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만 잘그락거리는 텀블러 뚜껑을 닫은 도웅은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 카페인은 안 좋아요. 차라리 물이나 탄산수를 마셔요.”
어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도웅은 획 올라오는 어희의 길쭉한 손을 피해 텀블러를 다른 손으로 피신시켰다.
“어허, 왜 이러세요. 물 마시라니까.”
“설마 혼자서 다 마신 겁니까?”
“도와준 값이라고 쳐요. 아니, 무슨 커피를 이렇게 진하게 마신대요.”
엎치락뒤치락하다가, 텀블러를 뺏긴 도웅은 순순히 인정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경찰을 볼 일이 별로 없어서, 구경하느라 다 마셔버렸다.
“어희 씨 걱정에 목이 타는 걸 어떡해요. 고작 커피 갖고 이러기 있어요? 한달음에 달려온 나한테…?”
어쨌든 배달도 평소보다 3분이나 빨랐고 집안을 뒤져서 어희도 찾아냈다. 심지어 안심까지 시켜주지 않았는가. 도웅이 서운해하자 어희가 납득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죽는 줄 알았어요.”
심리적 압박이 강했던 모양이다.
“왜 같이 살자고 오셨어요?”
“아마 이혼한 모양입니다. 자세히는 몰라요. 안 물어봐서.”
“그렇구나.”
도웅은 아예 제 텀블러처럼 얼음까지 꺼내 먹었다. 와작와작 얼음을 씹으며 아까의 소란은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평화로운 집안을 돌아봤다.
“아. 평화롭다. 목도리는 언제까지 하고 있을 거예요? 이제 슬슬 덥지 않아요?”
멋쩍게 목도리를 풀어 곱게 접는 어희를 지켜봤다. 목도리 때문인지 아니면 어희 아버지 때문인지 몰라도 도웅은 제 아버지가 떠올랐다. 근래에 계속 연애사를 묻는.
“어희 씨. 언제까지 썸 타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어요?”
“…….”
직설적인 물음에 어희가 목도리를 챙기는 손이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린 걸 놓치지 않은 도웅은 이전에 리뷰를 졸랐을 때처럼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아니이, 궁금해서요. 언제쯤이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지.”
“으음.”
어희가 소리 없는 한숨을 삼켰다.
“글, 쎄요.”
또 모호한 대답이 나왔다. 느리게 눈을 깜박인 도웅은 지난번과 비슷한 물음을 던졌다.
“어희 씨, 저 좋아하긴 하죠?”
시험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정답은 이미 도웅도 알고 있었다.
“예.”
“예.”
도웅과 어희가 동시에 같은 대답을 했다. 어희는 황당한 시선을 보냈고 도웅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학, 맞췄다!”
옆에 있는 어희 어깨를 퍽, 퍽 칠만큼 크게 웃은 도웅은 하도 올라가 있어서 뻐근한 볼 근육을 손으로 문질렀다.
“알고 있어요. 크흠. 기간 정해지면 말해줘요. 리뷰만큼은 기다리게 하지 말고.”
리뷰만 3년을 기다렸다. 받을 기회를 제 발로 뻥 차버리긴 했으나 이제 도웅은 리뷰보다는 어희가 더 급했다. 기존에 집착하던 게 허물어지더니 새로 집착할 거리가 생긴 것이다.
“직원들 즐기라고 저도 조금 쉬었다 가도 되죠?”
어희 아버지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카페 마감 시간까지 있어 줄 요량으로 소파에 편하게 널브러졌다.
“점심때 스파게티 먹어요. 갑자기 토마토 스파게티가 엄청 땡겨요.”
“예. 그러죠. 직접 만들어 먹을까요, 아니면 시켜 먹을까요?”
스파게티를 떠올리자 군침이 돌았다. 눈을 감은 도웅은 말을 정정했다.
