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90)

* * *

라탄 피크닉 바구니에 차곡차곡 도시락을 쌓은 도웅은 우린 찻물을 보온병에 담았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진즉 쉬고 있을 오후 열 시 반. 도웅은 소풍을 준비했다.

어희를 의식해, 검은색 폴라티에 검은색 바지를 입었다. 베이지색에 가까운 연분홍 로브 코트 걸친 도웅은 보트 슈즈에 발을 집어넣었다.

탁, 탁. 발을 구른 후 전신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복슬복슬한 머리를 매만진 도웅은 왁스라도 바를까, 잠깐 망설였다가 안쪽 머리칼 숱이 많이 자란 걸 보고서 포기했다. 먼저 나가서 기다릴 생각으로 집을 나서자 핸드폰이 길게 진동했다.

<아버지>

“또…?”

매일 하루에 한 번, 가끔은 하루에 두 번씩 전화를 걸어 배우자를 맡겨 놓은 것처럼 재촉하는 아버지였다. 도웅은 슬슬 전화를 회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보세요.”

물론 긴 진동을 세 번 이상 지켜보다가 결국 받게 되지만.

-사랑하는 아들…. 아빠가 소원이 하나 있다.

“저도 소원이 있어요. 사랑하는 아빠가 전화로 맞선 권유 좀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서 집을 나오자 도어락 소리가 들렸는지, 아버지가 어디 가는지 행선지를 물었다.

“소풍 가요.”

-거긴 밤일 텐데? 혹시 데이트? 데이트?

데이트가 맞긴 하다. 저보다 더 설레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도웅은 침묵을 택했다.

-만나는 사람 있는 거냐? 진작 말하지.

“아니, 만나긴 하는데 아직은 썸이에요. 썸. 썸이 뭔지는 아시죠?”

핸드폰 너머로 아버지가 웃는 게 느껴졌다. 하루도 빠짐없이 전화를 걸어서 맞선 권유와 재촉을 하긴 했으나 막상 아버지의 웃음소리를 듣는 건 오랜만인 거 같아서 도웅은 기분이 약간 씁쓸해졌다.

-알다마다.

“네에. 그러면 저 이만 끊을게요?”

진지한 만남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호감을 갖고 만나는 상대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당분간 재촉 전화도 없을 거라는 예상에 도웅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들. 네 엄마도 그렇고 이 아빠도 그렇고 네가 좋다는 사람은 좋은 사람일 거라 믿으니 가정환경이 어떻든 배경이 어떻든 신경 쓰지 말고 꼭 인사하게 해주렴,

타박타박,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던 도웅이 발을 멈췄다. 머리 위 센서 등이 꺼졌다가, 도웅이 다시 계단을 내려가자 켜졌다.

“네. 알겠어요.”

-그래. 데이트 잘해라, 아들.

전화가 뚝 끊겼다.

이상하게 아버지의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 같이 놀았던, 아버지의 원픽 지수를 포기해야 해서, 그런가보다 가벼이 넘긴 도웅은 빌라를 빠져나와 카페로 향했다.

이십오 분 일찍 도착한 도웅은 골목을 스쳐 지나갔다가 도로 두 걸음을 뒤로 물렀다.

“어…?”

도웅은 눈을 끔벅였다.

풀잎이 뜯겼을 때 뿌리도 흔들린 건지, 하루가 지나자 시들어버린 풀이 있던 자리에 직사각형의 커다란 화분과 어희가 있었다.

화분에는 이미 기다란 식물이 심어져 있었는데, 얇은 가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빨간 열매는 누가 봐도 방울토마토였다.

“아. 일찍 나오셨네요.”

어희가 먼저 아는 체를 해왔다.

“어어? 방울토마토 준다는 게 화분이었어요?”

무엇을 상상하든 어희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할 거 같다. 파릇파릇한 식물을 보고서 함박웃음을 지은 도웅이 어희의 옆에 섰다.

