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한 대답에 어희는 할 말을 잠시 잊은 듯 입을 살짝 벌린 상태로 도웅을 바라봤다. 이내 어희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아뇨. 집에서도 안 됩니다.”
“왜, 왜, 왜요?”
바보같이 말을 더듬어버렸다. 도웅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시무룩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피크닉 가방에서 초코 크로아상을 꺼내 어희에게 건네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넙죽넙죽 받아 챙겼을 어희가 망설이는 걸 보고 도웅은 그의 무릎에 올려놨다.
“뇌물 아니니까 먹어요. 내가 뭐 키스 못 해서 환장한 사람으로 보여요?”
그제야 바스락거리며 크로아상 포장지를 벗기는 어희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도웅은 보트 슈즈를 꼼지락거렸다.
어희에게 이렇게 스킨십을 못해서 안달 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으나, 키스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충동이 자꾸만 들었다.
이게 사랑인 걸까, 하는 감성에 젖기도 전에 도웅은 구질구질함을 온몸으로 뽐내고 있는 듯해서 자괴감도 든 참이다.
“저 키스 안 해봤어요.”
빵을 우물거리는 어희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냥, 밝힌다고 오해할까 봐….”
밝히면 뭐 어떤가. 밝힐 수도 있지.
초콜릿 코팅이 된 크로아상을 열심히 먹는 어희를 봐도 도웅은 이제 자신의 디저트가 뿌듯하지 않았다.
크로아상이 나보다 낫네.
“오해 안 합니다. 그리고 스킨십 같은 건…, 신중하게 했으면 해서 그런 겁니다.”
육체적인 쾌락이 아니라 키스일 뿐인데 거참 비싸게 군다고 생각한 도웅은 의외로 거침이 없는 제 상태를 자각하고 놀란 눈을 떴다.
“아, 예. 제가 너무 성급했죠.”
마음에 없는 소리로 공감을 시도한 도웅은 바구니에서 바나나를 꺼내 먹었다. 같은 포즈로 나란히 앉아, 떨어지는 벚꽃을 보며 디저트 타임을 즐기다 한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스킨십이라는 거, 실패하니까 되게 민망하네요. 저 꼭 아저씨 같았어요.”
“이제라도 알았으면 다행입니다.”
드물게 말에 농담을 섞는 어희의 팔을 팔꿈치로 슬쩍 밀었다.
“이제 그만 갈까요?”
“예. 오늘 소풍 즐거웠습니다.”
차곡차곡 도시락을 바구니에 도로 담고 자리를 정리했다. 갑자기 난데없는 스킨십 시도에서 그치지 않고 힘자랑까지 했더니 여러모로 기운이 빠지는 소풍이었다.
* * *
비록 스킨십 실패를 겪었으나 도웅은 여전히 어희가 좋았다. 어희도 주문이 끊기는 일이 없었고 똑같이 사근사근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부모님에게 걸려 오는 ‘인생의 짝꿍 찾기’ 독촉 전화도 변함없이 꾸준했고 어희의 아버지는 매일 카페로 출석 도장을 찍으며 오픈부터 마감까지 버티고 앉아 있었다. 일상은 변함이 없었다. 변한 건 어희에 대한 사랑이 더 커진 도웅의 마음뿐이었다.
“허어. 저기요, 이제 슬슬 그만하시죠.”
일주일을 넘게 카페에서 버티고 있는 어희의 아버지를 참다못한 도웅이 먼저 말을 걸었다. 성격 같아서는 언제까지 있든 두 시간마다 추가 주문만 하면 영원히 방치하고 싶었으나, 서초동에 있는, 문전성시를 이루는 디저트 맛집 입장에서는 달랑 아메리카노 한 잔만 시켜 놓고 4인 테이블을 주야장천 차지하고 있는 손님은 민폐 그 자체였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한 남자 도웅의 입장에서는 이 아버지라는 작자 덕분에 어희와 함께 퇴근해본 지가 꽤 오래되었다는 게 언짢았다.
“카페에서 손님을 내쫓아?”
어이구.
손님이라는 직함으로 앉아 있다는 것에서 오는 당당함인지 아주 뻔뻔하기 그지없다. 도웅은 기가 찬 숨을 내뱉었다.
“손님, 두 시간마다 재 주문을 해주셔야 해요. 아니면 나가셔야 하고요.”
도웅의 말에 어희 아버지는 매 두 시간마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질려서 다른 음료를 마실 법하건만, 꾸준히 아메리카노만 찾았다.
오늘도 어희와 퇴근은 물 건너갔군.
슬슬 마감 때가 되어, 도웅은 주방을 정리했다. 어희에게 주기 위해 점심때부터 만들어 놓은 몽블랑 두 상자를 확인하고서 홀로 나온 도웅은 하품했다. 마감 시간이라 손님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와중에도 한결같이 고집을 부리며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어희의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마감이에요, 마감. 가세요.”
도웅의 말에 호응하듯 카페 출입문에 달린 종소리가 끊임없이 딸랑, 딸랑 울렸다.
“빈 잔 치워드릴게요~ 그리고 이제 손님은 사장인 제가 안 받을 거니까 또 찾아오시면 영업방해로 신고할 거예요.”
테이블에 올려진 빈 잔을 무성의하게 챙겨서 몸을 돌린 도웅은 다른 사람의 가슴께에 얼굴을 부딪쳤다.
“아고. 죄송합니다, 손… 어?”
고개를 올린 도웅의 눈이 당황으로 얼룩졌다. 당분간 보기 힘들 거라 여겼던 어희가 눈앞에, 코앞에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도웅을 번갈아 쳐다본 어희의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하게 질렸다.
