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웅은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사실 징크스가 있다는 고백은 그렇게 놀랍지 않았다. 감정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데, 징크스가 있는 것 정도야. 하지만 어희의 성격으로 미루어볼 때 이건 나름대로 큰 결정이었을 테다.
놀란 척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던 도웅은 애써 입을 크게 벌렸다.
“세상에, 세상에! 징크스요?!”
“…….”
픽, 어색한 어희의 미소에 도웅은 속내를 들킨 사람처럼 뺨을 붉혔다.
“흠, 흠. 얼마나 다치는데요?”
새초롬하게 창밖으로 얼굴을 돌린 도웅은 맞은편 어두운 밤거리에 눈길을 두었다. 해도 안 뜬 새벽에 커다란 가방을 질질 끌고 가는 어희를 보고 뒷 세계 종사자인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닌데 굉장히 옛날 일처럼 느껴져,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며칠 전에 봤잖습니까.”
무덤덤한 어희의 말투에 시선을 돌렸다.
“며칠 전이요?”
눈을 내리깐 어희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 표정이 미묘하게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여, 도웅은 놀리고 싶은 마음을 참고서 기억을 되짚었다.
‘며칠 전’이라….
차를 한 모금 마신 도웅의 주의가 어희의 왼쪽 뺨에 머물렀다. 피부가 하얘서 그런지 불그스름한 자국이 눈에 띄었다. 동시에 그가 얻어맞는 걸 상상하자,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다.
때릴만한 곳이 어디 있다고 손찌검하는지, 원.
도웅이 혀를 끌끌 차는 소리에 어희는 먹으려고 집었던 망고 조각을 내려놨다.
“아. 생각이 다른 데로 튀었어요.”
도웅은 포크로 망고를 찍어 어희에게 내밀었다. 아기 새처럼 얌전히 받아먹는 걸 흐뭇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도웅의 뇌리로 며칠 전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거의 열흘간 주문이 없어서, 기다리다 못해 찾아간 어희는 이곳저곳 골고루 다쳐있었다. 고작 현관문 하나 열어주러 나오면서도 입술이 터지는 모지리.
“아? 아아?”
도웅의 눈이 커졌다.
단순 징크스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스케일이 크다. 비행기에서 지긋지긋하게 디저트를 찾던 게 징크스 때문이었나…?
충격을 받은 도웅이 유난스럽게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하얀 팔을 손끝으로 톡, 톡 두들겼다.
“그러면…, 여태 징크스 때문에 억지로 내 거 먹었던 거예요? 꾸역꾸역?”
어희의 눈 밑에 얇은 애교살이 예쁘게 올라왔다.
“억지로. 아닌 거 알면서 왜 떠봅니까.”
은연중에 어희가 예쁘다고 여긴 도웅은 놀라지 않고 차분하게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예쁜데 누가 안 좋아해.
어희에 대한 마음을 깨닫기 전이였다면 화들짝 놀라, 제 뺨을 찰지게 한 대 내려쳤을 일이다. 사랑은 참 좋은 거라며 도웅은 자신의 마음을 흡족해했다.
“도웅 씨 덕분에 극복했습니다.”
평소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편 어희의 자세는 정직하고 당당해 보였으나 타인 한정으로 기민한 눈치를 발휘하는 도웅의 눈에는 그다지 만족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제 덕분에요? 금시초문인데….”
어희의 입술이 호선 형태를 그렸다. 작은 미소에도 이렇게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가다니. 거참 신기한 입술이라는 생각을 하며 도웅은 생크림에 딸기를 푹 찍어 건넸다.
“징크스로 생각지 않고 부주의로 인한 사고로 치기로 했습니다.”
빨간 딸기가 빨간 입술 사이로 쏙 들어갔다. 어희의 대답에서 극복이 아닌 초연과 해탈, 그 어중간한 경지라는 걸 알아챘다.
“극복 맞아요?”
“예. 맞습니다.”
확신에 찬 어희를 보고 도웅은 기가 찬 숨을 내쉬었다. 해탈은 감정보다 심리에 가까운 모양이다. 감정을 보는 어희가 본인 상태도 모르는 걸 보면.
“그래요. 그래도 내 디저트 좋아하니까, 빼먹지 말고 꼭 먹어줘요. 약처럼, 꼬박꼬박.”
“예. 꼬박꼬박.”
순순히 돌아오는 대답에 도웅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집에서 자고 갈래요…?”
이전에는 침대 밑에 이부자리를 마련해주었지만, 지금은 침대 옆자리도 내어줄 수 있는 도웅이 물었다. 널찍하게 자는 걸 선호하는지라 침대도 퀸사이즈다. 남자 둘이서 붙어 자도 넉넉하게….
선호하는 침대 사이즈만큼 널찍한 어희 어깨를 본 도웅은 ‘넉넉’이 아닌 ‘알맞은’으로 생각을 정정했다. 좁게 자는 건 불호지만, 어희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집에 또 물샙니까? 대체 거긴 어떻게 된 집이길래 물이 줄줄…….”
도웅은 방금 자신의 어조가 마침표로 끝났는지 잠깐 헷갈렸다. 그러나 확실한 물음표였다는 걸 깨닫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싫으면 싫다고 해요. 왜 되도 않는 능청.”
빨대를 문 어희는 절반가량 남은 커피를 단번에 마셨다. 금세 컵 바닥이 드러났다. 쪼륵, 쪼륵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희는 잔을 내려놨다.
“너무 빤히 보이는 수작이라, 숨고 싶어서요.”
어희의 대답에 도웅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빤히 보이는 수작일수록 더 넘어와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자신은 여태껏 많은 수작질에 넘어가 줬는데.