“예. 토마토는 건강에도 좋으니까요.”

“이거 근데 밖에 두면 서리 당할 거 같은데, 카페 안에 들여놔도 되죠?”

피크닉 바구니에 디저트를 챙기긴 했지만, 어희가 부족하다고 칭얼거리면 카페에 들리기 위해서 열쇠를 챙겨왔다.

고개를 끄덕인 어희가 화분을 양손으로 번쩍 들었다. 카페 문을 열어주고서 문 옆을 가리키자 어희가 화분을 내려놨다. 살짝 비대칭으로 놓인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대칭을 맞춘 도웅은 내심 놀랐다.

도자기로 만든 화분은 흙 무게까지 더해져서 몹시 묵직했다. 매일 반죽을 문대는 도웅의 근력은 약한 편도 아니었음에도 무겁다고 느낄 정도였다. 대체 이걸 어희 혼자 여기까지 어떻게 옮겼는지 의문이 들었다.

“테이블 청소가 덜 됐네요.”

“네? 어디요?”

어희의 시선을 따라간 도웅은 “아.” 하고 짧은 탄식을 흘렸다.

마감 시간까지 어희의 아버지가 고집스럽게 앉아 있던 자리였다. 꾸준히 무시는 하고 있지만, 오늘도 찾아온 걸 보면 아마 당분간 계속 찾아와 무언의 압박을 가할 거 같았다.

도웅은 멋쩍게 웃었다.

“영호가 깜박했나 봐요. 내일 하면 되니까 나가요.”

얼버무린 도웅은 어희를 데리고 카페를 나왔다. 화분을 옮기느라 골목에 두고 온 피크닉 가방을 챙기러 되돌아온 도웅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라탄 피크닉 가방이 두 개가 되어있었다.

“…저거 어희 씨가 가져왔어요?”

“예.”

아까는 방울토마토에 시선을 뺏겨서 어희 몸에 가려진 피크닉 가방을 보지 못한 모양이다. 도웅은 제 바구니보다 더 큰 어희 바구니를 보고 진 거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럼 준비 못 했다는 게, 저거에요?”

“예. 소풍하면 도시락이잖습니까.”

“그… 렇죠.”

어희는 음식 솜씨가 없으니 내용물은 자신이 압승일 거라며 애써 스스로를 다독인 도웅은 제 바구니를 들었다.

“호수 공원으로 갈래요? 벚꽃 예쁘게 폈던데.”

“좋습니다.”

두 사람은 걸어서 이십 분 거리에 있는 호수 공원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도웅은 슬그머니 제 옆에 서 있는 어희를 훔쳐보았다. 평소와 다르지 않게 검은 폴라티 위에 갈색 얇은 코트를 입은 그와 나란히 걷고 있으니, 옷까지 맞춰 입은 커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웅은 씩 미소를 지었다.

별다른 말 없이 걸어서 호수 공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늦은 시간임에도 돗자리를 펴고 맥주를 마시고 있는 커플들을 보고 놀랐다.

“낮에 왔으면 붐볐겠어요.”

“그러게요. 도웅 씨 말 듣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벚꽃 나무 아래에 피크닉 매트를 깔고 앉은 도웅은 야심 차게 챙겨온 도시락들을 꺼냈다. 밤에 먹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과일과 샐러드, 그리고 닭가슴살 스테이크.

도웅이 음식을 세팅하는 동안 어희는 어째선지 자신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차가 담긴 보온병과 포도 주스를 꺼낸 도웅이 씩 웃었다.

“어디 어희 씨도 꺼내 봐요.”

어희의 요리 실력을 아는 도웅은 이번만큼은 절대 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어희는 뒤에 두었던 본인의 커다란 피크닉 바구니를 열어 음식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치즈 샐러드, 로제 파스타, 사라다 샌드위치, 유부초밥과 속이 꽉 찬 김밥이 줄줄이 나왔다. 도웅은 퀄리티가 좋은 음식 향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비장의 무기입니다.”

