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90)

칫솔을 물고 양치를 하는 중에 열려있는 욕실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어희가 서 있었다.

“침대 시트 어디에 있습니까?”

“…….”

치카치카.

도웅은 칫솔질을 멈추지 않고 눈을 깜박였다. 

침대 시트는 왜?

도웅의 의아한 눈빛을 읽은 어희가 대답했다.

“땀도 많이 흘렸으니까 갈고 자면 좋을 거 같아서요.”

치약 거품을 뱉은 도웅은 입에 칫솔을 물고 욕실을 나와 침실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붙박이장을 열어 이불을 꺼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불 교체까지 시키는 건 너무한 것 같았다. 도와주려고 입에 칫솔을 문 채 근처를 서성이자 어희가 욕실로 가라며 손짓했다. 도웅이 고개를 가로젓자, 이번에도 등을 떠밀었다. 등에 닿은 커다란 손의 감촉에 도웅은 못이기는 척 욕실로 들어갔다.

“전기 매트 위에 얇은 이불만 바꿔주시면 돼요. 고마워요.”

소매를 걷어붙인 어희의 뒷모습을 보다가 등을 돌렸다. 치약보다 더 매운 가글까지 하고서 욕실에서 나와서 침실로 향하자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있던 어희와 눈이 마주쳤다.

“누워요.”

답지 않게 강압적인 어투에 도웅이 우물쭈물 눕자 어희는 다정하게도 이불까지 덮어주었다. 

도웅은 말똥말똥 눈을 뜨고 어희를 쳐다봤다. 온갖 수발을 다 들어주는 통에 오늘 하루 어린이가 된 거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우리 엄마도 이 정도까지 지극 정성은 아니었는데, 어희는 유난히 세심했다.

“눈 감으세요.”

커다란 손이 눈가를 감쌌다. 그와 악수를 할 때마다 따뜻하다고 느꼈었는데 오늘은 시원하기만 했다. 아직 열이 떨어지지 않아 그런 듯했다.

“저기 어희 씨, 안 가요?”

“자는 것만 보고 가겠습니다.”

진짜 잠 안 올 거 같은데….

눈을 감고서 입술을 씰룩이던 도웅은 다리를 쭉 뻗었다가 곱게 접어 양반다리를 했다. 그러자 서늘한 손이 얼굴에서 떨어져 나갔다.

“잠 안 오는데 같이 보드게임이라도 한판 할래요?”

“…….”

“아니면 티브이라도…, 아. 버렸지 참.”

“…….”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슬쩍 눈을 뜬 도웅은 침대 옆에 서 있는 어희와 눈이 마주쳤다. 무드등 불빛을 고스란히 받고 있어서 어희가 어떤 표정인지 훤히 볼 수 있었다.

꾹 닫힌 입매와 고요하게 가라앉은 진갈색 눈동자가 어우러져 왜인지 시무룩해 보이기도, 심란해 보이기도 했다. 다시 눈꺼풀을 덮어주려는 듯 손을 올리는 어희의 손을 막고서 물었다.

“역시 오늘 바빠요?”

“아뇨. 괜찮습니다.”

막았던 게 무색하게 어희가 손을 내려 눈가를 다시 감쌌다. 캄캄해진 시야가 답답하기는커녕 재미있었다. 도웅은 어희의 손바닥 안에서 열심히 눈을 깜박였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저는 어희 씨처럼 감정을 못 봐서 설명해줘야 해요.”

산만하게 눈을 깜박이자, 일순 시야가 밝아지더니 시원하게 눈가를 덮어주었던 어희의 손이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오늘 간호가 괜찮았는지, 부족한 건 없었는지 생각 중이었습니다.”

과하긴 했어도 좋았다. 별생각을 다 한다며 몸을 옆으로 돌리려는 순간 어희의 말이 이어졌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왠지 어희의 말이 쓸쓸하게 들렸다. 도웅은 짧게 탄식을 흘리며 몸을 뒤척였다.

“흐음.”

“어디 불편합니까?”

어희가 걱정스레 물으며 이불 밖으로 튀어나온 도웅의 다리를 이불 안으로 넣어주었다.

“불편하다기보다는…, 편해요. 어희 씨도 아프면 나한테 말해요. 내가 간호해줄게.”

어희의 기척은 느껴졌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도웅은 하품을 쩍 뱉었다. 약기운 때문인지 잠이 솔솔 쏟아졌다. 수마가 붙은 눈꺼풀을 억지로 올리지 않고 마저 말을 이었다.

“꼭이에요.”

발음이 부정확한 말을 마지막으로 정신이 흐릿해졌다. 완전히 잠에 빠지려는 찰나 부드럽게 손을 감싸는 감촉에 도웅이 입꼬리를 올렸다.

내 마음으로 부족해서 악수까지 훔쳐 가나….

입안에 떠도는 말은 잠을 이기지 못하고 삼켜졌다.

* * *

다음날. 잠에서 깬 도웅은 침대에 그대로 누운 채로 눈동자만 굴렸다. 창밖이 하늘색인 걸로 봐서는 오전 여섯 시가 막 넘은 듯했다.

몸살기가 남은 탓인지 아니면 어제 종일 침대 신세를 져서인지 어깨며 등 근육이 뻐근했다. 이럴수록 움직여야 한다는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으로 몸을 일으킨 도웅은 의자에 앉은 상태로 잠들어있는 어희를 발견했다.

“…….”

안 자고 간다더니 아주 불편하게 자고 있었다.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이 지난 병간호의 고단함을 말해주고 있는 거 같아서, 도웅은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불편한 자세로 재울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그를 깨우기로 결심했다.

“어희 씨. 여기서 자지 말고 누워서 자요.”

