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90)

평소보다 느리게 오픈 준비를 끝낸 도웅은 구석진 테이블에 늘어졌다. 창문 밖으로 쏟아지는 엄청난 빗줄기를 보고 있자니, 절로 힘이 빠졌다.

“사장님 괜찮아요?”

장마철만 되면 물에 빠진 슬라임처럼 축 처지는 도웅의 습성을 잘 아는 영호가 테이블을 기웃거렸다.

“전혀….”

들릴락 말락 한 작은 웅얼거림을 듣지도 않고 사라진 영호의 뒷모습을 보고 도웅은 매정한 놈이라며 짧게 혀를 찼다. 누구는 빗소리가 좋다고 영상까지 찾아 듣던데, 어째서 자신은 이렇게 거슬리는지 모르겠다.

“정 없는 놈.”

어디가 안 좋은지, 아프지는 않은지 걱정 한 톨 해주지 않는다. 극진하게 병간호를 해주었던 어희가 보고 싶었다.

도웅은 시계를 흘끔 쳐다봤다. 오픈까지 십여 분이 남아있었다. 테이블 끝에 붙어있는 호출 벨을 누르자 홀 끝에서 작게 띵, 소리가 났다.

띵, 띵, 띵, 띵.

한 번으로는 영호가 오지 않아서 도웅은 쉬지 않고 3초 간격으로 벨을 눌러댔다. 열다섯 번만의 호출 끝에 영호가 징그럽다는 얼굴로 다시 도웅의 테이블로 찾아왔다.

“…….”

“…….”

두꺼운 눈썹이 언짢게 위로 올라간 거로 봐서 별일 아니면 크게 짜증을 낼 분위기다. 탁 트인 눈매를 피곤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문지른 도웅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나 가도 돼? 몸이 너무 안 좋아.”

어깨가 무겁고 등도 뻐근했다. 미열은 없었지만, 두통은 있었다. 투정이 섞인 엄살에도 영호의 성난 눈썹이 온화해졌다.

“물론이죠. 저한테 허락받으실 필요 없이 집에 가고 싶으면 바로 가시면 돼요. 사장님이잖아요.”

절대 도웅을 가엾게 여겨서가 아닌 사장이 없는 일터를 꿈꾸는 어조였기에 도웅은 잠깐 버텨 볼까 망설이다, 카페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에 고집을 접었다.

“그래…. 사장이 없는 편한 하루를 즐기렴.”

흐느적거리는 동작으로 어희 전용 텀블러에 커피를 담은 도웅은 쇼케이스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곧 있으면 다른 직원이 하나둘씩 출근을 할 시간이었기에 최대한 빠르게 어희에게 줄 디저트를 골라야 했다.

“오늘 3201호 주문은 받지 마. 나 갈게. 고생해.”

마지막으로 영호에게 인사를 전한 후 도웅은 디저트가 든 종이 가방을 손목에 걸고서 카페를 나왔다.

우산을 쓰고 곳곳에 있는 물웅덩이를 피해서 천천히 걷다가 카페와 멀어질수록 기운 없이 처진 어깨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는게 느껴졌다. 두통도 사그라드는 게, 마치 학교를 조퇴한 학생 같았다.

잠시 후 현관에 도착한 도웅은 우산의 물기를 탈탈 털고 그대로 32층으로 올라갔다.

-띵동, 띵동, 띵동.

배달 주문을 하지 않은 어희를 현관까지 불러내려면 최소한 세 번의 벨은 눌러줘야 한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는 도웅은 연속으로 벨을 눌러 어희 소환식을 행했다.

끈질긴 벨 투정에 철컥,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진한 남색 잠옷을 입은 어희가 나왔다. 그는 약속 없이 찾아온 도웅을 보고도 익숙하다는 듯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왜 왔는지 안 물어봐요?”

안으로 들어간 도웅이 먼저 물었다.

“놀러 온 거 아닙니까?”

