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90)

어희는 고개를 가로저어 잡념을 떨쳐냈다.

“제리는 왜요?”

“진짜 이름이 제리입니까?”

“별명이에요.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귀가 커서.”

직원들이 하도 별명으로 부르는 통에 이젠 도웅도 그의 실명이 가물가물했다.

어희의 손까지 타올로 닦아준 도웅이 욕실을 나왔다.

“그래서 내가 두고 간 게 뭐예요? 뭘 두고 갔더라?”

거실을 둘러봐도 딱히 놓고 간 물건이 없었다. 휑한 거실 벽면에 이전에 함께 맞춘 800피스 명화 퍼즐이 액자에 잘 걸려있는 것만 빼면. 

익숙하게 냉장고를 열어 탄산수를 꺼내 마신 도웅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실은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눈치챘어요.”

도웅의 말에 번쩍 눈을 뜬 어희가 소파로 걸어왔다.

그를 잘 몰랐던 옛날에는 종종 무서울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예쁘고 귀여웠다.

“도웅 씨도…, 눈치챘습니까?”

옆에 앉지 않고 도웅의 발치에 무릎을 접어 앉은 어희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오뚝한 콧날 아래 가지런한 인중을 지나 가로선이 긴 입술을 구경하며 입을 뗐다.

“네. 저 의외로 눈치 빠른 거 알잖아요.”

“…다행입니다.”

“나랑 더 놀고 싶어서 핑계 댄 거죠?”

그래도 그렇지, 일터 바로 앞에서 이렇게 끌고 올 건 또 뭐람. 

어희를 만나고부터 일찍 퇴근하거나 일을 쉬어버리는 날이 굉장히 잦아졌다. 자영업이라 다행인 걸지도 모른다. 회사원이었다면 이렇게 시간 내기도 빠듯했을 테니.

“오늘은 뭐 하고 놀래요?”

천진한 물음에 어희는 실망한 사람처럼 눈을 내리깔고서 말문을 열었다.

“그…, 제리라는 사람 말입니다.”

이미 지나간 화제가 다시 나왔다. 눈을 깜박인 도웅이 슬그머니 허리를 낮춰 제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양손을 얹은 어희와 시선을 마주했다.

“걔가 왜요?”

어떤 비밀 이야기가 나올까. 기대하는 도웅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본 어희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관상이…, 별로입니다.”

“네?”

“별로가 아니라 아주 안 좋아요.”

“관상도 볼 줄 알아요?”

“…….”

입을 꾹 다문 어희를 기다리다, 도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걱정 말아요. 일단 자세히 사정 좀 들어보고 올…!”

냉큼 카페로 돌아가려는 도웅의 몸이 아래로 기우뚱 기울었다.

“…….”

“어희 씨? 무슨 할 말이라도 남았어요?”

알면서 묻는 도웅의 능청스러움에 어희가 소파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들겼다.

“어떤 일 때문에 그러는 걸까요.”

도웅은 허허, 하고 짧은 웃음을 흘리며 도로 앉아 멀뚱히 어희를 바라봤다.

“하아.”

작은 한숨을 내쉰 어희는 도웅의 종아리를 모아 끌어안았다. 양팔과 다리까지 써가며 안은 게 나무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원숭이 같기도 했다. 그러고는 머뭇거리다가 도웅의 무릎에 이마 아래, 오목한 눈가를 묻었다.

“도웅 씨가…, 안 좋아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혼자서 비장한 어희의 목소리에 도웅은 그저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단순히 머리가 보여서 슬슬 쓰다듬었던 것인데, 어희는 재촉으로 받아들였는지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커다란 등과 어깨가 작게 부풀었다가 꺼졌다.

“머리 풀어도 돼요?”

“예. 됩니다.”

동그란 머리통을 수월하게 쓰다듬기 위해서 도웅은 검은 고무줄을 풀었다.

“…고등학생 때,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고 했었죠.”

“네. 무섭다고 그랬잖아요.”

“띄엄띄엄이긴 하지만 등교를 하긴 했습니다.”

“으음.”

“다른 반에 심한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폴폴 풍기는 꽃 향을 음미하며 머리를 어루만지던 도웅의 손이 멈칫했다.

“말 한마디 나눠보진 못했지만,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알고 있었습니다. 늘 우울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늦은 점심에 등교를 한 날이었습니다. 그…….”

말끝을 흐린 어희의 뒤통수를 쓸어주자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쳤습니다. 스쳐 지나간 게 고작이었지만, 어디에서도 못 본 감정이었어요. 그날따라 유독 어둡고 무서워서, 결국 집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도망치고 싶었어요.”

“…….”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처음 알았던 그날, 학교에 칼부림이 났습니다.”

어희에 의해서 꼼짝없이 붙들려 있는 종아리를 타고 작은 떨림이 전해져왔다.

“우울과 불안, 원망, 혐오 같은 게 다 섞여 있는 그건 살의였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 그때부터 등교를 거부했습니다. 미약하긴 했어도 아까 제리라는 사람도 비슷한 게 보여서…, 도웅 씨가 멀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무서워서 학교 안 갔다더니 그냥이 아니잖아요.”

실제로 칼부림을 본 것도 살이 떨릴 만큼 무서운데 감정을 보는 어희는 더욱 무서웠을 게 분명하다.

도웅은 그의 어깨를 손으로 주물러주며 긴장을 풀어주었다.

“엄청 무서웠겠다.”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아마 제리가 가진 살의는 내가 아닐걸요. 꼬박꼬박 월급도 잘 주는데, 나.”