자면서도 약간 경직되어있는 어깨를 잡고 살살 흔들자 어희의 미간 골이 더욱 깊어졌다. 꽉 감긴 두 눈은 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희 씨?”

조금 더 세게 흔들자 어희가 눈을 번쩍 떴다. 도웅의 팔을 세게 잡은 어희는 악몽을 꾼 사람처럼 놀란 눈을 끔벅이다가 숨을 몰아쉬었다.

“깜짝이야…. 가위라도 눌렸어요?”

“…악몽을 꾼 거 같긴 한데, 기억이 안 납니다.”

도웅은 제 손목을 잡은 어희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고는 그의 긴장이 풀릴 때까지 가만히 서서 말을 걸었다.

“깜박 잠들었어요? 피곤할 텐데 한숨 더 자고 갈래요? 침대 비었어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러면 밥 같이 먹을래요? 밥은 괜찮죠?”

“예.”

먹을 건 거절하지 않는 어희가 냉큼 대답했다. 

아침 메뉴로는 뭐가 좋으려나. 

도웅은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메뉴를 열심히 구상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희가 도웅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어희 씨 감기 옮은 건 아니죠?”

어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도웅은 믿지 못했다. 부산하게 돌아다니며 체온계를 찾아다녔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은지 아닌지는 요 녀석한테 물어보자고요.”

도웅은 막 서랍에서 꺼낸 체온계를 어희의 귀에 박았다.

삐빅.

“아. 정상 체온이네요. 역시 믿고 있었어요.”

태연하게 거짓말을 한 도웅은 체온계를 내려놨다. 그리고는 귀가 아픈지 한 손으로 문지르는 어희의 어깨를 다독인 후 욕실로 들어갔다. 간단하게 양치와 세안을 하고 한껏 개운해진 얼굴로 나온 도웅을 맞이한 건 귀 체온계를 들고 있는 어희였다.

“어어? 저 다 나았는데요.”

“어제 열이 오른 만큼 오늘도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복하려는 건 아니겠지만 어희가 들고 있으니 체온계가 어쩐지 무기처럼 보여 도웅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살살 하겠습니다.”

얼마 못 가 붙잡힌 도웅은 처음으로 어희처럼 큰 집에서 살 걸 그랬다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삐빅.

“다행히 정상 체온이네요. 두통은 없습니까? 목은 어때요.”

어희는 주치의라도 된 것처럼 세심하게 몸 상태를 물었고 도웅은 매우 괜찮아졌음을 어필했다.

어희가 씻을 동안 밥을 볶고 그 위에 먹음직스러운 회오리 계란을 올린 도웅은 접시를 식탁으로 옮겼다. 언제 씻고 나온 건지 어느새 어희가 앉아 있었다.

“먹어요. 아마 맛있을걸요.”

과한 자신감을 보인 도웅이 물잔을 들고 맞은 편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세수하느라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어희가 수저를 들었다. 오므라이스 중앙부터 뭉개 먹던 도웅은 뒤늦게 이 상황이 어색하면서도 재밌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했던가. 도웅도 마찬가지로 몰랐다. 눈앞의 커다란 남자를 좋아하게 될 줄은.

“안 드십니까?”

오므라이스 중심부터 뭉갠 도웅과 달리 가장자리부터 시작해서 점차 영역을 확장해가는 어희가 물었다.

“먹어요. 먹어.”

도웅은 느리게 수저를 움직였다가, 머릿속에 떠도는 의문을 고스란히 입 밖으로 뱉었다.

“그런데 어희 씨.”

어희의 진갈색 눈동자가 차분히 시선을 마주해왔다. 도웅은 저 눈이 언제나 자신에게 향해있다는 걸 이제는 잘 알았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몰라도 말없이 눈을 마주할 때면 이성이 허물어지고 어희만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럼 우리 이제 그…, 만나나요?”

도웅의 수줍은 물음에 어희는 어울리지 않게 입매를 딱딱하게 굳혔다. 잠깐 침묵이 낀 공백이 괜히 어색해, 도웅은 수저로 오므라이스 소스를 떠, 회오리 계란에 끼얹는 무의미한 작업을 열 번쯤 반복했다. 그리고 굳게 닫힌 어희의 입술이 벌어졌다.

“…글쎄요.”

애매한 대답에 도웅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희도 자신을 좋아하고 자신도 어희를 좋아한다. 그런데 ‘글쎄’라니. 싱글벙글 웃으며 서로를 얼싸안는 상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전혀 예상 못 한, 모호함이 극치에 달하는 대답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빠르게 깜박인 도웅은 좁아지려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꾹 눌렀다.

“왜요? 왜 ‘글쎄’에요?”

하루 이틀 사이에 내가 싫어졌나? 만약 그렇다면 그럴 수 있다. 

도웅은 애써 눈앞의 남자를 이해해보려 애썼다.

“이제 저 안 좋아요? 갈대 같은 사람….”

일부러 농담을 곁들였다. 그러나 어희는 웃음기 하나 없이 오므라이스를 먹었다. 도웅은 어희의 오므라이스 접시를 빼앗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고 계속 같은 질문을 던졌다.

어제 너무 진상이었냐, 아니면 며칠 전에 화를 심하게 내서 그러냐,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냐 물어도 어희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아뇨, 아닙니다, 전혀.”

세 가지 대답으로 모든 질문을 차단하는 것도 나름 재주라고 여긴 도웅은 더는 무의미한 질문을 이어가지 않았다.

제발 만나 달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사정하는 모양새도 우습다. 무엇보다 잘못한 점을 찾으려 할수록 어째서인지 도웅은 자존감이 깎이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좋긴 하다는 거죠?”

이거 하나만 확실히 대답해주면 된다. 도웅의 질문에 어희는 “예.”하고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그럼 되었다. 도웅은 멈췄던 식사를 이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