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90)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도웅과 짧은 풀떼기를 번갈아 쳐다본 어희는 하늘을 올려봤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간격으로 보이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어? 사장님! 좋은 아침이에요!”

골목길에 머리를 빼꼼히 내민 직원의 인사에 도웅은 멀리 날아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어. 좋은 아침.”

도웅은 시멘트 바닥을 짚고 있는 손을 털고 어희를 돌아봤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보는 어희의 흰 목선을 구경하다, 입을 뗐다.

“웬일이에요? 산책? 아이스크림?”

줄줄이 이어지는 추측에 어희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려 도웅과 시선을 마주했다.

“커피 사러 왔습니다.”

“배달 안 시키고?”

“예.”

“그렇구나….”

예전 같았으면 직접 카페까지 찾아온 어희를 보고 놀랐을 도웅이지만, 담백하게 받아들였다. 이제는 대낮에 길거리, 카페를 쏘다니는 어희를 봐도 놀랍지가 않다.

“벚꽃 구경, 오늘 밤 어때요?”

훔쳐 듣는 이가 없는데도 도웅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주변을 의식한 게 아니라 데이트 신청처럼 떨려서 절로 목소리 크기가 줄어든 것이었다.

“오늘 말고 내일 어떻습니까. 준비를 못 해서.”

벚꽃 구경하러 가는데 무슨 준비가 필요할까.

도웅은 미심쩍은 눈길을 거두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저녁 열 한시, 카페 앞에서 만나요. 들어가요. 커피 줄게요.”

바지를 툭, 툭 털고 일어선 도웅은 여전히 쭈그려 앉아 있는 어희를 내려다봤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똑 잘린 풀잎을 멀거니 보는 어희 머리통을 한 번 쓰다듬고서 카페로 들어갔다.

“사장님~ 오늘 영호 형 없어요?”

원두를 채워 넣고 있던 직원이 물었다.

“어~ 오늘 쉬는 날.”

어희 전용 텀블러를 꺼내 얼음을 담았다. 디저트는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오늘 구운 파이와 흑미 크림빵을 알아서 챙겨 들고나온 도웅은 여전히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어희 옆에 종이 가방을 내려놨다.

“여기요. 뭘 그렇게 봐요?”

“그냥…, 도웅 씨한테 방울토마토를 드릴까 생각 중이었습니다.”

“웬 방울토마토요? 저는 좋아요. 사주세요.”

방울토마토, 동글동글하니 귀엽고 맛있지.

도웅의 긍정적인 반응에 슬쩍 입꼬리를 올린 어희가 종이 가방을 들고 일어서자 눈높이가 금세 올라갔다.

“그럼 모레 봐요. 커피값은 이체해드릴게요.”

“우리 사이에 이체는 무슨, 그냥 가져가요.”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

마음 깊은 곳이 들썩거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어희 뒷모습을 지켜본 도웅은 복슬복슬한 제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희를 배웅하고서 카페로 돌아온 도웅은 일을 하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점심시간에 어희의 추가 주문을 기다리며 수첩에 방울토마토를 그리던 도웅은 직원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사장님, 손님 오셨어요.”

마땅히 누가 찾아온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기에 도웅은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누구?”

어희인가?

지난번 카페에 찾아온 걸 떠올린 도웅은 방울토마토 먹을 생각에 싱글벙글 미소 지었다.

“저야 모르죠…? 직원 일일이 찾다가 사장님 찾으시던데요?”

직원 설명에 도웅의 입매가 내려갔다. 어희가 아닌 듯했다. 혹시 컴플레인일까 싶어서 긴장한 도웅이 홀로 나갔다. 그리고 정말 의외의 인물과 마주하고 눈을 끔벅였다.

“…….”

“……자네.”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이는 60대 남성은 도웅도 아는 얼굴이었다. 무테 안경알이 뚫릴 정도로 날 선 시선을 마주한 도웅은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

“오….”

그게 다였다. 어희 아버지를 앞에 두고서 도웅은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첫 만남 때 경찰이 오가고 어희가 덜덜 떨었던 게 떠올라 살갑게 맞이하는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소금을 뿌려가며 내쫓자니 나이가 마음에 걸렸다.

가만히 서서 극단적인 상상을 하며 쳐다보기만 하는 도웅에게 어희 아버지는 고집스럽게 다문 입을 열었다.

“…사장님이었군. 잠깐 대화 가능해요?”

입매는 어머니를 닮은 건가? 태평하게 눈앞의 남성과 어희 닮은 점 찾기를 하던 도웅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고는 잠깐 망설였다.

대화를… 해야 하나?

“내 아들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요.”

어희에 대한 걸… 다른 사람 입으로 들어야 하나?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사이 남성의 뒤로 손님이 줄줄이 밀리는 걸 본 도웅은 카페를 나왔다. 오전에 어희와 나란히 쭈그리고 앉았던 옆 골목으로 들어가자 담배를 피우는 직원이 보였다. 손짓으로 들여보내자 어희 아버지도 마침 카페를 나왔다.

“할 말이 뭔데요?”

얼른 듣고 얼른 들어갈 생각으로 도웅이 먼저 물었다. 할 말이 있다며 다짜고짜 찾아온 사람치고 어희의 아버지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큰 한숨을 내쉬었다. 콧대에 멀쩡히 잘 올라가 있는 안경을 괜히 손가락으로 한 번씩 올렸는데, 그 행동이 초조한 사람처럼 보였다.

“내 아들과 당신…, 그러니까 사장님이 일반적인 친구 관계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겠어요. 그놈이 어릴 때부터 관심받는 걸 좋아해서….”

“…….”