그제야 카페 앞에서 헤어진 어희가 다시 돌아온 이유를 알게 된 도웅은 마음 한구석에 남은 제리 걱정을 떨쳐냈다.

“그래도 어희 씨 말이니까 멀리할게요. 무서웠을 텐데 데리고 도망쳐줘서 고마워요. 아. 영호는 괜찮으려나? 잠깐 연락 좀 해볼게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혼자 일하고 있을 영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파이라도 만들고 가지 카페 앞에서 그렇게 가버리시면 어쩐대요.

신호음 한 번이 끊기기도 전에 영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 뭐 두고 온 게 생각나서. 제리는?”

핸드폰 너머로 커다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몰라요, 저도. 뭐, 사정이 있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건 안 알려주고 다시 일하고 싶답니다.

“으음.”

-이런 적은 처음이긴 해도 사정이 있었다고 하니까…, 제리가 일은 무난하게 잘했잖아요.

제리의 복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영호의 목소리를 들으며 도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두 달도 아니고 일 년 반 동안 얼굴을 보며 일한 제리의 사정을 이해해줬을 터다. 어희의 말을 듣기 전이였다면.

숨을 몰아쉬고 있는 어희의 등판에서 천장으로 눈길을 옮긴 도웅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간단한 연락도 없이, 보름 동안 무단결근한 직원을 계속 써야 하나.”

-…….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챈 영호는 침묵했다. 도웅의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 향했다. 둥글둥글한 어희의 머리에 쑥 손을 집어넣었다. 손가락 사이로 얽히는 머릿결은 부드럽다.

“됐다 그래. 걔 쓸 생각 없어.”

-네에. 그렇게 연락 넣어놓을게요. 사장님 그래서 오늘 출근 안 하시나요?

“할 거야. 이따 봐.”

전화를 끊은 도웅은 여전히 제 무릎에 얼굴을 묻은 어희를 내려봤다. 길쭉한 팔다리에 꽁꽁 묶여있는 다리는 조금 곤란했다. 발가락이라도 잘못 까딱했다간 중요 부위에 닿을 거 같아서 꼼짝하지 못했다.

“어희 씨, 어희 씨. 계속 이러고 있을 거예요?”

“이 자세가 안정감이 듭니다.”

“…….”

도웅은 발가락을 안으로 오므리고 가만히 앉아 크게 하품했다. 푹신한 가죽에 몸을 기대고 있었으니 나른함이 몰려오는 건 당연했다. 집주인처럼 포근하고 다정다감한 분위기에 휩쓸려 낮잠을 잘지, 말지 꾸물거리던 도웅은 눈을 감고서 생각에 잠겼다.

“아.”

그러다 깜박 잠이 들어버린 도웅은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악몽을 꾼 건 아니고 저도 모르게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깬 것뿐이었다.

“아이고. 어희 씨, 미안해요.”

남자라면 예민할 수밖에 없는 부근을 실수로 퍽 차버린 도웅이다. 갑작스럽게 신체에 가해진 폭력에 어희는 커다란 몸이 들썩일 정도로 놀라 뒤로 자빠졌다가 테이블에 머리를 꽝 부딪쳤다.

“괜찮아요? 아파요?”

부딪친 머리를 걱정해줘야 하는지, 걷어차인 중요 부위를 걱정해줘야 할지 헷갈린 도웅은 신체 부위 언급을 회피했다.

민망하게도 한 손은 머리, 다른 한 손은 중앙부를 슬쩍 쓰다듬은 어희는 눈썹을 찌푸리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어희가 가진 특별함을 알고 있는 도웅은 엉거주춤하게 일어나서 머리통을 손으로 쓸어 살폈다.

“어제 저녁에 디저트 먹었으니까, 징크스 아니고 실수예요. 내 실수.”

“아.”

“다행히 혹은 안 났어요. 많이 아파요?”

“괜찮, 습니다….”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 얼굴로 괜찮다고 대답한 어희에게서 도웅은 등을 돌렸다.

“안 보고 있을 테니까, 웅크리고 있을래요?”

살살 찬 것도 아니고 제법 힘이 실렸던 터라 도웅 나름의 배려였다.

“그러면 잠시만….”

고통을 감내하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작게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렸다. 얌전히 몸을 돌려서 그의 통증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는 도웅의 눈에 커다란 베란다 창이 비쳤다.

“…….”

“…….”

남색 필름이 붙어있는 베란다 창문에는 어희가 새우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꼬리뼈를 주먹으로 퉁, 퉁 치고 있는 광경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의 자존감 보호를 위해 도웅은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정말 고의로 그런 거 아녜요. 어쩌다가 한 번씩 놀라면서 잠에서 깰 때가 있잖아요.”

“예. 괜찮습니다.”

퉁, 퉁, 퉁.

꼬리뼈를 치는 소리가 귀에 쏙쏙 박혔다.

“통증 심하면 병원이라도 갈래요? 지금 이 시간이면 응급실을 가야 하나?”

“괜찮습니다.”

통, 통, 통.

이런 경우에는 비뇨기과인지 외과인지 헷갈렸다.

“아이고…. 진짜 미안해요.”

같은 남자로서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통, 통 소리가 멎은 걸 확인하고서 도웅은 힐끔 베란다 창문을 확인했다. 굽은 등을 편 어희가 뒤통수를 매만지며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제 돌아서도 되나요?”

“예. 출근하셔야 하니까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병원 안 가봐도 괜찮은 거 맞죠?”

“정말로 괜찮습니다.”

살짝 얼굴을 붉힌 어희의 대답에 도웅은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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