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90)

액정에 큼직하게 올라온 수신자명을 보자 나름대로 평정을 되찾은 어희의 마음이 술렁였다. 누군가 뾰족한 창으로 양심을 쿡, 쿡 찌르는 느낌이었다.

“아. 깜박 잠들었어요.”

테이블 위에서 둔탁한 소리를 내며 울리는 진동 소리에 잠에서 깬 도웅은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어희 반대편으로 몸을 뉘었다.

“네에.”

-내 아들! 지난번 여자친구하고는 잘 만나고 있고?

한 달이 넘게 같은 비슷한 종류의 말을 하기 위해 꾸준하게 전화를 거는 아버지의 전화에 도웅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아이참. 제가 알아서 해요.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예요?”

어희의 시선이 신경 쓰인 도웅은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위로 조금씩 올라갔다.

“아빠, 요새 안 바빠요? 점점 통화 빈도가 잦아지는데.”

-아! 아빠가 말 안 했구나. 잠깐 휴가 냈어.

“갑자기요? 그럼 한국 와서 아들 잘 지내나 한 번 들여다봐야 하는 거 아녜요?”

도웅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비행기를 타도 나이가 젊은 놈이 타야지, 나이 든 아버지가 타야겠느냐부터 시작한 잔소리는 여자친구와 여행 겸 놀러 오라는 말로 끝맺음을 지었다.

“하하……. 끊을게요.”

영혼 없는 웃음을 흘린 도웅은 전화를 끊었다. 자식이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부모가 결혼을 강요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부모님까지 이럴 줄은 몰랐기에 도웅은 어색함과 부담감을 동시에 느꼈다.

“아버지는 잘 지내십니까?”

만나는 사람이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한 사실에 괜히 찔려서 이불 뭉치와 함께 꾸물거리고 있자 어희가 넌지시 물어왔다. 테이블 다리에 정강이가 부딪칠세라 테이블을 멀찍이 민 어희를 향해서 도웅은 손을 뻗었다.

“휴가까지 내서 매번 아들한테 전화할 정도로 잘 지내죠. 출출한데 나갔다 올까요?”

도웅의 손을 잡아 일으켜 준 어희가 현관으로 향했다. 도웅은 그의 커다란 뒷모습을 보며 눈을 느리게 끔벅였다.

어희가 신발을 신고 돌아볼 때까지 도웅은 멀뚱히 앉아만 있었다. 그렇게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도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희 씨.”

“예, 도웅 씨.”

“그… 잠옷 차림으로 나가는 건 상관없는데, 밖에 비도 오고 조금 쌀쌀하니까 겉옷이라도 걸치는 게 어떨까요?”

도웅의 말에 어희는 고개를 내려 아래를 봤다가 도로 신발을 벗었다. 심지어 맨발이다.

“금방 갈아입고 올 테니 기다려요.”

빠른 걸음으로 사라진 어희는 정말로 금방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남색 셔츠 안에 검은 폴라티를 입은 어희를 보고 도웅은 바지 밖으로 삐져나온 셔츠를 주섬주섬 집어넣으며 신발을 신었다.

따로 우산을 쓰고 아파트 후문으로 걷던 도웅은 문득 옆에 나란히 우산을 쓰고 있는 어희를 바라봤다. 축축하게 비가 오는 날이 좋은지 어희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있었다.

보통… 연인끼리는 우산을 같이 쓰지 않나?

엄청난 키스 이후 연인이 되었다 믿어 의심치 않은 도웅이 먼저 우산을 위로 쑥 올린 상태에서 물었다.

“들어오실래요?”

“…….”

“싫으면 말고.”

어희 키에 맞춰서 올린 우산을 도로 내린 도웅은 시무룩해져 젖은 땅을 보고 걸었다. 물웅덩이를 보고 껑충 뛴 노력이 무색하게도 옆에서 어희가 무심히 물웅덩이를 밟는 바람에 몇 방울이 튀었다.

“제 우산이 더 큽니다.”

“좋겠어요, 우산 커서.”

“그러니까, 제가 들어가는 것보다는 도웅 씨가 들어오는 게 더 나을 것 같지 않습니까?”

설득력 있는 말에 냉큼 우산을 접은 뒤 어희의 우산 안으로 들어간 도웅은 바짝 붙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웬만한 거 다 잘해요, 나. 말만 해요.”

“저도 웬만한 건 다 잘 먹습니다.”

“그럼 라볶이나 해 먹을래요? 매운 거 잘 먹어요?”

“예.”

어희가 긍정적인 대답을 했지만,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건 왜일까. 맵기 조절은 학교 앞 분식집 정도로 맞추기로 결심한 도웅의 눈에 익숙한 트럭이 들어왔다.

“오. 라볶이 재료 사고 오는 길에 전기구이 통닭도 사요. 맛있겠다.”

반지르르하게 기름을 두르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통닭을 보자 군침이 꿀꺽 삼켜졌다. 닭 다리는 노란 머스타드 소스에, 퍽퍽한 가슴살은 소금에 찍어 먹으면 정말 맛있다. 게다가 전기구이 통닭은 안에 밥도 들어있지 않은가. 여러모로 든든한 한 끼 식사였다.

“통닭은 점심으로 먹고 라볶이는 저녁으로 먹으면 되겠다. 그쵸?”

저녁까지 어희의 집에 뭉그적거릴 생각은 없었으나 계획이란 건 늘 그렇듯 상황에 맞춰서 융통성 있게 수정해야 한다. 전기구이 통닭을 보고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장마철이라 대부분의 노점이 문을 닫은 만큼 전기구이 트럭을 발견한 게 마치 커다란 행운처럼 느껴졌다.

도웅의 빨라진 걸음 속도에 맞춰서 어희도 걸음을 재촉했다.