“아니다. 그냥 피자 시켜요. 은박 용기에 담긴 토마토 치즈 스파게티가 먹고 싶어요. 그, 왜 얇은 뚜껑 벗기면 치즈가 위에 덮어져 있는.”
“아아, 알 거 같습니다. 좋아요.”
파스타 집에서 먹는 스파게티도 좋지만, 가끔은 피잣집 스파게티가 당기는 날이 있었는데 그게 오늘이었다.
눈을 감고서 여유를 즐기던 도웅이 번쩍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잠깐만. 어희 씨가 문 열어준 거 아니에요? 아버지가 어떻게 집에 들어와요?”
어희가 도웅의 시선을 회피하며.
“…그러게요.”
하고 작게 대꾸했다. 도웅은 기가 찬 숨을 내쉬며 발로 어희 종아리를 툭, 툭 건드렸다.
“‘그러게요’는 무슨. 얼른 가서 도어락 비밀번호나 바꿔요. 내가 공육공육이 더 보안에 취약하다고 했죠? 요즘 시대에 생일로 설정해놓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도웅의 성화에 어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꿨다.
삑, 삑, 삑, 가만히 듣고 있던 도웅은 이전과 달리 제법 긴소리에 흡족해했다.
“이번에는 아버지도 모를 겁니다.”
덩치에 맞지 않게 자신만만해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래요?” 하면서 거들었더니 어희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도웅 씨 핸드폰 번호로 했습니다.”
“…….”
몸살 기운은 진즉 떨어졌는데 두통이 이는 듯하다. 무어라 토를 달려다, 뭐 어떤가 싶어서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도웅은 한참 동안 소파 위에서 뭉그적거렸다. 하도 오래 누워있어서인지 잠이 솔솔 쏟아졌다. 마침 어희가 손을 잡고 달랑달랑 가볍게 흔드는 게 느껴졌다.
“어, 왜요?”
도웅은 눈을 감은 채 물었다.
“어떤 피자 좋아하세요.”
“파인애플이랑 고구마 빼고 다 좋아해요. 어희 씨가 알아서 주문해줘요.”
다른 한 손으로 주문하는지 잡은 손을 놓지 않고 핸드폰 터치음이 들렸다.
“쉬림프 피자로 시켰습니다.”
“네에. 잘했어요.”
잡고 있는 손에 두 번 힘을 줬다.
이 편안함이 좋아서, 도웅은 웃음을 흘렸다. 어희의 집에만 오면 왜 이렇게 편한지 모르겠다.
누워서 손을 잡은 지 삼십여 분이 흐르자 공동 현관 호출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손에서 온기가 빠져나가는 듯하더니 어희가 문을 열어주고는 식탁에 간단하게 세팅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웅도 슬그머니 일어나 앉았다. 너무 퍼질러 있었던 것 같다. 목덜미를 문지르고 있을 때 현관 벨 소리가 들려, 도웅이 대신 나가 피자를 받았다.
“와! 피자다.”
식탁에 피자를 올린 도웅은 욕실에서 손을 씻고 나왔다. 소매를 걷어붙인 어희가 피자를 열고 스파게티와 다른 사이드 음식을 꺼내 놨다.
“마음 같아선 제가 해드리고 싶었는데….”
아쉽다는 양 말끝을 흐리는 어희에게 도웅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절대 그런 생각하지 말아요.”
어희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보였던 어희의 미소가 이제는 익숙해져서인지 자연스럽게 보였다.
“잘 먹을게요.”
왠지 오늘은 평소와 상황이 다른 느낌이다. 잘 먹겠다는 인사는 대부분 어희가 도웅에게 건넨 말이었다.
“오늘 정말 고마웠습니다.”
“나름 신선했어요. 요청사항에 도와달라고 메모를 남길 줄 누가 알았겠어요.”
스파게티를 섞어, 앞 접시에 덜어 먹은 도웅은 입꼬리를 올렸다. 가끔은 이렇게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것도 좋을 거 같았다.