보온을 신경 쓴 듯 두꺼운 호일 포장지에서 꺼낸 큼직한 도시락통을 도웅 앞에 둔 어희가 드물게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었다. 뚜껑을 열어보라는 듯.

“…이게 뭐길래 그래요?”

애써 미소를 지은 도웅은 떨리는 심정으로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아니……, 이건 반칙이잖아.”

거기엔 치즈가 듬뿍 얹어진 랍스터가 있었다.

어희가 비장의 무기라고 할만했다. 벚꽃 구경을 가는데, 세상에 어느 누가 랍스터까지 가져오겠는가. 일부러 밤에 먹어도 부담이 없는 음식들로 챙겨왔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킹크랩을 가져올 걸 그랬다.

어희는 마지막으로 오렌지 주스가 담긴 유리병을 내려놨다. 샛노란 주스 색을 보자 도웅은 웃음이 터졌다. 지나치게 많고 비싼 메뉴보다 오렌지 주스가 이상하게 마음에 쏙 들었다.

“진짜, 이건 다 사 오는 것도 재주네요.”

“아. 만든 겁니다.”

“거짓말하지 마요. 어희 씨가 이걸 어떻게 만들어.”

일회용 식기 세트를 받은 도웅은 유부초밥을 먹었다. 심지어 맛있기까지 하다.

“가사 도우미분이 만들어 줬습니다.”

이 한 끼를 위해 재료 값만큼 팁도 어마어마하게 들였을 거라고 예상한 도웅은 허허,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포도, 오렌지?”

길쭉한 플라스틱 컵을 꺼내며 어희가 물었다.

“오렌지요.”

오렌지 주스의 특유의 새콤한 맛 때문에 일부러 어희 입맛에 맞춰서 달콤한 포도 주스로 가져온 도웅은 오렌지 주스를 택했다. 어희는 당연하게 도웅이 가져온 포도 주스를 마셨다.

팝콘처럼 가지마다 피어 있는 벚꽃을 구경하며 도웅은 앞으로 이런 호화로운 꽃 구경은 다시 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참. 어희 씨. 당분간 카페에 오지 마요.”

옛날처럼 집에서 요거요를 통해서 주문하는 어희가 아니었다. 직접 카페에 와서 테이크 아웃을 하기도, 마감 시간에 맞춰서 함께 퇴근하는 때도 더러 있었기에 혹여나 본인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충격받을 게 뻔해서 도웅은 사전에 그의 접근을 차단하려 했다.

“아. 너무 자주 찾아가서 부담됐습니까?”

차단하려는 마음이 단번에 약해졌다.

곰곰이 따져보면 어희가 아닌 그의 아버지를 차단해야 옳다. 왜 그 사람 때문에 어희와 즐거운 시간을 방해받아야 한단 말인가.

“에이, 설마요. 이틀? 동안 카페 공사 때문에 정신없을 거라서요. 그래도 요거요는 주문받으니까 배달시켜요.”

“카페에 무슨 문제라도…?”

어희와 마주치면 큰 문제가 될만한 사람이 있다. 도웅은 고개를 저으며 익숙한 핑계를 갖다 붙였다.

“누수요. 홀에 물이 줄줄 새요.”

“…….”

미심쩍은 표정을 지은 어희를 외면하며 벚꽃을 올려봤다. 산들바람이 불 때마다 흰색에 가까운 연분홍색 벚꽃잎이 산들산들 떨어졌다.

“예. 알겠습니다.”

어희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는 눈빛이었으나 적당히 수긍했다.

“도웅 씨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은 거의 없는 거 같습니다.”

애초에 손해나 이익을 볼만한 제안은 하지 않았다. 도웅은 쭉 뻗은 제 다리에 붙은 꽃잎을 털어냈다.

“어희 씨. 요새 부모님한테 연락 와요, 저.”

“…그렇습니까.”

어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평화로운 나들이를 깨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었으나 오늘따라 아버지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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