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웅은 나윤과 함께 멀뚱히 서서 경찰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출동한 경찰은 사장인 도웅에게 이것저것 캐물었다. 채 가시지 않은 충격 때문에 도웅은 어벙하게 대꾸했다.
방울토마토가 없어진 소소한 일과 접시가 깨진 일 그리고 방금 깨진 유리창 외에는 말할 거리가 없었다. 되려 나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웬 수상한 인영이 저쪽으로 뛰어가는 거 같았다며 두 팔 걷고 나섰다.
“주변에 원한 살 일은 없어요?”
경찰관의 말에 도웅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옆에서 나윤이 작게 중얼거렸다.
“살 게 얼마나 없으면 원한을 사겠어….”
드물게 나윤의 말에 공감한 도웅은 “방금 말은 좀 재밌었어.” 하고 작게 속삭였다. 자잘한 질문에 성실히 대답한 도웅은 오늘 낮에 걸려 온 전화가 생각났다.
“어제부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오긴 했어요.”
도웅은 차단해 놓은 번호를 보여주었다. 통화 시간은 전부 15초 미만이었다.
“내일 아침에 서에 와주셔야겠어요. 인적 사항이 필요해서요.”
네, 네. 고개를 주억인 도웅은 가게를 대강 정리하고 카페를 나왔다.
“와. 미친. 살다 보니 별의별 미친놈들 많네.”
나윤의 말에 도웅은 멍하게 대답했다.
“그러게.”
“서울에 깔린 CCTV가 몇 갠데 제정신 아닌 듯. 금방 잡힐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나저나 돌을 던져? 살인미수 아니냐?”
“유리창만 깨진 게 다행이지.”
“다행은 무슨. 재수 옴 붙었다. 카페는 계속할 거지? 만약 접을 거면 나한테 귀띔해주라. 내가 들어와야지.”
쓸데없는 말이 많아진 걸 보면 나윤도 놀라긴 놀란 모양이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도웅은 부러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같이 있어 줘서 고맙다. 나 먼저 갈게.”
“오냐. 당분간 조심해.”
“으응.”
도웅은 잠시 망설이다가 어희 집으로 향했다.
돌멩이 테러에 놀란 가슴, 어희로 진정시켜야겠다. 이번에는 대뜸 찾아가기보다는 가는 길에 전화를 걸었다. 두르르, 하는 신호음이 네 번 정도 흐르고 나서 어희가 전화를 받았다.
-예, 도웅 씨.
“으아아…! 어희 씨. 저 오늘 재워주면 안 돼요?”
-…….
“아니, 꼭 재워줘요.”
집에 누수가 생겼을 때 선뜻 긍정적인 대답보다는 이유를 캐물었던 게 생각 난 도웅은 걸음을 재촉했다. 거절당하기 전에 어희의 집에 도착할 요량이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네, 네! 있어요! 엄청 큰일!”
거의 뛰다시피 로얄 골드 펠리스에 도착한 도웅은 주머니를 뒤져 공동현관 키를 갖다 댔다.
“저 지금 엘리베이터만 타면 되는데, 재워줄 거죠? 네?!”
-얼른 올라와요.
마침 1층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홀랑 탄 도웅은 32층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큰 한숨을 내쉰 후 엘리베이터 벽면에 붙은 거울을 힐끔 쳐다봤다. 창백하게 질린 게 꼭 어희 피부 같았다.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도웅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희를 보고 시원하게 트인 눈매를 깜박였다.
“흐어어어.”
눈처럼 크게 벌어진 입에서는 괴상한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지만, 안도감이 드는 와중에 반가움이 섞였다.
어희는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도웅의 손을 잡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입니까?”
어희의 물음에 도웅은 우수수 말을 쏟아냈다. 당황으로 얼룩져, 횡설수설에 가까웠지만, 어희는 묵묵히 도웅의 말을 경청했다.
방울토마토가 사라진 일에 대해서는 몇 번이나 되풀이했으면서 정작 접시가 깨진 일은 간략하게 한 번으로 끝냈다. 그리고 대망의 돌멩이 사건을 툭툭 털어놓으며 나윤에 관한 이야기는 대학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래서 이렇게 하루 신세 지러 오게 됐어요.”
길고 긴 횡설수설을 끝낸 도웅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많이 놀랐겠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로봇이 잘 작동하는지 점검하는 엔지니어처럼 도웅의 얼굴과 팔, 상체 등 여기저기를 들었다 놓으며 일일이 검수를 마친 어희는 말을 이었다.
“당분간 함께 다닐까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으나 도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야 좋다.
“어희 씨 안 바쁘면요.”
“안 바쁩니다. 편한 옷 줄 테니 씻고 와요.”
트레이닝 바지와 반소매 티를 받은 도웅은 익숙하게 욕실로 향했다. 놀란 가슴은 완벽하게 진정되지 않았으나 혼자가 아니어서 그런지 안심되었다. 꾸물꾸물 옷을 벗은 도웅은 칫솔을 챙겨오지 않은 걸 깨닫고서 욕실 문을 한 뼘 열어 어희를 불렀다.
“어희 씨, 어희 씨~ 어디 계신가요, 어희 씨.”
애타게 서너 번을 부르고서야 종종걸음으로 어희가 걸어왔다. 한 손에 커피포트 주전자를 들고 있었는데, 김이 펄펄 나는 것이 영 불안했다.
“칫솔 안 들고 왔는데 새 거 꺼내 쓸게요?”
“아, 예.”
욕실 문을 닫은 도웅은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목덜미를 주물렀다. 매운 치약과 재회는 기쁘지 않았으나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치약쯤이야 감내할 수 있다. 굳은 결심을 하며 선반을 열었다. 맨 위 칸에서 새 칫솔을 꺼내고 아래로 내려간 도웅의 손이 멈췄다.
