔다.

“목 괜찮아졌으니까 말할게요.”

아까처럼 말을 차단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는 어희에게 암묵적인 허락을 받았다고 여긴 도웅은 입을 열었다.

“저 어희 씨 좋아해요.”

“…압니다.”

“그런데 제가 같은 남자를 좋아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요. 그래서 고민 시간이 길어졌어요. 답답하게 해서 미안해요.”

설마 내가 남자를 좋아하게 될 거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성별이 남자라서 그렇지, 어희가 좋은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희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는 장난으로라도 ‘좋아해’ 같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는 제가 생각해도 인생 편하게 살았다고 여기는 쪽이에요. 서포트 해주는 부모님 힘이 크죠. 큰 굴곡 없이 살아온 만큼 고민다운 고민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제 원래 성격 자체가 단순하기도 하고요. 어제 화를 낸 건 어희 씨랑 비슷해요.”

“으음.”

“어희 씨 마음에 제가 여지를 줬다고 생각하는 게 싫다고 말했던 거처럼, 저도 비슷해요. 저 혼자 고민하고 혼자 깨닫고 싶었는데 갑자기 어희 씨한테 간섭을 받은 기분이라 화났어요. 이것도 미안해요.”

유자차로 달콤해진 입안을 느끼며 찻잔을 내려놓은 도웅은 묵묵히 듣고만 있는 어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요구했다.

“자. 이제 어희 씨, 사과하세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에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안 될 거 없다. 도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자고 갈 건지 물었고 어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자차를 한 잔 다 마시고 나서 도웅은 약을 삼켰다. 이후 보리차를 덥혀 마시며 어희의 생각 정리를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굳게 닫혀있던 어희의 입술이 열렸다.

“우선… 도웅 씨가 편하게 살았다는 건 동의하기 어려운 말이에요. 분명 서포트 해주는 부모님 몫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사장님은 사장님 나름대로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겠죠. 도웅 씨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리고 어제 일은 모두 제가 미안합니다. 배려가 부족했어요.”

“좋아요. 그럼 우리 화해한 거예요.”

악수라도 해야 하나. 도웅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제 손을 내려봤다. 분위기가 이상해질 거 같아서 마음을 접었다.

“오늘 간호해줘서 고마워요. 와, 진짜 죽는 줄 알았네.”

“…혹시 제가 신경 쓰이게 해서 아픈 겁니까?”

병에 이유를 따지는 건 반칙인데….

“꼭 드라마 같지 않아요? 비 좀 맞는다고 감기 쉽게 안 드는데, 오늘 바로 감기 몸살 때문에 고생했잖아요.”

빗속에서 정처 없이 걸었으면 몰라도 집하고 카페는 무척 가까웠다. 그거 잠깐 맞았다고 기다렸다는 듯 감기에 든 게 신기하면서도 웃겼다.

“오늘 카페 디저트 어땠어요? 맛있었어요?”

“어제 사장님이 만들어 놨을 만한 걸로만 주문했습니다.”

일개 단골이 그런 것도 아나…? 어쩌면 나보다 카페 굴러가는 걸 잘 알지도 몰랐다. 심지어 어제 다퉜으면서 오늘 카페에서 주문을 했다는 게 어희다웠다.

“이제 그만 자러 가시죠.”

“……저 오늘 많이 잤는데요.”

식탁에 올려진 잔까지 치운 어희가 도웅의 옆에 섰다. 일어날 때까지 계속 서 있을 거 같아서 도웅이 못 이긴 척 일어나 침실로 향하자 어깨를 잡아 욕실로 밀어 넣었다.

“양치만 하고 주무세요. 그리고 이거.”

어희가 커다란 플라스틱 통 하나를 내밀었다. 받아서 살펴보니 1리터짜리 가글 제품이다.

“감기 바이러스에 가글이 좋다네요.”

“아, 에….”

어희가 쓰는 엄청 매운 치약과 같은 상표를 달고 있는 가글 제품이 썩 달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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