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어느 정도 머릿속으로 검열이 된 말들이었다. 교제를 빌미로 돈을 요구하더라, 는 최소한의 생활 유지를 위한 안정 생활자금으로 바뀌었고 고집을 부리며 자리에 앉아 있던 건은 갈 곳이 없어서로 말을 바꾸었다.
어희의 아버지하고는 처음 카페로 찾아왔을 당시 빼고는 마땅히 나눈 대화도 없어서 도웅의 이야기는 금방 끝이 났다.
어희는 소파를 한숨으로 무너뜨릴 작정인지 무거운 한숨만 푹, 푹 내쉬었다. 도웅은 그런 어희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어희 씨. 화 많이 났어요?”
바깥 냄새와 섞여 희미했던 꽃 향이 머리를 기대자 선명하게 맡아졌다. 도웅은 다른 손으로 어희의 허리를 감쌌다. 다정한 도웅의 손길을 떼어낸 어희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잠깐 욕실 좀 쓰겠습니다.”
도웅은 저와 깍지를 낀 손까지 풀고서 욕실로 들어가는 어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욕실 문이 닫히고서야 후! 하고 짧은 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내쫓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다시금 밀려들었다. 새어 나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도웅은 쿠션을 무릎에 올려놓고 턱을 괴었다.
“어쩐담.”
숨긴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었는데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도웅은 자책하며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달짝지근한 거라도 입에 넣어주면 어희의 화가 조금은 가라앉을까, 싶어 소파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마침 그저께 사놓은 하우스 체리 한 팩이 눈에 띄어, 꺼내 물에 헹궜다. 접시를 꺼낼 즈음 욕실에서 나온 어희가 촉촉하게 물기가 어린 얼굴로 나왔다.
“세수했어요? 로션 줄까요?”
“괜찮습니다.”
곧장 소파로 돌아가 앉을 줄 알았던 어희는 부엌에 있는 도웅을 보고는 식탁 의자를 빼고 앉았다. 몸을 도웅 방향으로 돌려, 등받이에 팔을 올린 어희가 말을 걸었다.
“도웅 씨.”
여전히 억눌린 어조에 도웅은 체리 접시를 식탁에 올려놓으며 바짝 긴장한 투로 말했다.
“제 잘못이죠? 미안해요. 제가 너무 무신경했나 봐요.”
도웅의 사과에 어희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웅 씨 잘못 없으니까 사과하지 마세요.”
“네? 그렇지만 어희 씨 화났잖아요.”
아예 잘못이 없다고 말하기에는 상황이 모호했다. 부자 관계가 좋지 않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의 아버지를 카페 안으로 들이지 않았는가. 심지어 어희에게 거짓말까지 하며.
풀이 죽은 도웅의 양손을 꽉 그러쥔 어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기 싫은 듯 고개를 숙여 도웅의 손등에 이마를 갖다 대었다. 마음 같아서는 어희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으나, 어찌나 손을 꽉 잡고 있는지 꼼지락거리는 일도 여의치 않았다.
“제 아버지는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압니다. 그저 이 상황이 너무…, 창피하고 도웅 씨에게 미안해서 마음이 불편합니다.”
“아.”
도웅은 어희의 떨림을 느꼈다.
“도웅 씨에게는 정말 미안합니다.”
그의 수치심, 그리고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마음도 느껴졌다.
어희처럼 감정을 보지 못하더라도 공감 능력은 충분했기에 도웅은 가슴이 미어졌다.
단순하게 사는 걸 선호하는 만큼 타의에 의해 번거로운 일에 끼어들지 않는 도웅으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잠깐 시선을 올려 주방 조명을 쏘아 본 뒤 차분하게 고개를 내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미안하다고 하지 말고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어희의 커다란 몸이 움찔, 떨렸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이 부담이 되었나 싶어 도웅은 숙인 상체를 도로 세웠다.
“저는 이상하게 어렸을 때부터 남이 하는 사과는 마음에 잘 와닿지 않더라고요.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말 대신 사랑한다고 해주면 그걸로 충분해요.”
사실과 사심이 적절하게 섞인 도웅의 말에 어희가 호흡을 멈췄다.
“어희 씨?”
일정하게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하는 어희의 등허리가 일시 정지된 듯 멈춘 걸 본 도웅이 넌지시 이름을 불렀다.
도웅의 손등에 이마를 기대었던 어희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아주 새빨개진 얼굴을 한 어희가 시선을 마주해왔다. 진갈색 눈동자는 불빛을 받아 금색으로 예쁘게 빛났다.
“어희 씨, 눈 되게 예쁜 거 알……!”
잡힌 손에 이끌려 아래로 훅 끌려간 도웅은 엉거주춤하게 상체를 숙였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었더니 저까지 빨개질 거 같아서, 도웅은 괜히 눈을 끔벅이다가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기….”
방황하던 시선은 결국 어희에게로 돌아가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를 훑었다. 아는 얼굴이긴 해도 볼 때마다 새로워서 새롭게 가슴이 뛰었다.
“도웅 씨.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니까, 솔직하게 대답해주세요.”
“…네.”
통장 잔고나 MBTI 유형을 물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어희의 분위기는 한없이 진지했고 비장했다.
“키스해도 됩니까?”
자신의 재산에 부모님이 명의 이전을 해준 본가를 포함해도 되는지, MBTI 유형 검사를 마지막으로 한 게 5년 전인데 아직 유효한지 머릿속으로 고민하던 도웅의 두눈이 번쩍 떠졌다.
“갑자기요?”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예전에는 그렇게 거부하더니 이제 와 키스해도 되냐 묻는 어희의 태도가 의문스러운 건 당연했다.