“맞긴 한데, 좀 달라요. 쉬러 왔어요. 비도 오고.”

“아하.”

그다지 놀라지 않은 어희는 단조로운 대답과 함께 도웅의 세 손가락을 잡아 이끌었다.

“마침 보여드릴 게 있었는데 잘 됐습니다.”

자랑거리가 생긴 아이처럼 도웅을 이끈 어희가 향한 곳은 작업실이었다.

한쪽 벽면을 채운 많고 많은 토끼끼 작품 중 호텔 토끼끼가 추가된 걸 눈썰미 좋은 도웅이 먼저 알아차렸다. 맨하튼에서 어희가 머물렀던 호텔과 외관이 같은 거로 봐서 광고인 듯했다.

“아. 이거 완성됐네요? 엄청나게 공들인 티 나요. 되게 멋지네. 조명 켜주면 안 돼요?”

“됩니다.”

환한 작업실 형광등을 끈 어희는 미니어처 조명 스위치를 켰다. 토끼끼 작품 전체에 조명이 켜지고 벽면이 트리처럼 알록달록해졌다.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작업실이었다. 조명의 색까지 신경 쓴 듯한 배치에서 어희의 센스가 엿보였다. 감탄을 연발하는 도웅의 옆으로 어희가 양손에 새로운 미니어처를 들고 다가왔다.

“보여드리려던 건 이겁니다.”

눈을 끔벅인 도웅은 이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희의 손에는 새로운 미니어처가 있었다. 커다란 벚꽃 나무 아래, 소풍을 즐기는 두 마리의 토끼끼. 익숙한 장면이었다. 도웅의 침실에 있는 디저트 웅, 미니어처에 있는 어희와 저였다.

“상품으로 낼 건 아니고 잠깐 쉬는 기간에 만들어봤습니다.”

벚꽃잎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연분홍색 조명을 받은 어희의 얼굴도 분홍색으로 보였다.

“어희 씨. 지금 제 감정 무슨 색으로 보여요? 저는 어희 씨가 되게 분홍분홍하게 보이거든요. 비슷하게 보일까요?”

분위기에 흠뻑 빠진 도웅이 물었다. 어희가 손에 미니어처만 들고 있지 않았더라면 찐하게 입술을 비볐을 텐데, 아쉬웠다.

“조명이랑 뒤섞여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조금 민망한 색이군요.”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피한 어희는 손에서 미니어처를 놓지 않았다.

“잠깐 미니어처 두고 와봐요.”

“…아뇨. 끝까지 들고 있을까 합니다.”

도웅은 꿋꿋하게 미니어처를 양손에 받치고 있는 어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언제 맡아도 기분 좋은 꽃 향을 찾아서 킁킁거리다가 어희의 귀가 불그스름하게 열이 오른 걸 발견했다.

바디 필로우도 아닌데 안고만 있어도 자동으로 힐링이 되었다. 어희의 허리를 안은 손을 깍지 낀 도웅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길게 울렸다.

“아. 잠깐만요.”

카페에 무슨 일이 생겼나?

핸드폰을 확인한 도웅은 02로 시작하는 지역번호에 잠깐 망설이다가 전화를 끊었다.

“안 받아도 됩니까?”

전화를 넘기자 어희가 몸을 돌렸다.

“네. 스팸 같아요.”

몸을 숙여 어희의 양손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은 도웅은 마음 놓고 편하게 안았다. 덕분에 어희는 미니어처를 잡은 두 손을 엉거주춤하게 높이 올려야 했다.

“저 오늘 쉬러 왔으니까 낮잠 자고 밥도 먹고 가도 돼요?”

“예. 눕고 싶으면 침실 쓰셔도 됩니다.”

“담요 하나 두르고 바닥에 늘어져 있고 싶어요. 보일러 세게 켜줘요.”