“…도웅 씨. 저 피자 한 조각만 덜어주세요.”
음식 수발이 번거롭지만 않다면.
* * *
카페 마감 시간에 맞춰서 어희와 함께 집에서 나온 도웅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오전에 마셔버린 어희의 커피를 갚아주기 위해 카페로 향했다.
“어희 씨 덕분에 일도 재끼고 좋네요.”
“미안합니다….”
“진짜 좋아서 하는 말이에요. 그러잖아도 직원들이 자꾸 카페에서 저 내보내려고 하거든요.”
아주 괘씸해요.
웃으며 직원의 농간에 빠진 이야기를 풀어줬더니 가만히 듣고 있던 어희가 입꼬리를 올렸다. 살짝 올려도 길게 올라가는 게 신기해, 눈길이 자연스럽게 어희의 입술로 향했다.
“블라인드 레스토랑도, 낮에 놀자고 찾아온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군요.”
“사 놓은 상품권은 명절 때나 주게요. 풍선 몇 개 불고 폭죽만 터트려 줬으면 진즉 줬을 텐데.”
어희의 입술을 곁눈질로 살핀 도웅은 미련을 털어내듯 제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헤집었다.
“이제 벚꽃놀이 시즌이네요.”
“음. 그러네요.”
도웅의 말대로 불만 끄고 퇴근한 텅 빈 카페 문을 연 도웅은 옛날처럼 주방 불만 켰다. 바 테이블 의자에 앉은 어희에게 창가 자리를 권했다.
“옆자리 말고 마주 앉는 게 더 편해서요. 앉아 있어요. 커피 줄게요. 투샷이죠?”
“예.”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자스민 차, 딸기와 망고를 접시에 내온 도웅은 맞은편에 앉았다.
“도웅 씨. 내일이나 모레에 시간 되시면 같이 벚꽃 구경이나 갈까요.”
사람 많은 곳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어희가 먼저 제안해줄 줄 몰랐기에 도웅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야 좋긴 한데, 괜찮겠어요?”
“안 괜찮을 거 없습니다.”
담백한 대답에 할 말이 없어진 도웅은 딸기를 생크림에 찍어 먹었다.
“그러면 밤에 갈까요? 저는 낮보다는 밤에 보는 벚꽃이 더 멋있더라구요.”
“예. 좋습니다.”
딱히 거부가 없는 어희를 마주 보며 차를 마신 도웅은 입꼬리를 올렸다. 오전에 작은 전쟁 비슷한 걸 겪었으니 내내 평화로운 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
“광고 맡은 건 끝났어요? 요새 되게 여유로워 보이시네.”
“끝난 지 꽤 됐죠. 그 정도는 가뿐합니다.”
“그때 손 다친 건 괜찮구요?”
“반깁스 푼 지도 꽤 됐죠.”
불과 며칠 전, 어희의 집에 찾아갔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반깁스를 하고 있었으면서 ‘꽤 됐다’고 말하는 어희가 귀여워 그러냐고 대꾸했다.
크게 화를 냈던 게 이제는 옛일처럼 느껴질 만큼 평화로웠다.
“…사실 고백할 게 있습니다.”
관심 없는 척 턱을 괴고 힐끔, 쳐다봤으나 도웅의 귀는 이미 열심히 쫑긋거리는 중이었다.
어희는 우물쭈물하더니 눈을 깔았다. 긴장한 입매가 두어 번 열렸다, 닫혔다.
도웅은 이 익숙한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제일 처음 본 건 어희가 미니어처를 들고 고백했을 때 그랬고, 두 번째로 본 건 뉴욕행 비행기에서 감정이 보인다는 말을 털어놓았을 때였다.
이번에는 또 무슨 고백일까….
도웅은 어희라는 사람 자체에 제법 능통해졌다.
“저 징크스가 있습니다.”
“…….”
“하루라도 기분 좋은 당을 못 먹으면, 다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