대표적으로 붕어빵이 그랬다. 갓 만든 게 제일 맛있다는 그럴싸한 핑계로 오랫동안 손을 잡지 않았던가. 그런데 고작 집에서 자고 가지 않겠냐는 수작질에는 넘어와 주지 않는 어희가 귀엽게 얄미웠다.
“그래요, 그럼. 이만 일어날까요?”
테이블을 대강 정리한 도웅은 카페 문을 잠그고 어희와 함께 나왔다.
자고 가지는 않으면서 집에까지는 데려다주는 어희의 행동이 낯간지러워 도웅은 밤하늘을 올려다 봤다. 서로 말없이 걷다, 빌라 현관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잘가요, 썸썸.”
“…….”
어희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등하는 듯했다.
“뜻은 별로여도 썸이란 글자 자체가 귀여워 보여서요.”
변명하듯 퉁명스럽게 말을 툭 내뱉은 도웅을 물끄러미 바라본 어희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쉬세요.”
등을 돌려 걸어가는 어희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도웅은 목덜미를 문질렀다.
농밀한 신체 접촉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잠만 자고 가라는 건데, 거참 비싸게 군다. 한편으로는 어희답기도 했다.
집으로 들어온 도웅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양손을 가슴께에 올려놓고 발을 까닥였다.
“이 말랑함 때문에 사람들이 썸을 좋아하나….”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고 흘린 도웅은 콩닥콩닥 뛰는 기분 좋은 심장 박동을 만끽했다.
* * *
새벽. 잠을 깨우는 벨소리에 도웅이 몸을 뒤척이다, 찡그린 눈으로 발신자를 확인했다.
<아버지>
“하아.”
도웅은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한숨을 숨기지 않았다. 핸드폰을 엎었다가 결국 다시 뒤집어 손가락으로 통화버튼을 밀었다. 스피커를 누르고서 먼저 입을 뗐다.
“아빠아. 그만 좀 해요오.”
잠기운 끝에 투정이 덕지덕지 붙었다.
-투정 부리지 말어라. 네가 나이가 몇 갠데 어리광이니.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목소리에 도웅은 베개에 묻은 얼굴을 빼꼼히 들었다.
“……아빠는?”
-옆에 있지. 웅아. 지금까지 하고픈 거 다 했으면 하나쯤은 우리 부탁 좀 들어주렴.
자상한 목소리에 엿보이는 엄한 어머니의 말에 도웅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에이. 무슨 드라마 재벌도 아니고…. 무슨 말이 그래요. 결혼이 부탁한다고 될 일인가….”
으음! 절대 아니지.
도웅은 고개를 잘잘 털었다.
-그렇지? 엄마도 말하면서도 좀 웃겼다.
담백하게 인정한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렸다. 두어 번 눈을 깜박이고는 핸드폰에 좀 더 가까이 붙었다.
“엄마 걱정 있어요? 저 뉴욕 갈까요?”
-그럼 좋지. 명심하렴. 올 때는 꼭, 둘이서. 알겠니? 둘이서.
“엄마 아들 일하느라 바빠요.”
하품을 뱉고서 멍하니 천장에 시선을 둔 도웅은 눈가를 손으로 비볐다. 누워서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할 때까지도 핸드폰은 고요했다.
“엄마?”
등허리를 한껏 구부렸다가 편 도웅은 조용한 옆을 돌아보며 재차 “엄마?”하고 불렀다. 핸드폰을 터치하자 홈 화면이 나왔다.
“…….”
전화가 끊어진 줄도 모르고 엄마를 부르던 도웅은 황당해하며 다시 보이스 톡을 걸었다.
-지수하고 자리 마련할까?
대뜸 자리부터 들이미는 어머니에 도웅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불효스럽게 약 7초간 아버지의 번호를 차단했다가 풀었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어휴.”
같이 새벽을 열어주는 직원 영호가 쉬는 날인만큼 더 부지런하게 일한 도웅은 오픈 준비를 마치고 카페 옆 골목에 쭈그려 앉았다. 어느새 한 뼘이나 자란 풀에 물을 주고 턱을 괴었다. 손톱보다 작았던 새싹이 벌써 이렇게나 컸다. 귀여운 연녹색 풀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만져보려는 찰나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아침부터 열심이네요.”
“으아악….”
깜짝 놀란 도웅은 기운 없는 비명과 함께 반대편으로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렇게 놀랄 일입니까.”
황당해하는 어희가 도웅의 왼편에 쭈그리고 앉았다. 비련의 주인공처럼 옆으로 털퍼덕 주저앉아있던 도웅은 기가 찬 숨을 뱉었다.
“허. 아니, 아니…. 인기척도 없이 나타나면 누구나 다 놀라요.”
칭찬이 아니었는데 어희는 부끄러운 듯 뺨을 살짝 붉혔다.
“채소라도 기르시나 봐요.”
“그럴 리가 없…….”
어희의 시선을 따라간 도웅은 움켜쥐고 있는 제 왼손을 쳐다봤다. 눈을 깜박이는 속도만큼 천천히 주먹을 폈다.
“아…….”
얇고 길죽한 녹색 풀잎이 구겨져 있었다.
“푸, 푸, 풀잎이…!”
더듬더듬 도웅은 덜덜 떨리는 손바닥을 어희에게 내보였다. 어희는 사근사근한 어조로 도웅의 뒷말을 따라 했다.
“예. 풀잎이?”
“…….”
새싹부터 공들여 키운 생명을 제 손으로 거뒀다는 충격에 도웅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손바닥의 풀떼기와 물을 준 지 얼마 안 돼, 촉촉한 땅을 번갈아 쳐다봤다.
“뚝 끊겼네요.”
“예. 그러네요.”
뿌리만 남은 젖은 땅에 조심스럽게 풀잎을 내려놓은 도웅은 작게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