* * *

적당히 오후 여덟 시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던 도웅은 예상과 달리 열 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어희와 함께 아파트 단지를 나왔다.

마트에서 라볶이 재료와 같이 구매한 800피스짜리 직소 퍼즐을 맞추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집중했다.

“둘이서 머리 맞대고 맞춰서 완성은 했네요. 액자 도착하면 연락 줘요.”

“예. 그러죠.”

장을 보러 갈 때처럼 어희의 우산을 나눠 쓰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카페 앞에서 어희의 걸음이 멈췄다. 빗속을 두 걸음 걷다가, 도웅이 도로 뒷걸음질로 어희의 우산 안으로 들어갔다.

“커피 마시고 싶어요? 내려줄까요?”

불이 꺼진 제 카페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어희를 본 도웅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물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퇴근 안 한 직원이 있습니까?”

“시간이 몇 신데 아직까지 남아있는 사람이 어딨어요. 왜요?”

도웅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제 카페로 향했다.

“사람을 본 거 같아서요….”

어희의 고개가 비뚜름하게 옆으로 기울어졌다. 자신이 없어 보이는 어조에 도웅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커피 줄 테니까 들어와요.”

열쇠를 찾아서 잠긴 문을 열자 우산을 접은 어희가 도웅을 제치고 먼저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핸드폰 플래시를 켠 어희가 매장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도웅은 카페 조명을 켰다. 커피 한 잔 대접하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저렇게까지 연기를 하는지 모를 일이다.

“앉아요, 앉아. 디저트도 줄까요?”

당연히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어희는 머쓱한 얼굴로 바 테이블에 앉았다. 그에게 커피와 푹신한 시폰 케익을 내준 도웅은 해맑게 입을 뗐다.

“꼭 카페가 마지막 데이트 코스 같지 않아요?”

“제가 잘못 본 모양입니다. 비가 많이 와서….”

어수룩한 거짓말도 참 귀엽다고 여긴 도웅은 자연스럽게 어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오늘 재밌었어요. 벚꽃 미니어처도 멋졌고.”

미니어처야말로 어희만 해줄 수 있는 이벤트였다. 어희한테 자꾸 신세를 지거나 받는 일이 많아졌다. 도웅은 보름도 남지 않은 어희의 생일을 기억하고는 무얼 해줄지 잠깐 고민에 빠졌다.

직원 생일이라면 당연히 현금 박치기가 최고였고 부모님 생신 때는 적극적인 부모님이 직접적으로 원하는 물건을 골랐기에 연인의 생일은 어떻게 챙겨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첫 연애라서 더욱 그랬다.

“어희 씨, 뭐 갖고 싶은 거 없어요? 아니면 받고 싶은 거나.”

“음.”

케이크를 먹으며 고개를 끄덕인 어희를 보는 도웅은 더 고민에 빠졌다.

당장 갖고 싶은 게 뭐냐고 물어본다면 도웅은 타코야끼 기계나 솜사탕 기계 같은 내 돈 주고 사기는 싫은 것들을 줄줄이 늘어놓을 수 있었다. 반면 어희는 집에 자질구레한 물건을 두지 않는 건 물론이고 물욕도 없어 보였다.

무난하게 옷이나 액세서리 같은 선물도 좋았지만, 도웅은 자신만 줄 수 있는 특별한 걸 선물해주고 싶었다. 끙끙거리며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 케이크를 깔끔하게 삭삭 긁어먹은 어희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도웅 씨는 갖고 싶은 거 없습니까?”

어희의 눈빛으로 보아 말하면 바로 사 줄 기세였다. 선물을 줘도 모자랄 판국에 역으로 선물을 받아 버리는 몰상식한 상황이 벌어질 거 같아, 도웅은 없다고 대꾸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만 갈까요?”

집에서 검색이나 해봐야겠다.

남자친구, 생일, 선물, 20대 후반 남자 등의 키워드를 떠올린 도웅은 어희가 먹은 식기를 구석으로 밀어놨다.

카페를 나와 얼마 되지 않아서 집에 도착한 도웅은 난생처음으로 지나치게 가까운 집과 일터의 거리에 아쉬움을 느꼈다. 냉큼 들어가지 않고 빌라 입구에서 우물쭈물하는 도웅의 코앞으로 희고 커다란 손이 불쑥 올라왔다.

“얼른 들어가세요. 감기 걸리겠습니다.”

콧잔등에 튄 빗물을 닦아준 어희의 자상한 어조에 도웅은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에야 성큼 한 걸음 다가갔다.

손을 올려 목덜미를 잡아 자신에게로 당긴 도웅은 어희의 입술에 가벼운 뽀뽀를 하고 떨어졌다.

“다음에 또 같이 놀아요. 조심히 가요.”

스킨십을 하면 아쉬움이 덜 할 줄 알았는데 더 커졌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내일도 출근을 못 할 것 같아서 도웅은 몸을 틀어 계단을 두 칸씩 올라갔다.

도어락을 누르고 집으로 들어간 도웅은 헤헤, 웃으며 욕실로 쏙 들어갔다.

개운하게 씻고 나와서도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연애, 연애하나 보다. 연애는 참 좋은 거였다. 대화를 나누는 것도 즐겁고 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도웅은 처음 하는 연애가 매우 흡족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어희가 미니어처를 들고 온 날에 진작 받아줄 걸 그랬다는 후회까지 들 정도였다.

잘 준비를 끝내고 양손에 핸드폰을 쥔 도웅은 생일 선물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바로 선물을 고를 수 있을 거라 여기진 않았다. 어떤 종류의 선물을 줄지 범위를 줄이기 위해 시작된 검색은 새벽 두 시가 되어서까지 계속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