혼자 침대에서 누워서 잘 거였으면 집에서 쉬었다. 도웅은 최대한 어희가 잘 보이는 곳에서 늘어져 있고 싶었다. 그때 바지 주머니에서 또 긴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 보니 아까랑 같은 번호였다. 도웅은 어희를 안은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어희가 슬그머니 빠져나와 손에 든 미니어처를 작업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도웅은 상대방이 말이 없어, 끊겼나? 하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여보세요?”

재차 같은 말을 반복하자 전화가 뚝 끊겼다.

“누굽니까?”

미니어처를 내려놓은 어희가 다가왔다. 도웅은 전화 기록에서 나란히 찍혀있는 전화번호를 멀뚱히 보다가 도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몰라요. 잘못 걸었나 봐요. 집에 뭐 있어요? 먹을 거 있나? 없으면 좀 빈둥거리다가 같이 장 보러 갈래요?”

“좋습니다. 이불이 편합니까, 담요가 편합니까? 뭉그적거릴 장소는요.”

상담원처럼 이것저것 물어오는 어희와 함께 작업실을 나온 도웅은 하나씩 대답했다.

“괜찮으면 이불로 주세요. 어희 씨 근처에서 뭉그적거리고 싶어요. 오는 길에 커피랑 디저트 챙겨왔어요.”

지난번보다 얇은 이불을 받은 도웅은 포근하게 어깨 위에 걸치고 어희를 졸졸 따라다녔다.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어희의 발치에 앉아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섬유유연제 향이 솔솔 올라오는 포근한 이불과 머리를 기댄 딱딱한 무릎은 안정감이 있었다. 눈을 감고 나른함을 만끽하고 있는 도웅의 머리를 어희가 손으로 받쳤다.

“아. 무거웠어요?”

하긴. 작은 아기 머리도 아니고 다 큰 성인 머리통이니 제법 무게가 나갔으리라. 도웅이 머쓱해하는 사이 어희가 바닥으로 내려와 옆에 앉았다.

“불편할 거 같아서.”

도웅은 뒤로 젖힌 자신의 머리를 조심히 제 어깨에 기대게 한 어희의 무릎 위로 이불을 나눠 덮었다. 이 상태로 영화라도 보면 좋겠지만, 어희의 집에는 티브이가 없었다.

“편한 옷 드릴까요?”

“완벽하게 편한 상태라서 괜찮아요.”

대신 옆에서 쉴 새 없이 디저트를 냠냠거리는 소리가 귀여워서, 가끔 미소가 지어졌다. 고층에 베란다도 이중문으로 되어있어,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도웅이 가져다준 여러 달달구리를 골고루 음미하고서 어희는 커피로 입가심했다.

“음.”

어희가 만족스러운 디저트 타임을 즐기는 동안 도웅은 어느새 고른 숨을 내쉬며 얕은 잠에 빠져 있었다. 책이라도 가져올까, 싶었던 어희는 도웅이 깰까 봐 움직이지 못했다. 대신 어희는 슬쩍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소파 쿠션에 머리를 기댔다. 도웅의 복슬복슬한 머리칼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어희둥둥을 핑계로 데이트를 즐겼다. 도웅의 마음이 저와 같다는 걸 알고 나서 마냥 기뻤고 하루빨리 관계가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생겼다. 충동적으로 도웅의 감정을 내뱉은 날. 어희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현실을 보게 되었다.

우산을 쓴 사람들의 어그러진 관심과 감정이 순식간에 도웅에게로 쏠렸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곳이 아찔했다.

같은 성별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어희는 도웅이 그의 부모님으로부터 어떤 기대를 받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토록 사이좋은 가족이 저로 인해 다투거나 멀어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관계 정립을 원하는 도웅에게 우유부단하게 굴었다.

폴폴 풍기는 단내를 맡으며 도웅의 얼굴을 뜯어보고 있는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도웅의 핸드폰이 길게 진동하며 액정이 켜졌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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