“어….”
결심이 무색하게도 매운 치약 옆에는 평범한 치약도 함께 누워있었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듯 표면이 구김살 없이 매끄러웠다.
다시 어희를 불러서 써도 되는지 물어볼까, 망설인 도웅은 과감하게 어희의 매운 치약을 쭉 짠 뒤 입에 물었다.
개운하게 씻고 나온 도웅은 젖은 머리 위에 수건을 얹고 나오자마자 어희에게 어깨를 붙잡혔다.
“어어, 왜요?”
떠밀려 파우더 룸으로 들어간 도웅은 복숭아 향 로션을 얼굴에 문지르며 어희를 살폈다. 이 양반이 또 왜 이럴까.
의심 많은 다람쥐처럼 눈동자를 기민하게 굴리는 도웅을 무시하고 어희는 서랍에서 헤어드라이어를 꺼냈다.
“저 머리 말려 주게요?”
왜요?
도웅의 마지막 말은 헤어드라이어 소음에 묻혔다. 미지근한 바람과 어희의 손길에 뒤통수에 닿아 도웅은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앞머리를 쓸어 올려주며 꼼꼼하게 머리카락을 말려 주는 어희의 손길은 미숙했으나 표정은 진지했다. 거울을 통해서 어희를 훔쳐본 도웅은 덕분에 심심해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윽고 헤어드라이어 소음이 멈췄다. 뽀송뽀송하게 마른 도웅의 머릿결을 빗질까지 해준 어희는 주변을 정리했다.
“다 크고 나서 누가 머리 말려 주는 건 처음이에요. 되게…, 낯간지럽네요.”
유독 부슬부슬한 제 머리칼을 만진 도웅은 바깥에서 들리는 제 핸드폰 소리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걸려 올 전화는 안 봐도 뻔했다.
“흐어어, 아빠아아.”
아버지에게 칭얼거림이 잔뜩 묻은 우는소리를 한 도웅은 무슨 일이 있냐는 걱정 어린 목소리에 헛기침을 했다.
“아무 일 없어요. 그냥 보고 싶어서 그렇죠.”
괜히 외국에 있는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치기는 싫었다. 소파에 앉아 통화하는 도웅의 앞에 티백이 우려진 따뜻한 차 한 잔이 놓였다. 자연스럽게 도웅의 시선은 어희에게 향했다.
-누누이 말했다마는….
“아. 알죠.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아빠, 저 오늘은 친구 집에서 잘 거라 이만 끊어야겠어요.”
친구인지 애인인지 확실히 하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버지 옆에서 들렸지만, 도웅은 못 들은 척 전화를 끊었다.
“웬 차예요?”
차만 두고 홀랑 떠난 어희는 부엌에서 설거지 중이었다. 찻잔을 들고 식탁에 앉은 도웅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차를 마셨다.
설거지를 마친 어희는 찬장에서 커다란 뻥튀기 봉투를 들고 도웅의 맞은편에 앉았다. 난데없는 뻥튀기 등장이 어이없으면서도 어희다웠다. 제 얼굴만 한 뻥튀기를 바삭바삭 먹는 걸 보고서 도웅도 손을 내밀었다.
“나도 줘요.”
치사하게 혼자 먹는 게 어디 있담.
도웅은 보름달처럼 둥그런 뻥튀기를 받아서 한 입 베어 물었다.
따뜻한 차와 투박한 간식에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어희 집으로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꿉꿉했다. 하지만 당장 해결할 방법이 없는 사건은 미뤄놓기로 했다.
“맞다. 영호한테도 얘기해놔야겠네.”
깨진 유리창에 대충 박스를 붙여 놓고 나온 터라 새벽부터 나오는 영호가 식겁할 게 불 보듯 훤했다.
[영호야…… 자니…?]
첫마디가 전 남친처럼 구질구질했다. 읽음 표시가 뜨지 않는 걸로 봐서는 자는 모양이다.
“내일은 쉬는 게 어떻습니까.”
물끄러미 지켜본 어희가 걱정 여린 목소리로 물었다. 카페를 하루 닫으면 손해가 얼마인지 빠르게 계산을 마친 도웅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쉬어도 카페는 닫으면 안 돼요.”
하루쯤은 쉬어도 큰 타격은 없었으나 ‘굳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매월 나가는 월세며 월급, 보험 등등을 생각하면 아까웠다.
“그러면 도웅 씨라도 쉬어요.”
머리만 닿으면 금세 곯아떨어지는 영호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장문의 메시지를 써 내려가던 도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 일을 겪었으니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될 것 같다. 메시지 마지막에 쉰다는 말과 함께 전송을 누른 도웅은 핸드폰을 내려놨다.
“그러면 우리 내일 뭐 할래요?”
자연스럽게 데이트 계획을 물었다. 하루가 통째로 비었으니 무얼 해도 좋았다. 당일치기로 바다를 보러 가도 괜찮을 만큼 여유 시간이 있었다. 도웅은 재빨리 머릿속으로 바다 근처 횟집이 나은지 조개구이가 나은지 저울질했다.
“경찰서 가야 하지 않습니까?”
“아….”
뻥튀기 봉지 끝을 돌돌 말아 깔끔하게 밀봉한 어희는 식탁에 떨어진 가루를 손으로 모아 정리했다.
“그러면 아침 일찍 갔다가 놀러 갈까요? 오래간만에 쉬는데.”
대낮부터 어희 집에서 늦장을 부릴 때도 있었지만, 아예 하루를 쉬는 건 오랜만이었기에 도웅은 꼭 어희와 놀러 가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희는 망설이다가 흔쾌히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좋습니다.”
웬만하면 거절을 하지 않는 어희였기에 도웅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