“애정결핍처럼 눈에 띄는 행동만 일삼았어요. 내 아들은.”

‘내 아들’이라는 키워드를 강조하는 남성을 보며 도웅은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귀로는 듣고 있었으나 눈은 여전히 어희와 닮은 점 찾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사장님한테 이상한 게 보인다고 떠들지 않던가요. 어릴 적에는 그 문제 때문에 아주 골머리를 썩였어요. 하루도 조용히 넘어가는 일이 없을 정도로. 괜찮으면 담배 좀 피울게요.”

안주머니에서 팩을 꺼낸 남성은 얇고 기다란 담배를 물고서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필터를 물고 깊게 빨아들인 후 연기를 뱉는 걸 본 도웅은 반걸음 떨어졌다.

“아마 사장님을 만나는 것도 애정결핍의 일부라고 봐요, 나는. 특별하게 보이려고 그렇게 애쓰던 아이였으니까.”

도저히 닮은 구석을 찾지 못한 도웅은 마지막 말에 대놓고 미간을 좁혔다. 눈에 띄기 위해서 자신과 만남을 이어간다기에는 썸 다음 단계로 넘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건 물론이고 동네방네 소문도 내고 다니지 않는다. 아니. 어희에게는 소문을 낼 만한 친구가 없었다.

“뭐가 보이든 누구랑 만나든 이제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어요. 부모 허락하에 만나는 게 내 아들이나, 사장님이나 좀 더 마음이 편하겠죠.”

“저기, 말 끊어서 죄송한데 요점만 말해줄 수 있나요. 보다시피 일하다 나와서요.”

한가하게 방울토마토를 그리다 나온 도웅은 마무리 짓지 못한 토마토 꼭지를 마저 그리고 싶었다.

“크흠! 정식교제를 인정하고 허락하겠다는 말을 하려고 왔어요. 부모로서는 정말 힘든 결정이지.”

없는 셈 치고 사는 가족에게 교제를 허락받아야 한다는 건 이해 가지 않았지만, 도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렇군요. 그럼 이만 들어가 봐도 될까요?”

“내 아들을 찾아가지 않을 생각이에요. 반응을 보니까 그게 나을 거 같기도 하고…….”

미련이 있는 사람처럼 주저리주저리 말을 길게 늘인 남성은 정작 조심스러워야 할 본론은 무성의하게 툭, 던졌다.

“그러니 사장님이 좀 도와주쇼.”

“뭘요?”

타인 한정으로 기가 막히게 눈치가 빠른 도웅은 알면서도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물었다.

“둘 사이, 인정하고 다시는 어희를 찾지 않을 테니까…, 금전적으로 도와달라는 이야기예요.”

자존심이 상한 듯 눈살을 찌푸린 남성의 말을 도웅은 곱씹었다. 금전적인 건 예상했으나 무언가를 놓친 기분이다.

초조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리는 남성이 골목에 들어서고 나서 한 말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되짚어 본 도웅은 이어서 어희가 제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를 상기했다.

거리낄 거 없이 경찰 손에 아버지를 넘긴 어희는 멀쩡하게 디저트를 먹고 피자도 함께 시켜 먹었다. 악감정은 있어도 절대 호의는 없을 눈앞의 남성이 자신을 찾아왔다. 금전적인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단순히 돈이 급해서 자신을 찾아왔다고 하기에는 과정이 너무 빨랐다. 심지어 자신이 사장인 줄도 몰랐다는 게 껄끄럽기 그지없다.

“아….”

이내 한가지 가정이 뇌리로 스친 도웅은 팔짱을 낀 팔을 스르륵 풀었다. 느리게 입을 벌린 도웅의 눈초리가 살짝 올라갔다. 삐죽 튀어나온 헛숨에는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푸핫, 접근 금지?”

예의 없이 검지로 삿대질한 도웅은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꼴 좋다, 라는 속된 감정보다는 어희의 단호한 결정이 미칠 정도로 좋았다. 눈앞에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어 줄 정도로.

“뭐, 뭐? 그럴 리가 없잖아요.”

도웅은 웃는 낯으로 어희 아버지의 어깨를 툭, 툭 두들겨 준 뒤 카페로 홀랑 들어갔다. 뒤늦게 너무 버릇이 없었다고 자각을 하긴 했으나 그다지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싱글벙글 웃음을 매달고 주방에서 핸드폰을 찾아 든 도웅은 잔뜩 흥분해서 어희에게 전화를 걸려다, 가까스로 참아냈다.

“저, 사장님. 방금 그 손님 또 오셨어요.”

다시 오든 말든 상관없다. 도웅은 알아서 하라며 손을 휘젓고서 전화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

[뭐해요]

핸드폰을 손에 쥐고 답장을 기다리던 도웅은 이십여 분이 지나고 나서 답장을 받아 볼 수 있었다. 메시지가 아닌 요거요 주문으로.

[매장 요청 : 일합니다]

실소를 터트린 도웅은 메뉴를 준비해서 어희에게 배달을 갔다.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쏙 빼놓고서 어희와 즐겁게 수다를 떨고 돌아온 도웅은 억척스럽게도 테이블에 앉아 있는 어희 아버지를 발견했다.

도웅은 그를 무시하고 직원과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눈 뒤 주방으로 들어가, 완성하지 못한 방울토마토 꼭지를 그렸다.

여섯 시간이 넘도록 한자리에 앉아 있는 어희 아버지가 가끔 눈이 마주쳤지만, 도웅은 철저하게 무시했다. 직원이 곤란한 기색으로 물어오면 신경 쓰지 말고 마감 때 내쫓으라며 도웅은 제 일에만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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