마주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던지라, 놀이기구 바이킹을 탈 때 몸이 붕 뜨는 거처럼 심장이 쪼그라드는 걸 카페에서 경험한 도웅은 그만 놀라서 손에 들고 있는 잔을 놓쳐버렸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깨져버린 유리잔을 밟고 파편이 튈세라 도웅은 어희 팔을 잡고 어깨로 밀었다. 중학생 때 싸우는 친구를 말릴 때나 썼던 행동을 다 큰 성인이 된 지금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어희 씨, 잠깐 안에 들어가 있어요.”
그러나 어희는 목석처럼 한 걸음도 뒤로 밀려나지 않았다. 작업실 구석에서 벌벌 떨던 어희가 떠올라 불안으로 가슴을 졸였다.
“당신이, 왜…….”
딱딱하게 굳은 어희의 목소리가 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최후 방어선처럼 어희의 허리에 팔을 끼운 도웅이 외쳤다.
“아저씨, 가세요. 다시는 찾아오지 말고요. 영호야!”
도웅의 부름에 놀란 토끼 눈을 한 영호와 다른 직원 한 명이 빗자루와 신문지를 들고 다가왔다. 도웅은 정신없는 와중에 바닥에 잘근잘근 밟히고 터지는 유리만큼 어희가 신경이 쓰여 미칠 노릇이었다.
겉으로 보면 찔러도 상처 하나 나지 않을 것 같아도 어희의 속 알맹이는 사실 말랑말랑하기 그지없었다. 덩어리 별로 깨지는 유리잔이 아닌 산산조각이 나는 찻잔에 더 가까웠다.
“바닥에 유리 있으니까 거기서 잠깐만 기다려. 영호야, 아저씨나 영호 씨 좀 데리고 나가봐.”
덩치가 듬직한 영호가 나서려 할 찰나 도웅의 어깨를 잡은 어희가 옆으로 세 걸음 멀리 떨어트려 놨다. 넘어지거나 어딘가에 부딪히지 않게 힘을 잔뜩 준 손길이었다. 그리고 어희는 고집스럽게 앉아 있는 아버지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어어, 어희 씨!”
순식간에 도웅을 안전하게 옆으로 옮긴 손길과 확연하게 달랐다. 쓰레기도 저렇게 다루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아버지 팔을 끌고 가는 어희의 손길은 거칠고 모질었다.
카페 밖으로 끌고 나가 아버지를 밀친 어희를 보고서 도웅은 앞치마를 벗었다.
“나 갈게. 마감 잘 부탁해.”
도웅은 오더 테이블에 충전 중이었던 핸드폰을 챙겨서 카페 밖으로 나왔다. 키도 크고 걸음이 느리지도 않은 어희는 카페에서 불과 다섯 걸음밖에 멀어지지 못했다. 도웅이 빠른 걸음으로 뒤를 쫓았다.
“어희 씨, 어희 씨. 얘기 좀 해요.”
검은색 반소매 셔츠를 입은 어희의 팔을 잡았다. 미세한 떨림이 그대로 전달되어 도웅은 한숨을 삼켰다.
“어어, 피나요! 카페에 구급상자 있으니까, 잠깐 카페 들러요. 네?”
오른쪽 입꼬리 아래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유리가 튄 듯했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보자 아무래도 직원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카페로 다시 데려가는 건 좋지 못한 거 같았다.
“어희 씨. 집으로 가요.”
떨림이 멈추지 않는 어희의 팔목을 잡고서 집으로 향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서 카페를 지날 때 얌전히 따라오던 어희가 문득 입을 열었다.
“내 집이 아니라 도웅 씨 집이요?”
평소처럼 무덤덤한 어조가 아닌 무언가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는 듯 억눌린 억양이었다. 도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웅보다 큰 어희는 순순히 따라 걸었다. 도웅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냥 처음부터 내쫓을 걸 뭐 한다고 계속 내버려 둬서 이 사단을 만드는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삑, 삑, 삑.
빠르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연 도웅은 소파에 어희를 앉혀 두고 구급상자를 꺼냈다. 멸균 거즈에 소독약을 부어 소독을 먼저 했다.
상처 크기도 작고 얇게 베여서 흉이 질 거 같지는 않았다. 호, 호 불어서 소독약을 말린 후 연고를 발랐다.
“저기, 어희 씨.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구급상자를 정리하고서 도웅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도웅 씨. 괜찮으면 제가 먼저 말해도 되겠습니까.”
이미 말을 잘라놓고 양해를 구하는 어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웅은 어희의 손을 잡았다. 그동안 잡았던 악수처럼 헐겁게 잡았다가는 어희가 자신에게 화를 내고 가버릴까 봐 손가락 사이사이 깍지를 꼈다. 어희는 도웅의 손을 뿌리치거나 털어내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습니까?”
“네?”
“언제부터 저 인간이 당신, 아니. 도웅 씨 카페에 드나들었냐는 말이었습니다.”
한껏 격앙된 목소리를 꾹꾹 누른 어희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한…, 9일? 정도 됐을 거예요.”
“9일, 9일이요.”
날짜를 되뇐 어희는 곧.
“하.”
기가 찬 탄식을 내뱉고서 옆에 앉은 도웅을 쳐다봤다.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어희를 본 적이 없는 도웅은 더욱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면 일부러 그 인간이랑 안 부딪치게 하려고 카페에 오지 말라고 했던 거군요.”
“네에. 미안해요, 어희 씨. 숨기려고 한 건…, 맞는데 오늘부터 찾아오지 말라고 말한 참이었어요.”
누수 공사한다고 오지 말라고 했던 주제에 차마 숨기려고 한 건 아니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은 도웅은 솔직하게 대꾸했다.
“하아. 그 인간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린 어희의 수그린 옆통수를 보며 도웅은 하나도 빼먹지 않고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