“예. 갑자기.”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뱀처럼 올라와 도웅의 목을 감쌌다. 적당한 힘이 실린 손길에 순순히 끌려가 준 도웅은 제 입술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맞댄 어희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관찰했다. 미세하게 떨리는 반쯤 내리깐 얇은 눈꺼풀과 살짝 모아진 단정한 미간 덕분에 어딘지 처연하게 보였다. 서로의 입술이 닿은 상태로 수십 초가 지났다. 그대로 멀어지려는 어희의 뒤통수를 붙잡은 도웅은 다른 한 손으로 턱관절 아래를 눌러 진득하게 아랫입술을 핥았다.
“읏….”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가, 할짝이는 도웅의 어깨를 어희가 슬쩍 밀었다. 힘을 써서 떼어내려면 충분히 떼어낼 수 있음에도 거절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미약한 힘이었다.
항상 올곧게 허리를 펴고 앉는 어희의 등허리는 도웅에게 떠밀려 뒤로 젖혀졌다. 턱관절을 누른 손은 아래로 내려가, 어희의 허리를 안정적으로 받쳐주었다.
쿵, 쿵 뛰는 심장 박동이 제 것인지 아니면 밀착된 어희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박동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는 키스가 이어졌다. 몸을 뒤로 뺀다거나 어깨를 밀어내는 어희의 몸짓은 멎은 지 오래였다.
3년 동안 제 디저트를 달고 살았으니 입술마저 달콤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평범했다.
내키는 대로 어희와 입술을 부비던 도웅의 머릿속으로 이성이 슬그머니 제동을 걸었다. 여기서 더 가면 위험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드는 순간 도웅은 쪽, 귀여운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도웅은 방울토마토처럼 붉어진 어희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후…! 사랑한다는 말이면 된다는데, 어희 씨도 참 격렬하네요.”
태연하고 뻔뻔하게 너스레를 떨었지만, 도웅의 얼굴도 열이 잔뜩 올라 화끈거렸다. 누군가 심장을 잡고 쥐락펴락하며 놀리는 느낌이었다.
“체리 먹어요.”
자주색 체리 접시를 어희 쪽으로 당겨 준 도웅은 냉동실을 열었다. 과열된 흥분을 식혀줄 만한 차가운 간식이 뭐가 있을까, 뒤적이다 젤리처럼 낱개로 포장된 얼린 홍시를 꺼냈다.
“홍시 먹을래요?”
이보다 더 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을 붉힌 주제에 먹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어희를 본 도웅은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 * *
장마가 시작되었다.
비만 오면 컨디션이 저조해지는 도웅은 새벽부터 심각한 표정으로 방울토마토를 땄다.
분명 어제 퇴근하기 전에 세었을 때는 열두 개였던 방울토마토가 어째서 오늘은 여덟 개뿐인가.
카페 입구에 두어 지나다니는 손님 옷깃에 자주 스쳐서 그런지, 이파리가 상하기에 주방 구석으로 옮겼더니 이제는 열매가 사라졌다.
의심은 자연스럽게 직원 영호에게로 향했다. 아니. 영호밖에 없었다. 함께 퇴근한 어희가 훔쳐 먹었을 리는 없으니 새벽에 저보다 일찍 나온 영호뿐이었다.
“…사장님, 무서우니까 그렇게 보지 말아주세요.”
방울토마토 서리범을 노려본 도웅은 작은 접시 가득 채운 방울토마토를 씻지도 않고 입에 쏘옥 집어넣었다. 싱싱한 방울토마토가 입안에서 톡, 터졌다.
“…….”
“…….”
이렇게 맛있는 걸 말도 없이 네 개나 몰래 따먹었다, 이거지.
곱지 않은 눈길에 영호는 결국 일하는 손을 멈추고 볼멘소리를 내었다.
“아, 대체 뭐길래요. 저 사장님한테 아무것도 잘못한 거 없어요.”
서서히 거리를 좁힌 도웅은 선심 쓰듯 손에 든 접시를 불쑥 내밀었다. 방울토마토를 집기 위해 자연스럽게 손을 뻗는 영호의 손등을 탁, 쳐냈다.
“너지.”
“네? 뭐가요?”
“네가 내 방울토마토 따 먹었지?”
“방울토마토요? 저기 있는 거요? 아뇨? 손도 안 댔어요.”
어희가 선물해준 방울토마토를 하나 더 집어 먹은 도웅은 시치미 떼지 말라는 듯 턱을 치켜올렸다.
“그럼 왜 네 개나 비는지 설명해봐.”
“와…, 억울해요. 사장님. 저 영호예요. 사장님하고 삼 년째 일하고 있는 영호라고요.”
부러 과장된 몸짓이나 신뢰를 강조하는 걸로 봐서는 확실한 범인이 틀림없다. 도웅은 불신의 눈빛을 거두지 않고서 우물우물 방울토마토를 먹었다.
“진짜 먹지는 않았는데 설령 먹었다 한들 방울토마토 네 개 때문에 저를 이렇게 핍박할 일이랍니까?”
자신을 믿어 달라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도웅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영호야. 네가 먹었잖아.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해주지.”
“아니라니까요, 정말로?”
“그래, 그래. 앞으로 먹고 싶으면 나한테 말해. 자, 세 개 먹어라.”
도웅은 접시에 남은 방울토마토 세 개를 영호에게 넘겼다.
억울해하면서도 방울토마토를 받아 먹는 영호를 보자 왜인지 어희가 떠올랐다.
“맛있어요.”
“그래. 맛있으니까 몰래 따 먹었겠지.”
“아 거참!”
도웅은 짜증을 내는 영호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조만간 영호의 집에 방울토마토를 보내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